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왕자의 난

야촌(1) 2019. 2. 14. 00:37

■ 왕자(王子)의 난(亂)

 

●제1차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태조 7)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 간의 싸움으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재위 1392~1398). )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 반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이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그밖에 이방석「李芳碩,1382(우왕 8)∼1398(태조 7)」 의 난, 혹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린다.

 

즉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복형제(異腹兄弟)간의 싸움이고,
제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同腹兄弟)간의 싸움이다.


 1.원인
  왕자의 난의 원인은 크게 세자 책봉 문제와 요동 정벌 준비에 따른 오해에서 비롯했다.


2.세자 책봉 문제

   태조에겐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맞이한 두 명의 정처(正妻)가 있었는데, 한 명은 그가 무명 장수 시절에 고향에서

   맞이한(韓)씨이며 다른 한 명은 군공으로 입신양명한 그가 개경에서 맞이한 강(姜)씨이다. 

 

   태조는 고려조 왕비를 배출하는 최고 명문 가문이자 당대 제일 권문세가의 딸이었던 강 씨의 집안 배경 및 강 씨의

   두인맥과 지모의 도움으로 개국 왕(開國王)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이에 태조는 왕으로 등극한 직후, 강 씨를 왕비로 책봉하여 정비(正妃)로 삼았으며 그녀의 소생인 어린 두 왕자중

   에서 세자를 간택하여 막내인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한 씨가 추존 왕비가 된 것은 그로 1년 후의 일로, 비

   록 한 씨가 먼저 태조에게 출가하긴 하였으나 서열상 한 씨는 차비(次妃)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태조 5년(1396년), 현비 강씨가 병으로 서거하자 태조는 강 씨를 추모하기 위해 왕후(王后)로 추봉 하는

   데, 이로 인해 한 씨는 후궁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한 씨소생의 왕자들이 더 이상 분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절비(節妃) 한 씨 소생으로 1남 방우(芳雨), 2남 방과(芳果), 3남 방의(芳毅), 4남 방간(芳幹), 5남 방원(芳遠), 6

   남 방연(芳衍)이 있었는데, 특히 5남 이방원은 부왕(父王)의 창업을 도와 공로가 크고 또한 자질(資質)이 영매

   (英邁 : 성질이 영리하고 비범하다.)한 인물이라 부왕의 처우에 대한 불평이 대단하였다. 

 

   또한 개국공신으로서 왕세자 이방석의 보도(輔導)를 책임지고 있는 정도전(鄭道傳) 이하 남은(南誾)·심효생(沈

   孝生) 등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대단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3.요동 정벌(遼東征伐) 준비
  뒤이어 신덕왕후 강 씨의 오랜 측신 이었던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려고 군사를 모으자 이방원은 정도전이

  자신치려고 군사를 모으는 것으로 해석한다.

 

4.경과
  한양 신도(漢陽新都)의 공역(工役)이 완료된 지 2년 후인 1398년(태조 7) 음력 8월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비

  밀리에 의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등이 한 씨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으로 해석하여,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을 세워 10

   월 5일(음력 8월 25일) 이방의, 이방간 등 여러 왕자들을 포섭하고 이숙번(李叔蕃), 민무구(閔無咎), 민무질(閔

   無疾), 조준(趙浚), 하륜(河崙), 박포(朴苞), 이지란 (李之蘭) 등 휘하 부하들을 시켜 군사를 일으켰다.

 

   그 뒤 남은의 집으로 쳐들어가 정도전과 남은을 죽이고, 같은 시각에 박위(朴葳), 유만수(柳曼殊), 장지화(張至

   和), 이근(李懃), 심효생(沈孝生)을 살해하였고 그리고 변란의 책임을 세자와 정도전 일파에게 돌림으로써 숙원

   을 풀었다. 

 

  또한, 세자 이방석(李芳碩)은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이방석의 동복형 이방번(李旁蕃)도 함께

  죽여 버다. 이 변란으로 세자 이방석이 폐위되니 다음 세자로 이방원을 만들게 된 것은 정세의 당연한 귀추였

 다.

