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진사시(進士試)

사마방목(司馬榜目)

야촌(1) 2019. 5. 12. 08:21

사마방목(司馬榜目)

 

한 번 동기는 영원한 동기

 

《사마방목(司馬榜目)》은 관직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인 사마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사마시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며 합격한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 가는 벗이므로
합격자에게는 사마방목이 꼭 필요했다. 사마방목은 일종의 동기수첩이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희귀본《사마방목》/1570년 庚午(선조 3)

 

사마시란 무엇인가


조선시대 과거 시험은 세 종류이다. 행정직 공무원을 뽑는 문과(文科), 군대의 장교를 뽑는 무과(武科), 기술직 공무원을 뽑는 잡과(雜果)이다. 가장 선호하는 것은 역시 문과인데,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士)라는 자격을 획득해야 한다.

 

생원이 되려면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달달 외워야 하고, 진사가 되려면 시부(詩賦)를 잘 지어야 한다. 암송에 자신이 있으면 생원을, 글짓기에 자신이 있으면 진사를 노려볼 만하다.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이 바로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이며, 이 둘을 합쳐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 한다. 소과는 문과의 예비 시험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이름이고 사마시는 중국 주(周)나라 제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사마(司馬)는 주나라의 관직명이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업무를 맡았기에 당시의 국립대학 태학(太學)에서는 우수한 선비들을 사마에게 추천하였다. 이렇게 추천된 선비들을 ‘진사’ 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진사와는 명칭만 같을 뿐 성격이 다르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을 사마시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마시(司馬試)는 생원시와 진사시로 나누어 시행하며, 두 차례 시험을 치른다.

 

1차 시험 초시(初試)는 각 지방에서, 2차 시험 복시(覆試)는 서울에서 치른다. 1차 시험에서 각 7백 명을 뽑고, 2차 시험에서 각 1백 명을 뽑는다. 1차 시험 합격자의 인원수는 도별로 정해져있다. 일종의 지역 할당제이다. 2차에서는 지역 할당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2차 시험을 통과하면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이 합격자 명단을 《사마방목(司馬榜目)》이라고 한다.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총 230회의 사마시가 치러졌으니 《사마방목》 역시 230번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가운데 180여 회의 《사마방목》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사마방목 표지를 넘기면 시험관들의 관직과 성명이 기재된 은문이 나온다.

 

사마방목의 구성과 내용


사마시 응시자들은 대궐 또는 시험장에 최종 합격자를 공고하는 방(榜)을 보고 합격 여부를 알게 된다. 출방(出榜)이라고 한다. 방노(榜奴)라는 노비가 합격자의 집으로 찾아가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이후 대궐에서 정식으로 합격증을 나누어준다. 방방(放榜)이라고 한다. 사마시의 경우 흰 종이에 써서 발급한다.

 

이를 백패(白牌)라고 한다. 합격자들은 다시 대궐에 가서 국왕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사은(謝恩)을 한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참배하러 가는 알성(謁聖)의 절차가 이어진다. 광대를 앞세우고 음악을 연주하며 합격을 자랑하는 유가(遊街)라는 시가행진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모든 절차가 끝나면 합격자들은 비로소 총무에 해당하는 색장(色掌)을 뽑아 사마방목의 간행에 착수한다. 간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합격자들이 분담한다. 사마시 합격은 가문의 영광이며 합격한 사람들은 평생을 함께 가는 벗이므로 합격자에게는 사마방목이 꼭 필요했다.

 

사마방목은 일종의 동기수첩이었다.

오래된 방목은 희귀하다. 1513년 중종8 사마시 합격자 명단인 《정덕계유사마방목(正德癸酉司馬榜)》은 보물 제5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은 다수의 사마방목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만력원년계유이월이십사일사마방목(萬曆元年癸酉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이하 《만력계유사마방목》을 살펴본다. 1573년선조 6년에 시행된 사마시의 합격자 명단이다.


