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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서 고려 제2대왕 혜종왕릉 발굴

야촌(1) 2019. 10. 22. 23:05

北 "개성서 고려 제2대왕 혜종왕릉 발굴..묘실규모 최대“

입력 2019.10.22. 19:39

 

(서울=연합뉴스) 류미나 기자 = 북한이 최근 개성시에서 고려 2대 혜종(912∼945년)의 무덤을 발굴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2일 보도했다.

 

통신은 이날 "민족유산보호국산하 조선민족유산보존사와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의 연구사들이 송도사범대학 교원, 학생들과 함께 개성시에서 고려 2대왕 혜종의 무덤을 발굴, 고증했다"고 밝혔다. 개성 송도저수지의 북쪽 기슭 산릉선에서 발견된 무덤은 총 3개 구획으로 나뉘어 있다고 통신은 설명했다.

 

통신에 따르면 가장 윗구획에는 직경 13m, 높이 3m 규모의 봉분과 표식비가 있고, 중간 구획에는 좌우에 각각 1상의 문관상(文官像)이, 아래 구획에는 제당터가 확인됐다.

 

특히 "무덤칸(묘실) 규모는 길이 4m, 너비 3.4m, 높이 2.2m로서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왕릉들 가운데서 제일 크다"고 소개했다.

 

또 "발굴 과정에 '高麗王陵'(고려왕릉)이라고 새긴 비석과 청자 새김무늬 잔 받침대, 꽃잎무늬 막새기와 용 모양의 치미 조각들을 비롯한 유물들이 발견됐다"고 전했다.

 

통신은 북한 고고학회에서 무덤의 형식과 위치, 유물, 역사기록자료들을 심의·분석한 결과 이같이 확증했다며 "고려 초기의 왕릉을 발굴한 것은 고구려와 고려의 문화적 계승 관계를 밝히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했다.

 

 

 

 

혜종의 순릉(順陵)에서 바라다 본 제당(정자각)터와 송도저수지. 멀리 송악산 줄기가 보인다.

북한은 2019년 개성시 용흥동에 있는 ‘화곡릉’을 발굴한 후 이 무덤이 고려 2대 혜종의 순릉이라고

확정했다.

 

 

 

 

 

 

고려 제2대왕 혜종 왕무 탄생설화

 

어머니오씨는 시냇가 빨래터 설화의 시조가 된 인물이다조선세종 때에 서술된 고려사에 따르면왕건이 나주를 점령한 뒤 시냇가를 지나게 되었는데, 마침오씨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에는 무지개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우연히 보게 된 이 처자가 맘에 든 왕건은 그날 밤 그녀와 동침을 하였다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녀를 단순한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는지 아니면 수태를 시킬 것을 두려워하였는지 모르겠으나, 왕건은 깔고 누운 돗자리에 질외사정을 하였다.

 

하지만 왕건의 됨됨이를 살핀 오씨는 그가 돗자리 위에 사정한 정액을 손으로 쓸어 모아 그것을 음부에 넣었다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혜종이었다. 이는 야사가 아닌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정사인 고려사에 존재하는 기록이다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지만 혜종의 정통성을 폄하하려는 목적으로 서술된 이야기로도 추측된다

 

왕건과 오씨부인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보지 못했겠지만이러한 일화가 조선세종시대에 활동하던 학자들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저본으로 삼았던 사료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이야기가 입에서 입을 통해 주변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이야기였던 싶다.

 

혹은 왕건이나 오 씨 부인이 아 그날 밤 그리하여 혜종이 태어난 것이라며 주변에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어쨋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이 정말로 태조와 오 씨 부인이 동침했던 그날 밤에 일어났는지 아니면 일어나지 않았는지가 역사라기보다는 민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일이 회자되었다는 사실이 역사라는 점이다.

 

태몽이 용꿈이었기 때문에 물을 좋아하는 용을 성격을 참조하여 수태기를 느낀 오 씨 부인은 잠자리 곁에 한 바가지의 물을 떠 놓고 항상 손을 적신 채 잤다왕건이 돗자리에 사정한 정액을 오 씨가 그것을 음부에 도로 넣음으로써 그를 수태하였으므로혜종의 얼굴은 돗자리처럼 자글자글 하게 주름살이 져서 주름살 대왕이 그의 별칭이었다고 한다하지만 이 역시 혜종을 비하하기 위한 표현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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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대왕 혜종 왕무

 

惠宗仁德明孝宣顯義恭大王 諱武 字承乾 太祖長子 母曰莊和王后吳氏後梁乾化二年壬申生 太祖四年 立爲正胤 從討百濟 奮勇先登 功爲第一 二十六年 五月 丙午 太祖薨 奉遺命卽位 

 

혜종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은 이름이 왕무(王武)이고 자가 승건(承乾)이며태조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장화왕후오씨(莊和王后吳氏)이다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 임신년(912)에 탄생하여 태조 4(921) 정윤(正胤 : 태자)으로 책봉되고, 종군하여 후백제를 토벌할 때, 용맹을 떨치며 선봉에 섰으므로 일등공신이 되었다.

 

태조 265월 병오 일에 태조가 죽자 유명을 받들어 즉위했다.

- 고려사 혜종 총서

 

나주 출신인 장화황후오씨의 소생으로 태조 왕건의 장남이다.아버지의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울 정도로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으나외가인 나주오씨가 왕건의 다른 외가들보다 비교적 힘이 약한 집안이었다29명의 왕비들 가운데에는 신라왕족도 있었다.

