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설 편
나그네 설움’의 정다운 목소리
1971. 08. 08 방송
- 이제는 영원히 가버린 세월, 청춘의 화려한 낭만과 감상이 번져있는 그리운 노래. 세월은 흘러 갔지만 아직
도 가슴속에 남아있는 정다운 노래와 함께 그 시절 그 가수의 얘기를 더듬어 보는 추억의 스타 앨범. 오늘은
백년설 편 입니다.
오늘도 걷는다만은 정처없는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의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나그네!,
대중가요의 영원한 테마 였는지도 모르는 쓸쓸한 나그네.
고향을 버리고 떠난 외로운 나그네.
나그네를 주제로 한 많은 노래를 불러 어쩌면 영원한 나그네인지도 모르는 우리의 가슴을 울려 주었던 가수 백년설!
백년설은 외유 내강한 굳센 성격으로 깐깐한 편이었지만 그러나 `유랑극단`, `번지없는 주막`, `고향설`, `어머님 사랑`, `나그네 설움` 등 부드럽고 정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오래도록 팬들의 가슴을 흐뭇하게 적셔 준 인정의 사나이기도 했습니다.
고향을 등지고 무작정 상경해서 증권회사에 외무사원을 했던 백년설은 그렇기 때문에 전형적인 나그네이기도 했고, 그러기때문에 그는 한층 더 실감있게 나그네 노래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영원한 나그네.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 레코드가 돼 나오자 무려 10만장이나 팔려 그 당시 태평 레코드의 특약점으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울리게 했던것도 사람은 어쩌면 모두 나그네들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35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직 불리워지고 있는백년설의 `나그네 설움`. `유랑극단` 이란 노래 한 곡을 불러 당장 스타덤에 오르고 `나그네 설움`을 불러 태평 레코드로 하여금 개벽이래 최고 경지를 맞리하게 했던 가수 백년설의 본명은 이창민!.
1914년생으로 지금 나이 57세, 경상북도 성주가 그의 고향 입니다.
꽃가지 쓸어안고 휘파람을 불며 낯설은 지붕 밑에 서서 목메인 목소리로 임을 불러 사랑을 하소하던 그 시절. 요즘은 사람의 선물이 백금이나 다이아몬드 목걸이지만 그땐 아직 옥비녀가 최고이던 시절. 경상도 산골에서 17세의 소년으로 무작정 상경한 이창민음 증권회사의 외무사원이 돼 서울 거리를 매일 헤메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술자리에서 한 곡 부른 노래가 인연이 돼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노래의 테스트를 받게 되고 거기서 호평을 받은 이창민은 서울 합창단에서 활약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천부의 소질을 타고난 목소리에 거듭 수련을 쌓은 이창민이 백년설로 이름을 바꾸고 태평 레코드에서 난생 처음 취입을 한것이 `유랑극단` 이라는 노래.
`유랑극단` 이란 이 노래 단 한곡으로 히트를 치고 백년설이 스타덤에 오르자 곧 이어서 `나그네 설움` 이라는 노래가 나오고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으로 태평 레코드가 의외의 재미를 보자 이재호 백년설의 명콤비가 생기게 되고 백년설의 인기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아 올랐습니다.
`유랑극단`, `나그네 설움`에 이어서 취입한 노래가 `두견화 사랑`, `번지없는 주막` 등 지금도 아직 우리들의 기억에 생생한 노래들 입니다. `두견화 사랑` 장안 홍등가의 인기를 몽땅 백년설에게로 쏠리게 했다는 노래 입니다.
거리를 떠도는 한낮 무명 청년으로 부터 일약 가요계의 왕자로 등장한 백년설은 태평 연주단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사업을 하기도 했고, 광산 경영으로 사업가의 수완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광산에서 나온 2000원의 배당금을 몽땅 털어서 13도 레코드 예술상을 마련해서 백난아, 남춘역 등의 가수를 탄생 시키기도 했던 백년설. 백년설은 단순한 가수로서 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욕을 가진 정열의 사나이기도 했습니다.
