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미소라 히바리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youtu.be>
미소라 히바리(일본어: 美空 ひばり (みそらひばり),
[생졸년]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향년 52세
그녀의 아버지가 대동아 전쟁 때 징용으로 끌려간 한국인입니다.
일본의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이자 여배우로, 가나가와 현 요코하마 시 이소고 구에서 태어났다. 세이카 학원(精華?園) 고등부를 졸업했으며, 본명은 가토 가즈에(일본어: 加藤 和枝 (かとう かずえ))다. 사후에 일본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노래 : 항구의 13번지 – 미소라 히바리
나가이 타비지노 코~카이 오예테
오래 여정의 항해가 끝나
후네가 미나토니 토마루 요루
배가 항구에 정박하는 밤
우미노 쿠로~오 구라스노 사케니
바다에서 고생을 술잔에 담아
민나 와스레루 마도로스 사카바
모두 잊어버리는 뱃사람들의 술집
아~미나토마찌 쥬~삼 반치
아~ 항구 도시의 1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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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
1949년 7월에 《갓파 부기우기(河童ブギウギ)》를 통해 가수로 데뷔하고 1960년에 《애수 부두(哀愁波止場)》로 일본 레코드대상 가창상을 수상했다. 1962년에 당시 인기 영화 배우였던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 만인 1964년에 이혼하게 된다.
이혼 직후인 1964년 12월에 텔레비전 드라마 《야와라》(柔)의 주제가로 사용된 동명의 곡을 발표해 크게 인기를 얻어 180만 매의 음반을 판매하고, 일본 레코드대상을 수상한다.
곧이어 발표한 1966년의《가나시이사케(悲しい酒)》는 145만 매,1967년의《맛카나타이요(?赤な太陽)》는 140만 매를 판매해 크게 인기를 끌었다.
□ 후기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친어머니였던 가토 기미에(加藤喜美枝)가 사망하고 곧이어 친동생과 친우마저 차례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인기 또한 전성기와는 다르게 눈에 띄게 떨어져 술과 담배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아졌고, 몸은 나빠지기 시작했다.
1987년 4월 22일에 후쿠오카 제생회 병원에 급하게 입원, “만성 간염 및 양측 대퇴골 골두 괴사”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재기 불가능”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수 개월간 요양한 뒤 8월 3일에 퇴원하고, 10월에 신곡 《미다레가미(みだれ?)》를 레코딩 해 복귀한다.
1988년 4월 11일에는 도쿄 돔에서 5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복귀 콘서트 《불사조 ~ 날아라 새로운 하늘을 향해》를 가져 완전 복귀를 선언한다. 하지만 이미 상한 몸으로 인해, 전국 공연을 가지던 도중에도 수차례 극비 입원 하는 등 위험한 징조는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쇼와 천황이 죽으면서 연호가 헤이세이로 바뀐 1989년 1월 11일에는 인생이라고도 할 수 있는《가와노나가레노요니(川の流れのように)》을 발표한다. 곧 전국 투어 콘서트를 시작하지만, 다시 입원과 일시퇴원을 반복했다.
결국 3월 21일에 자택에서 닛폰 방송에서의 라디오 특집 생방송 《미소라 히바리, 감동의 이 한 곡》을 방송하고 난 뒤 급격히 악화되어 준텐도 병원(順天堂病院)에 입원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이 후 예정되었던 콘서트나 전국투어도 모두 중지되었다.
1989년 6월 13일에 결국 의식불명으로 인공호흡을 시작했고, 6월 24일에 간질성 폐렴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사망했다.
□ 사후
1989년 7월 4일에 일본 여성 최초로 일본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이 후 7월 22일에 거행된 장례식은 각 방송사에서 생중계를 했고 팬들을 포함해서 4만 2천여명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요코하마 시 고난 구(港南?)에 안장되었다.
이 후에도 수년간 가요제의 특별상 등을 여러차례 수상하였다. 1993년에 교토 시에 “미소라 히바리관”이 개관하였으나, 이용자 수의 감소로 2006년 11월 30일에 폐관되었다. 폐관된 히바리관은 히바리 프로덕션에서 18억 엔에 매입하여, 2008년 봄에 다시 오픈한다고 발표되었다.