표지를 넘기면 ‘은문(恩門)’ 이라는 제목 아래 시험관들의 관직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합격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고마운 분들이라는 뜻이다. 그 해, 사마시는 한성부와 성균관 두 곳에서 나누어 치렀는데, 오늘날 법무장광 격인 형조판서 윤세장(尹世章)과 서울시장 격인 한성부 판윤 오상(吳祥) 이하 각 6명의 시험관이 감독과 채점을 맡았다.

 

 

 

《만력계유사마방목(萬曆癸酉司馬榜目)》에는 생원 100명과 진사 100명, 총 200명의 인적사항이 실려 있다.

 

이어서 합격자 명단이 성적순으로 실려 있다. 합격자마다 신분과 성 명, 자字 , 생년, 본관, 거주지, 부친의 관직과 성명을 기록했다. 부모의 생존 여부도 명시했다. 둘 다 생존해 있으면 ‘구경하(具慶下) ’, 부친만 있으면 ‘엄시하(嚴侍下) ’, 모친만 있으면 ‘자시하(慈侍下) ’, 둘 다 없으면 ‘영감하(永感下) ’라고 한다.

 

형제의 이름도 적는다. 방목에 따라서는 말미에 시험 장소 및 시험 문제 따위가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자세히 실려 있는 방목은 역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사마시는 관직으로 가는 첫 번째 관문에 불과하다.

 

그 다음 단계의 시험인 문과에 합격해야 비로소 관직에 오를 수 있다. 그렇지만 사마시 합격만으로도 지역 사회에서 행세하기는 충분했다. 애초에 이를 목적으로 응시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 때문인지 문과 급제보다 사마시 합격을 더 기뻐했고, 문과 동기들보다 사마시 동기들과의 유대가 더욱 긴밀했다.



《만력계유사마방목》에는 생원 100명과 진사 100명, 총 200명의 인적 사항이 실려 있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중복 합격한 사람이 13명이므로 실제 총 합격자는 187명이다. 합격자의 신분은 대부분 유학(幼學) 이다. 사대부 집안 출신이라는 뜻이다. 간혹 유학이 아닌 사람도 섞여 있다.

 

예컨대 진사시에 88등으로 합격한 문언(文偃)의 신분은 공생(貢生), 즉 아전이다. 신분 때문인지 문과에 낙방한 탓인지, 그는 진사의 직함을 얻고서도 글방 선생을 전전했다.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어린 시절 그에게 글을 배웠다. 생원시에 38등으로 합격한 한우신(韓禹臣)의 신분은 관군(館軍) 이다.



관군은 역참 소속의 아전이다. 이 때문에 한우신은 문과에 급제하고도 지방 직을 전전했다. 그가 모처럼 성균관에 임명되자 유생들이 신분을 문제 삼아 절을 올리지 않기로 작당했다. 아마 두 사람은 동기모임도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대부 신분이 아니라도 과거에 응시할 수는 있지만,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동기들의 운명

조선시대 사마시 동기들은 장원을 중심으로 결속을 다졌다. 장원은 대단한 영예였다. 윤국형(尹國馨)의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따르면 합격자들은 장원을 지극정성으로 공경하여 만나면 절해야 했고, 나란히 걷거나 앉지도 못했다. 말을 타고 가다가도 장원을 보면 말에서 내렸고, 감히 이름을 부르지도 못해 ‘장원’ 이라고만 불렀다.



합격자 발표 후 합격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도 장원의 집이다. 합격자들은 장원을 모시고 대궐에 가서 국왕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에 참배한다. 1573년 생원시 장원은 경북 의성에 사는 26세의 이산악(李山岳) 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 유감스럽게도 이산악은 다음 단계인 문과에 급제하지 못했다. 응시했지만 낙방했는지, 아예 응시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진사시 장원은 전북 부안에 사는 33세의 김횡(金鋐)이다. 생원시에도 2등으로 합격하였다.