다방골 기생 아씨들이 옥비녀 꽂고 호박단 저고리에 양단 치마로 맵시를 내던 그 시절. 겉보기에 호화 찬란한 이 다방골 기생촌엔 때론 애절한 얘기가 숨어 있기도 했습니다.
(철수야, 너 마저 가고 나면 너희 아버지 뜻은 누가 잇는단 말이냐.
이날 이때 네 일 성취 하기만 바라고 모진 목숨 살아 왔더니 인제는 그도 저도 못하고 허사 로구나.
차라리 이 지경에 될 줄 알았더라면 남과 같이 아들 딸 낳고 따뜻한 방에서 잠이나 자고 끼니 찾아 밥이나 먹고 살것을. 나라 잃은 울분을 풀어 볼래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되는구나!
철수야 철수야!.
어머니,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나겠습니다.
철수야, 이걸 받아라. 이것은 네 어미가 세상 사람들에게 갖은 조소와 모욕을 받아가며 술장사 노릇을 해가며 가야금 열두줄에 탄식을 분단장 주름살에 눈물을 머금으며 어느때고 이럴때가 올것을 예상하고 모아뒀던 돈이란다.
어머니!.
오늘밤 떠나면 어디로 가는지 일러 주지도 않고, 또 한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다만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시면서 품고 있던 큰 뜻을 이루어보지 못하고 떠나가신 아버님을 생각하면 그저 원통하고 분해서. 어머니, 제가 남아있지 않습니까.
염려 마세요. 제 앞길은 무서운 굴욕과 고난이 놓여 있습니다만은 저는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철수야. 반석위에 떨어진 홀씨같이 혈육이라곤 너 하나 뿐이다만 이 어미는 참고 기다리마. 어머니. 철수야.)
- 백년설은 가수 보다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고, 그래서 일본 동경에 있는 스키치 소극장에 가서 연극 공부를 하기가 소원이기도 했으며, 자기가 부른 350여곡의 노래 중 태반을 자기 자신이 작사를 한 문학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광산 경영으로 단번에 2000원을 벌어서 가수 육성의 성금으로 내놨던 백년설은 1940년에 태평 레코드로 부터 오케이 레코드로 전속을 옮겼는데 입사 축하금으로 3000원, 전속료 2000원, 월급이 350원으로 엄청난 돈방석 위에 앉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의 화폐 가치는 최고급 홈스방 양복 한벌 맞추는데 40원을 했고, 커피는 한 잔에 10전, 카페에서 술을 마시고 여급에게 팁으로 1원을 주면 두고두고 고맙게 여겼던 시절이었습니다.
태평 레코드에서 오케이 레코드로 전속을 옮긴 백년설은 더욱 호화로운 생활이 계속되고 그 무렵 취입된 `고향설`, `아주까리 선창`, `일자일루`는 다시 한번 가요 팬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일자일루` 백년설의 목소리 입니다.
- 오케이 레코드에서 백년설이 계속 히트곡을 날리고 있었던 1940년 전 후, 그 무렵은 악극단의 전성시대로 국내외 뿐만 아니라 만주 중국 까지도 순회 공연을 할 때 였습니다.
백년설도 그 무렵 `화영 악극단`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만주 공인회에 나섰으며 압록강을 건너 동천, 심경, 하얼빈, 참무스, 칸도에 이르는 공연장에서 고국 산천을 그리며 향수에 젖어 울먹이는 동포를 위문하고 같이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습니다.
8·15 해방을 맞이하자 잠시 고향으로 내려가 대구 키네마 극장에서 `공화 악극단`을 만들어 해방 최초의 공연을 해 갈채를 받았으며 서라벌 레코드 회사와 센츄리 레코드 회사를 설립해서 직접 경영 하기도 했습니다.
