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고전(古典)

조선시대 일기에 나타난 성 의식.

야촌(1) 2018. 4. 16. 10:44

조선시대 일기에 나타난 성 의식.

-보이는 성, 숨겨진 성-

박동욱

<차 례>

1. 서론

2. 성욕, 자유와 억압 사이

3. 단죄되지 않은 성

4. 일기에 나타난 성생활의 실제

5. 결론

 

[국문초록]

성(性)이란 매우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다. 성 문제에 있어서 은폐나 왜곡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문집은 말 그대로 저자 본인에 의해 한 번, 문집을 간행할 때 그와 관련된 관계자들에 의해 또 한 번 선별이 되는 까닭에 고인에게 누가 될 기록은 빠지기 마련이다.

 

반면 일기는 아주 개인적인 기록으로 날것 그대로를 담고 있어 내밀한 성 체험에 대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기도 자기 검열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히 등장하는 성경험에 대한 기록은 그것이 별반 흠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은 정말 금욕(禁慾)을 절대선으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적(性的)으로 매우 억압된 사회였을까? 본고에서는 일기 속에 나오는 성적 체험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성의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서얼, 열녀, 축첩, 처첩 간의 갈등까지 많은 문제들이 성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인 성 그 자체에 대해서 당시에 주목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남성의 성욕에 대한 관대함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틀어진다.

 

여성은 무성(無性)의 존재로 만들어 놓았으며, 열녀(烈女)의 삶을 강제했다. 엄격한 부도(婦道)를 강조하며 가부장제를 곤고히 했고,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인 사회적 활동을 봉쇄하고 가족 내에 얽매어 두었다.

 

자신의 성욕으로 파생한 결과물인 자식마저도 서얼이란 이름의 딱지를 붙여서 사회 주류로 편입되는 것을 막아, 자신들만의 견고한 성을 구축해 놓았다. 성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믿고 싶고 보고 싶은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민낯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낯설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남성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주목해야 한다.


주제어 : 조선, 성(性), 일기(日記), 축첩(蓄妾), 처첩(妻妾)
-이 논문은 2014년 한양대학교 교내 연구비 지원으로 연구되었음(HY-2014-G).

 

-한양대 기초융합교육원 조교수


1. 서론


성(性)이란 매우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다. 성 문제에 있어서 은폐나 왜곡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킨제이 보고서가 나오면서 인간의 성생활은 비로소 공론화 되었다.

 

킨제이 보고서의 원제는 <여성의 성적 행동 Sexual Behavior in the Human Female>으로, 인간의 성(性)생활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연구서이다. 연구 결과는 많은 논란을 가져왔고, 이로부터 인간 본성에 대한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에 장제스 전 대만 총통이 57년 동안 써 온 일기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장제스는 자신의 최대 약점이 호색이라고 고백했고, 젊은 시절 일기에도 “오늘 저녁에는 밖에 나가 꽃을 따자.”는 말이 수시로 등장한다.

 

우리나라의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명 조식(曺植) 선생은 “여색에 있어서는 패한 장수이니 묻지 말라.”며 이 문제가 자신 있게 큰소리칠 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언급한 바 있다.

 

또 퇴계(退溪) 선생을 주인공으로 한 성소화(性笑話) 또한 많이 남아 있으니, 진위 여부를 떠나 그만큼 지식인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셈이다.1)


그대들 한 몸 되는 한바탕 놀이에서 暮雨朝雲劇 칠 분쯤의 능력도 감당키 어려우리. 七分本事勢難當한창 때 돌아보면 속에서 천불나니. 思盛壯心頭火 그대 나이 40년 전에는 15살이었네. 四十年前十五郞

 

김려[金鑢,1766(영조 42)~1821(순조 21)], 김요장(金僚長)이 첩을 얻어서 시를 써서 놀리고 조롱하다[金僚長卜姓 詩以戱嘲]


친구인 김기서(金箕書)가 55살에 첩을 들일 때 써준 시로 모두 9수이다. 성적인 능력이 감퇴되는 초로의 나이에 첩을 얻게 되었으니 감당이나 할 수 있겠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성애(性愛)를 표출한 시로는 노긍(盧兢)의 子夜曲, 이안중(李安中), 月節變曲 十二首, 강박(姜樸) 등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한시(漢詩)에서 이런 내용의 시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집은 말 그대로 저자 본인에 의해 한 번, 문집을 간행할 때 그와 관련된 관계자들에 의해 또 한 번 선별이 되는 까닭에 고인에게 누가 될 기록은 빠지기 마련이다.
반면 일기는 아주 개인적인 기록으로 날것 그대로를 담고 있어 내밀한 성 체험에 대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일기도 자기 검열이 없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번히 등장하는 성경험에 대한 기록은 그것이 별반 흠이 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다. 조선은 정말 금욕(禁慾)을 절대선으로 믿고 실천했으며, 성적(性的)으로 매우 억압된 사회였을까? 본고에서는 일기 속에 나오는 성적 체험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성의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졸고(2010a). 참조.

