■ 경주이씨/묘갈,묘비,묘표

형조참판증이조판서이공형좌묘갈명 탁본첩(57면)

야촌(1) 2020. 12. 13. 01:54

조선 후기 인천 출신으로 수원부사와 인천부사를 역임한 이형좌李衡佐,1668(현종 9)

~ 1746(영조 22) 선생의 묘갈명 탁본첩이다. 총57面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 : 22 × 39.8cm 이다.

 

 

 

 

 

지암 이철보止庵 李喆輔,1691年(肅宗 17)~1775年(英祖 51)  撰, 이종백(李宗白) 전자(篆字), 이종덕(李宗德) 書로 1750년에 세운 「李衡佐,1668(현종 9) ~ 1746(영조 22)」선생의 묘갈명 형조참판증이조판서이공묘갈명(刑曹參判贈吏曹判書李公墓碣銘)탁본첩으로 57面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기는 22 × 39.8cm 이다.

 

■이형좌(李衡佐)

    [생몰년] 1668년(현종 9)~1746년(영조 22)

    [진사] 숙종(肅宗) 28년(1702) 임오(壬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9위(49/100)/

               100명[一等5명/二等25명/三等7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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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조선 후기에 오늘날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가 속해 있었던 인천도호부의 부사를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윤(景尹)이다.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의 현손(玄孫=高孫)으로 아버지는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세필(李世弼)이고, 어머니는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역임한 박세모(朴世模)의 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다.

 

선생은 1702년(숙종 28)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관(蔭官)으로 출사하여, 영유현령(永柔縣令), 천안군수(天安郡首)를 거쳐 1712년 1월 25일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로 부임하여 1715년 6월 23일까지 42개월 역임했다.

 

1717년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재임시엔 선정을 베푼다는 암행어사의 보고에 따라 포상을 받았다.

1728년(영조 4)에는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다가 강원도관찰사(江原道 觀察使)로 승차했고, 이후 호조참의(戶曹參議), 수원부사(水原府使),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판결사(判決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이 인천부사에서 이임한 지 1개월 후인 1715년(숙종 41) 7월에,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이형좌청덕선정비(李衡佐淸德善政碑)’가 건립되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349-2번지 인천향교 앞 비석군에 남아 있다

 

출처 : 수원박물관(명재연구소부설)

        『저촌유고(樗村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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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비(善政碑)에 대하여

 

선정비(善政碑)는 일반적으로 관직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에게 은혜와 교화를 베풀었을 때 이를 기념하고 칭송하는 의미에서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보통은 ‘선정비’로 통칭하지만 ‘공덕비(功德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 ‘선정불망비(善政不忘碑)’,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 ‘인정제민비(仁政濟民碑)’,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 등으로 다양하게 표기된다.

 

이러한 선정비는 주로 관아 근처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나 고개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마을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천이 도시화되면서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한 곳에 모아 놓았기 때문에 인천향교 앞 비석군을 이루게 되었다.

 

1930년 대에 인천도호부 관아였던 지금의 문학초등학교 앞에 5기의 선정비만이 있었으나, 1949년 10개의 선정비를 이곳으로 모아 왔고, 그 뒤로도 3개의 선정비를 더하여 1970년대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인천향교 홍살문 좌측에 자리 잡은 비석군은 향교 중수를 기념한 ‘우강노공학영존성비(佑江盧公鶴永尊聖碑)’ 옆으로 17기의 비석, 그리고 1기의 좌대가 일렬로 서 있다.

 

조선 인조 때 인천부사를 지냈던 이후천(李後天) 등 14인의 인천부사에 대한 선정비 16개와 1876년에 세워진 경기도관찰사 민태호(閔台鎬)의 선정비 1개가 그것이다.

 

황운조(黃運祚)와 박제성(朴齊晟)의 선정비는 각각 두 개씩이고, 좌대만 남은 것은 인천부사 정동면(鄭東勉)의 청덕선정비(淸德善政碑)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1891년에 세워진 ‘을사오적’ 중 한 명 박제순(朴齊純)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도 있었으나, 2005년 시민단체의 문제제기로 철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