이어서 6·25 동난이 일어나자 군위대로 전선에 참가해 국군 장병 위문에 나서서 계속 노래를 불렀던 백년설은 9·28 수복이 되자 한 때 목재상을 하기도 했고 1963년 7월엔 반평생을 보낸 정든 무대를 떠나기 위해 은퇴 공연에 마련 됐습니다.
- 여러분의 전송을 받으면서 덧없는 세월속에 노래만 남기고 이 백년설이 작별의 인사를 드립니다.
희비애로가 얽히 섥히 설기었던 정든 무대를 떠난다는 것은 천만 감회가 오고 갑니다. 하지만 오고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개탄 하면서 앞날의 여러분의 영원한 행복을 빌면서 이것으로써 작별의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 단순한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사업가로서 그리고 또 연극 지망생으로서 다양한 의욕을 가지고 활약했던 백년설!
백년설은 노래를 부르기만 하면 유행을 했고, 레코드가 나오기만 하면 히트를 했고, 어떤 노래는 장장 1년 가까운 세월을 랭킹 1위로 위력을 과시 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홍등가에서 웃음을 팔기는 하지만 오히려 님을 사모하는 정만은 순수했던 다방골 기생들의 인기를 독점했던 백년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명배우 김승호은 백년설의 은퇴 공연에서 다음과 같이 환송사를 했습니다.
- 그 분이 제가 둥그런 모자 쓰고 학교 당길 때 몹시 많이 울리던 분 입니다.
이 나무 자꾸 봐도 고향 눈이요 저 나무 자꾸 봐도 고향 눈일세. 그 `고향설` 이라는 노래는 몹시 어린 김승호를 많이 울렸습니다.
오늘 세상이 지어주신 자기 부모가 지은 이름이 아닌 세상이 지어 준 팬들이 지어 준 자기 사랑하는 스승이 지어 준 백년설이라는 석자의 예술가 이름이 마지막 가는 날, 자기의 원명 이창민으로 돌아가는 날. 오직 예술가의 자랑은 박수만이 전부 였었고 오직 재산은 여러분의 박수만이 자기의 재산이었고 자기의 생명이었고 그럴 것 입니다.
여러분!
저와 똑같이 이 나라 가요계를 위해서 예술계를 위해서 가난 속에서 설움 속에서 살아오신 백년설에게 뜨거운 박수를 같이 보냈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 소속했던 태평 레코드 회사 뿐만아니라 가요계의 황금시대를 몰고 왔던 천부의 가수 백년설은 이제 무대를 떠나고, 그가 또 하나의 재질로 가지고 있던 사업로서의 의욕을 불태우고 있지만 지금도 그가 부른 노래의 메아리는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잊혀지지 않는 백년설의 노래, 시름섞인 애틋한 목소리의 `번지없는 주막` 이었습니다.
인기 가수는 있어도 거물 가수는 없다고 오늘의 가요계를 말하고 있는 백년설은 은퇴의 공연을 하고 무대를 떠난 후 `코리아 이디아사` 라는 조그마한 수출 아이디어 개발 업체를 경영 하면서 부인 심연옥과 더불어 단란한 가정에서 살고 있습니다.
가수 은퇴를 하기 전부터 여호와의 증인의 신도가 돼 새진리에 대한 정열이 대단하고 일요일이 되면 집집으로 다니며 전도를 하기도 하는 백년설은 한 때 연예단장협회의 회장을 하기도 했으며 잘못하면 빈털털이가 되기 쉬운 가요계에서 잘하면 실업가로 전향 할수도 있다는 표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세월이 흐른 자국엔 추억이 고여있고 추억이 고여있는 거리엔 백년설의 노래가 번져있듯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백년설의 노래들. 가수는 무대를 떠났어도 백년설의 노래는 아마도 영원히 팬들의 기출억 속에서 사라 지지 않을 것이며 가요사에 빛을 더해 줄 것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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