 

생원시와 진사시를 모두 우등으로 합격한 수재였지만, 역시 문과 급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사마시에 장원한다고 반드시 출세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과거 시험의 채점은 답안지의 이름을 가린 채로 진행한다. 그런데 장원을 결정할 때는 시험관이 슬쩍 들춰보고 집안이 좋은 사람을 뽑곤 했다. 이것이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1573년 사마시 장원은 모두 썩 대단한 집안 출신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이것이 오히려 이 시험의 공정성을 입증한다.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한 동기 187명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들의 생애를 추적해보면,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58명이다. 어렵게 사마시에 합격했는데도 그 다음 단계를 통과한 사람은 삼분의 일도 못되었던 것이다.


동기들의 생애는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은 윤승훈(尹承勳이다. 진사 100명 중 39등으로 합격했으니 그리 높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영의정까지 올랐다. 생원 64등 이광정(李光庭)은 판서를 지냈고, 생원 84등 홍이상(洪履祥) 은 참판을 지냈다.

 

제법 높은 관직에 오른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마시 합격 등수는 출세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흥미롭게도 훗날 고위 관료로 출세한 사람들의 사마시 합격 등수는 대체로 낮은 편이다. 불행한 최후를 맞은 동기들도 있다.

 

진사 53등으로 합격한 김직재(金直哉)는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당했고, 진사 95등으로 합격한 윤삼빙(尹三聘)은 무고죄의 책임을 물어 처형당했다. 동기들의 수치였을 것이다. 출세한 동기도 있고 몰락한 동기도 있었지만, 1573년 사마시 동기들은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갔다.

 

이들이 합격한 지 19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장년의 나이에 전쟁을 맞닥뜨린 이들은 상당수가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일부는 전사했다. 그들은 국가가 부여한 영광스러운 자격에 걸 맞는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전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02년(선조 35), 합격자 중 한 사람이었던 홍이상(洪履祥)이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동기 이시언(李時彦)을 만났다.

 

마침 이시언은 경주부윤으로 재직 중이었다. 당시 동기 중에 영남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8~9명, 영남에 사는 사람이 8~9명이었다. 두 사람은 오랜만에 동기 모임을 열기로 했다. 당시 경상 감사 이시발(李時發)은 동기 이대건(李大建)의 아들이었다. 그가 모임을 주선하자 동기들이 안동으로 모였다. 멀리 호남에서 소문을 듣고 온 사람도 있었다. 이 날 모임에 참석한 동기는 총 14명이었다.

 

이 광경을 묘사한 그림이 일본 데라우치 문고(寺內文庫0에 소장되어 있다가 경남대 박물관에 기증된《계유사마동방계회도(癸酉司馬同榜契會圖0》이다. 1614년에도 한 차례 모임을 가진 사실이 확인된다. 1573년 사마시 합격자들의 모임은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어졌던 것이다.

 

 

↑사마시 합격동기 모임을 그린 《계유사마동방계회도》

 

기수 문화의 명암

 

동기가 있으면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기 마련이다. 동기의 존재는 곧 ‘기수’ 의 존재를 의미한다. 기수별로 뭉치는 이른바 ‘기수 문화’는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법조계의 기수 문화는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평범한 사람들도 기수 문화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학교에서도 군대에서도 직장에서도 기수를 중요시한다.

 

기수 문화가 지배하는 조직은 일사불란하다. 신속하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직의 결속력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수 문화는 사회 병폐로 지목되고 있다. 기수 문화는 서열을 강조하며, 서열을 강조하는 조직은 상명하복을 요구한다.

 

이러한 조직에서는 자유로운 의견 개진도 불가능하고 원활한 상호 소통도 기대하기 어렵다. 기수 문화가 지배하는 조직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다. 조선시대 과거합격자들은 기수로 서열을 따지는 개념이 없었다. 선배가 후배를 괴롭히는 일이 없지 않았지만, 첫 임관 때뿐이었다.

 

능력만 있으면 후배가 선배보다 먼저 승진하는 것이 당연했고, 선배가 잘못을 저지르면 후배가 거리낌 없이 문제 삼았다. 선후배의 서열이 없어도 동기간의 유대는 평생 지속되었다. 사마방목은 기수 문화가 무너져가는 오늘날, 우리사회에 바람직한 조직문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글.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을 거쳐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쓰레기 고서들의 반란》, 《일일공부》, 번역서로 《현고기》, 《동국세시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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