5.결과
  이방원은 장자승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며 세자 자리를 굳이 사양하고 둘

  째형인 이방과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는 큰형인 진안대군이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위에는 야심이 없고 무능력한 형 이방과에게 차기제왕의 자리를 양보함으로써 아비를 치고 아우들을 살

 해 한동자로써의 책임을 떠맡김과 동시에 훗날을 기약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태조는 왕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그리고 사위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본관은 星州)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한
뒤인 9월에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주니 그가 곧 정종이다. 이로부터 태조는 상왕(上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즉시 생모 절비(節妃) 한 씨를 신의왕후로 추존하여 신덕왕후 강 씨와 동급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치고 정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종은 신의왕후를 수비(首妃=원비)로 교체하여 신덕왕

후보다 윗 서열로 만들었으며, 이로도 성이 차지 않아 신의왕후를 왕후보다 상급인 왕태후로 격상하였다가, 신덕

왕후를 다시 현비로 조정하여 후궁으로 격을 낮추고 신덕왕후의 소생들을 서자로 격하시킨다.

 

먼 훗날인 현종 때 신덕왕후의 신주가 비로소 태묘(太廟=종묘)로 옮겨지고 다시 왕후의 예우가 올려 지지만, 현종

또한 신의왕후의 혈손이기에 신덕왕후를 신의왕후보다 격을 낮추어 신덕왕후 강 씨가 태조의 첩으로 출가하였다

가 신의왕후의 사후에 비로소 처로 승격하여 왕비가 된 계비로 조정하였다.정종 2년(1400년)에는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6.의의
  이 난을 정치적으로 보면 당시 권세를 한손에 쥐고 있던 정도전 일파를 고려조의 신하들을 중심으로 한 방원 일파

  가 타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이지만, 좀 더 협의(狹義)로 볼 때에는 이복형제간의 왕위 쟁탈을 위한 골육상쟁

  의 현상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

  제2차 왕자의 난은 1400년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이방간이 세자 자리를 두고 싸운 것으로 제1차 왕자의 난

  과 구별하기 위해 제2차 왕자의 난 또는 제2왕자의 난, 방간의 난, 박포의 난 등으로 불린다.


1.원인
  제1차 왕자의 난이 이복(異腹) 형제간의 싸움인 데 대하여 이는 동복(同腹) 형제간의 싸움이며, 방간의 방원에 대

  한 시심(猜疑心=남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마음) 때문에 일어난 싸움이다.


2.배경
  태조 이성계가 제1차 왕자의 난의 충격으로 왕위를 정종에게 내주고 떠난 뒤 정종은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

  다. 태조의 4남이자 이방원의 형 이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豪氣)가 있었으나,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못하여 항상 시기하며 의심하고, 불안한 가운데 있었다.


 한편 지중추(知中樞)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

 와 난을 공적으로 수습하는 데 공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작(賞爵)이 높지 못한 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이방간이 왕위를 넘보기 시작했고, 뒤이어 박포까지 돕기로 하자 이방간은 군사를 일으켰다.


3.경과
  이방원도 따라 동원하여 개경 선죽교에서 두 병력이 대치하여 전투를 시작했다. 방간의 군대는 사조지에 군사를

  멈추보졸 40명은 마정동 안에, 기병 20명은 전목 동구에서 나와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방원의 휘하 목인

  해(睦仁海)가 얼굴에 활을 맞고 김법생(金法生)이 활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방원은 하륜을 시켜 교서를 지은 뒤 군전에 가게 해 상당 후 이저(上黨侯 李佇)와 이화(李華), 이맹종(李孟宗

  =이방간(李芳幹)의 아들) 등 방원 휘하의 군사들이 모두 투입되어 방간의 조카 이성기(李成奇)가 이숙번(李叔蕃)의 활에 맞아

 죽고 서익(徐益), 마천목(馬天牧), 이유(李柔) 등도 선봉에 서서 방간의 군사를 추격해 승패는 결정되었다.


전국(戰局)은 방간의 군대에게 불리하여 패주하게 되니, 이방원의 병력은 이방간의 병력을 무찔렀으며 이방간은 묘련 북동으로 달아나다가 탄현문 근처에서 소근(小斤), 고신부(高臣傅) 이광득(李光得), 권희달(權希達)에게 추격당해 붙들리고 만다.


거병 작란(擧兵作亂)하여 동기(同氣)를 모해했다는 죄명으로 이방간은 토산(兎山=황해도금천 지역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고 박포는 죽주(지금의 충청북도, 영동)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다.


4.결과
  이 전투의 승리로 이방원은 기반을 더욱 단단히 다졌으며, 아울러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

  왔다. 결국 정종은 하륜(河崙) 등의 주청으로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그해(1400년) 음력 2월 이방원을 왕세자

  로 삼은 뒤 같해 음력 11월에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그가 바로 제3대 태종(太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