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시사 · 시론.

미국에서 날아온 메일

야촌(1) 2012. 10. 25. 16:28

미국에서 날아온 메일

 

  내가 미국에 와서 한 20여 년 살면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오직 언어장벽입니다. 만약 의사소통만 매끄럽다면, 또한 정직하고 성실하다면 대통령자리 말고는 다 할 수 있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능력만 있으면 되고, 인종차별이란 말은 한낱 핑계일 뿐입니다.

 

   내 나이 50이 다 되어 이곳에 온 것은 돈도 아니고 출세도 아닙니다. 다만 아이들이 이곳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사방이 시원하고 넉넉합니다. 이따금 한국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이 솟구칩니다. 너무 많은 인구, 생사를 가르는 투쟁, 부정부패, 무질서, 허위, 가면......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도망쳤습니다.

 

  한국이 싫어서가 아니고 내가 그곳에서 살아남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 세대가 되면 더욱 치열해질 것이고....나는 김 선생의 메일을 읽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김 선생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할 만한 논리가 발견되지 않았다. 김 선생은 한국에서 적응하려면 남들처럼 부조리한 행위를 저질러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기 때문에 도피행각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치세(治世)에는 정직한 사람이 출세하지만 난세(亂世)에는 부정직한 사람이 출세하기 마련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굴원이 지었다는 <어부사>(漁父詞)가 떠올랐다.

 “선생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어쩌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온 세상이 다 혼탁한데 나 홀로 깨끗하고 다 취해 있는데 나만이 깨어 있으니 그런 까닭으로 쫓겨나게 되었소.”

“성인은 세상만물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따라 변하여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탁하면 왜 진흙탕을 휘저어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십니까? 사람들이 모두 취해 있다면 어째서 술찌개미와 박주를 마시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혼자만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처신하여 스스로 쫓겨나고 마십니까?”

 

“내가 듣건데 새로 머리를 감는 사람은 반드시 관을 털어서 쓰고 새로 목욕한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고 합디다. 어찌 결백한 몸으로 더러운 것을 받아드릴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湘江)에 가서 빠져죽어 물고기 배 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 결백한 몸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쓸 수 있겠소?”

(‘어부사’는 ‘어보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음.)

 

   만일 어부의 말이 옳다면 굴원은 남들이 하는 대로 부정부패 행위도 하고 정치야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백성들이야 어떻게 되거나 말거나 그럭저럭 안일무사하게 지내면서 강한 자에게 아부하고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할 수 없어서 저항하다가 보니 추방을 당하고 종당엔 멱라수에 빠져 죽고만 것이다. 그때 굴원은 어디론가 망명하여 살 수는 없었는지 모를 일이다. 미국에 있는 김 선생은 굴원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넓었던 것 같다. 

 

미국은 한국에 비하여 선진국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강대한 나라이고 세계 도처에서 미국으로 이민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이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나라이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한국인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가고 싶을 정도이니 김 선생의 이민을 나무랄 수 없는 일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미국이라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한국보다는 보기 싫은 꼴을 덜 보게 될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는 옷을 주워 입고 거리로 나갔다. 은행도 들르고 노인회관 사랑방에도 들르고 바람도 쏘이고 싶었다. 횡단보도에 나가니 또 버스가 신호를 어기고 승용차가 정지선을 넘어 들어와 있었다. 그러면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면서 짜증을 내 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자칫하면 봉변을 당할 수도 있으니 무사히 넘긴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미국의 김 선생이 보낸 메일이 떠올랐다.

‘그래, 김 선생은 미국으로 잘 갔어. 나도 가고 싶어. 진작 서둘러 보았어야 했어. 지금은 늦었단 말이야. 에이 더러운 놈들! 

 

이게 모두 정치하는 놈들 때문이야. 정치한다는 놈들이 제일 나쁜 놈들이야. 법을 제일 잘 어기고 거짓말을 제일 잘 하는 놈들이거든. 당장 내일이면 모두 들통 날 일도 모두 잡아떼고 본단 말야. 더러운 놈들. 그 놈들 보고 국민들이 다 배운단 말야.’

 

  나는 김 선생이 부러워지기도 하였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 청파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라는 시조가 떠오른다. 그렇다고 정말 조국을 등지고 침을 뱉으며 타국으로 떠날 수 있을까?......그것은.....

 

지교헌 / ‘그들의 인생철학’중에서(발췌)

 

지교헌(池敎憲. 필명>池大庸)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문학석사 및 철학박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명예교수

◇한국 문 협, 국제PEN클럽한국본부 회원

◇<동양철학과 한국사상> 민속원(1995) 외 논저 다수

◇<월간수필문학> 및 <창조문학> 수필등단(1994)

◇<지구문학> 소설등단(2003)

◇장편연작소설 <맹교수의 사랑방 이야기> 한 누리미디어(2009)

◇장편소설 <질풍 속에 피는 꽃> 한 누리미디어(2010)

◇동촌 지교헌 수필집7 <그들의 인생철학> 한 누리미디어(2012) 외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