 

왕건은 경순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동시에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으려 했는데, 겹사돈, 마땅한 딸이 없어 왕족으로 대신했던 것. 혜종의 권력은 그의 태생적인 한계로 인하여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는 능력 있는 인물이었지만, 뒤 배경이 약했던 사람이었다.

 

다행히 정권 초기에는 왕건의 부탁을 받은 공신 박술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박술희는 군사적인 기반은 지녔었지만, 정치적으로 실세를 쥐고 있던 정치인은 아니었다

 

박술희는 드라마 태조 왕건에 등장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왕건의 친위무장정도 되는 지위를 가졌던 인물이었다.

결국 왕건의 후견인 선정이 완벽하지 못했던 셈으로결국 박술희는 혜종의 적으로부터 왕을 지켜내지 못했고왕이 귀양 가던 도중 자신도 왕규(혹은 정종)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여러모로 아버지인 왕건의 예리하지 못한 판단으로 인하여 크고 작은 피해를 겪은 인물이다상기했듯 호족세력이 강했던 시기에서 왕무의 외가의 실세가 강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그를 위해 적절한 후견인을 지정해주지 못했다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세력이나 개경 및 황주 호족들혹은 경주의 구 신라 왕가 세력 등. 마음만 먹으면 쟁쟁한 후견인을 얼마든지 설정해 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박술희 한 명만 달랑 그에게 붙여줬을 뿐이었다.

 

정작 제대로 후견인을 둔 고려왕조의 왕은 정종이었다.

왕건은 그의 둘째 아들 정종을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둘째 딸과 결혼시켰다

따라서 왕건이 혜종을 정말로 후계자로 여겼는지 의문스럽다.

 

혜종의 부인 임씨(의화왕후)도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이자 진주(晉州) 출신으로 나쁜 가문은 아니었지만 실세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단한 무골이었는지 자신을 살해하려고 잠입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기도 했고 젊었을 시절에는 왕건을 따라 여러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이는 조선 정종과 닮은 점이기도 하다

본인의 성품은 인자하고 부드러웠으며 지혜로웠다고 하지만 암살 시도 후 불안감이 절정에 달해 조울증 증세도 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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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제2대 왕 혜종 왕무

   무덤과 피 휘, 불천지주의 위세

 

개성에 있는 혜종의 순릉(順陵).

2009년의 모습으로 봉분도 깎여버렸고 석물까지 많이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고종 때 거란이 개경인근까지 침입했는데, 이 때 순릉이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재위 내내 불안한 왕위를 누렸고 묘호도 썩 좋지 않은 ''를 받은 혜종이지만

사후 왕위 계승이 몇 번 더 격변을 거치면서 처지가 달라지게, 된다

 

바로 정종, 광종과 성종의 후계가 모두 끊기면서 왕위가 현종으로 넘어간 것

이후 고려왕계는 현종의 후손들이 잇게 되는데혜종은 태조의 맏이즉 현종의 큰 아버지 뻘로 취급되면서 무신정변까지는 혜종이 종묘의 불천지주에 있게 되었다

 

조선으로 치면, 현종이 세종대왕이라면 혜종은 태종의 위치에 있게 된 셈

혜종 오오 현종의 친아버지 왕욱(王郁)은 안종으로 추숭되었으나주요한 신주에 오르지 못했다

 

그보다는 성종의 아버지 왕욱(王旭)이 대종으로 추숭되어 신주에 올랐다.

이 대종의 문제로 덕종 사후 정종(靖宗) 때 한국 역사상 첫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이 직계 보는 고려문종, 고려숙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혜종의 휘인 무() 역시 고려 내내 피 휘 되어

모든 무라는 글자는 범 호()로 대체되게 되었다.

 

민폐 왕 즉, 고려시대에 무신은 호신이라고 불렀다

호신정변, 호신정권 이런 면에서 혜종은 그 재위는 안 습했으나 훗날 태조의 첫 계승자로서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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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제2대왕 혜종[왕무] 사망원인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小常侍側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 고려사혜종 2년의 기사

 

조선의 정종과 비슷한 예다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는 늘 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두해만에 사망했다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그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자객은 왕의 침실에 구멍을 내어 침입하였고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려쳐 기절시켰다. 자객은 혜종이 덮고 있던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앞서 피해있었는데목표를 상실하여 당황해하던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들고 혜종을 시해하려했으나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며 맨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가격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은 것이다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은 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묻어 두었는데이는 그의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시해당할 뻔 했는데, 이를 그냥 넘기는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는 즉, 조사를 시작하면 시해를 노렸던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이를 알고 있던 혜종은 호족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셈이다. 결국 그에 대한 암살시도가 두번에 걸쳐 행해지자극히 불안해진 혜종은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는데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또한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도 혜종이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된다

 

나주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전 집안이 몰살되는 끔찍한 일은 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나주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약하였고선해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공신이자 외척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동생들의 권력다툼을 외면하고 방치 한 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두 번에 걸쳐 암살될 번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죽음을 암살로 여기기도 한다. 사후 왕위는 이복아우 정종과 광종에게 각각 돌아갔다.

 

그의 아들 흥화군은 광종 연간에 죽었고 딸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후궁이 되었다하지만 다른 후손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군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이 없는 관계로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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