2005년에 공개된 영화 《오페레타 너구리 저택》에서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복원되어 출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상영회 등이 각지에서 주기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최후의 곡인 《흐르는 강물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미소라 히바리는 생애를 마감하는 순간까지 갈망했던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의 공연이었다. “아버지의 고향이 한국이라는 것은 그녀 자신도 생전에 인정한 것입니다”
미소라의 어머니와 25년간 이웃처럼 지낸 스즈키(鈴木正文)씨의 말이다. 그러면서 스즈키는 “미소라씨의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한다는 꿈을 오래 동안 간직하며 실현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었으니…”라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1987년 8월 스즈키 씨의 노력으로 한국의 세종문화회관에서 「미소하 히바리 한국 콘서트」를 가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1988년 올림픽 전야제인 ‘제1회 국제 아시아 가요제전’에 일본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미소라는 기쁨에 찬 얼굴로 “무엇이 있든지 꼭 한국에서 노래 부르고 말겠어요.”라며 3~4곡의 노래를 한국어로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꿈을 이뤄내지 못한다. 1988년 4월 갑자기 찾아온 병마에 발목을 잡혀 후쿠오카에 긴급 입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사조처럼 몇 번 병원 문을 나서기도 했지만 곧 재입원하다 마침내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었는데…”라는 염원을 스즈키에게 전화로 전하면서.....
활짝 웃으며 사람들에게 행복과 편안함을 전해주던 그녀의 이면에는 아버지의 고향에서의 공연에 대한 동경이 절절히 배어있었다.(월간 아리랑 1996년 1월호)
일본의 대표적 인명사전을 한번 찾아보기로 한다.
그녀는 1937년 5월 29일 요코하마(橫浜) 인근, 요코스카(橫須賀) 시 이소고구(磯子區) 다키토오(瀧頭) 2정목(丁目)에서 생선장수로 지내던 가토 마스키치(加藤增吉)와 스와 기미에(諏訪喜美枝)의 첫 딸로 태어났다. 지붕 없는 시장의 가게, ‘어증(魚增)’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1936년 결혼, 이듬해 그녀를 낳은 것이다. 아버지 26세, 어머니 24세였다.
여기서 아버지 가토가 한국계라는 것이다. 가토는 어떻게 여기까지 건너와서 일본 여인과 결혼, 생업을 꾸리게 되었을까?
미소라 히바리가 태어난 이듬해인 1938년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이란 정책을 발표, 전시체제로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시에 태어난 것이다. 아마 무척 곤궁한 유아 시절을 지냈을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1년 후인 1938년 9월 19일에는 이복 여동생(勢津子)이 태어나고 있다.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녀의 본명은 가토 히바리(加藤和枝)였다. 소화(昭和)시대의 화(和)와 어머니의 이름(喜美枝)에서 지(枝)를 따서 히바리(和枝)라 했다고 한다.
어린 그녀는 1945년 이후 폐허가 된 일본 땅에 혜성같이 나타난 천재 소녀 가수였다. 그녀는 10세가 넘어 가던 1947년 10월에 인기를 끌면서 예명으로 미소라 히바리(美空和枝)라는 이름을 얻었다. 보통 히바리는 히라가나로 써서 ‘미소라 히바리(美空 ひばり)’라 했다.
그녀는 1947년 요코하마 시 사쿠라기(櫻木)에서 열린 「시민노래자랑대회」에 출전, 소위 엔카(演歌) 작곡가인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1978)의 작품인 「슬픈 죽피리(悲しき竹笛)」를 불러 절찬을 받았다.
고가 마사오는 서울 명동에서 태어나 명동에 있던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조선의 노래를 잘 알고, 전전·전후시기 일본에 그 음악을 도입한 것으로 유명했다. 1936년에는 선린상업학교 응원가를 작곡, 발표 차 모교에 온 적이 있었다.
어린 미소라 히바리는 고가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그밖에도 죽고나온 기념음반 「히바리 세카이 우다우」 세 번째에 한국민요 ‘도라지’가 수록되어 있다.
가사는 일본말이고 후렴부분에 ‘에헤이요 에헤요’는 한국어로 또렷하게 불렀다. 아마 미소라 히바리의 엔카에는 어딘가 한국의 노래가 숨어 있을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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