2. 성욕, 자유와 억압 사이

  유교의 경전에서 여색(女色)에 관한 글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禮記』, 禮運에는
“음식에 대한 식욕, 남녀 사이

  의 성욕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있는 곳이다[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라고 하여, 결국 인간이란 식욕(食慾)과

  성욕(性慾)으로 대표되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것이 여타의 종교와는 차별되는 지점이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인간이 실천하기 어려운 계율이나 계명을 내세워 그것

  을 실천하도록 노력하게 만들고, 실천할 수 없더라도 죄의식 등으로 이러한 욕구를 억압하게 만든다.


『논어』季氏에

“군자에게는 세가지 삼가는 것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혈기가 안정되지 않아서 삼가는 것이 여색에 있다.[孔子曰 : 君子有三戒. 少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라고 했다.

 

젊었을 때는 혈기가 왕성하여 지나치게 호색(好色) 하기에 십상이니 조심하라는 말이다. 또, 『論語』子罕에 “덕을 좋아함을 여색을 좋아함같이 하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라고 했고, 『論語』述而에 “다른 사람의 현명함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한다[賢賢易色]”라고 했다.

 

대부분 인간의 어떤 욕망보다 성욕이 강렬한 쾌락을 담고 있기에 특별히 경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지, 도덕적으로 금기시해야 할 행위라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통상 종교나 도덕에서 한결 같이 성적 쾌락을 부정적으로 몰고 가며, 억압할 문제로 보는 것과는 여러 면에서 대비가 된다. 사대부에게 유교 경전은 종교적 경전에 버금갈 만한 무게를 지녀서 행동의 준칙으로 삼았다.

 

유교 경전에서는 성욕을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며 조심해야할 문제로는 인식하였지만, 그렇다고 금욕이나 절제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들은 성 문제만큼은 경전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무릇 간범(姦犯)에 관한 형벌(刑罰)은 마땅히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집행해야 하는 것이나(死刑囚가) 임신(妊娠)하였으면 출산(出産)을 기다려서 행형(行刑)한다.

 

○사족인(士族人)이 시마(緦麻) 이상의 친척이나 시마(緦麻-8촌간) 이상 친척의 처(妻)를 간음(姦淫)한 경우에는 때

   기다리지 아니하고 교수(絞首)하며 대공(大功-4촌간에 입는 상복) 이상 친척의 양첩(良妾)을 음한 경우에도 교수

   (絞首)한다.

 

○사족(士族)인 부녀(婦女)가 음욕(淫慾)을 자행(恣行)하여 풍속(風俗)과 교화(敎化)를 더럽히고 어지럽게 한 경우

   간부(姦夫)와 함께 교수(絞首)한다.

 

   그것이 궁박(窮迫)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어 도로(道路)에 떠돌아다니면서 거지(乞)가 되어 남에게 몸을 의탁

   경우에는 상천(常賤)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사족(士族)으로 논할 수가 없으니 간부(姦夫)와 함께 추문(推問)하지 아니

   한다.

 

○ 사족(士族)의 처(妻)와 그 딸을 강간(强姦)하는 경우에는 강간(强姦)의 기수(旣遂)와 미수(未遂)를 막론하고 주범(主

    犯)과 종범(從犯) 모두 때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참수(斬首)한다.사족(士族)의 첩(妾)과 그 딸을 강간(强姦)한 경우에

   도 같은 형률(刑律)이다.2)"

 

2) ≪續≫ 凡姦犯律應不待時者, 懷孕則待産行刑.

○士族姦麻以上親及麻以上親妻者, 不待時絞, 姦大功以上親良妾者絞.
○士族婦女, 恣行淫慾, 瀆亂風敎者, 姦夫絞 其窮不自存, 流離道路, 乞托身者, 與常賤無異, 不可以士族論姦
推.

○士族妻女劫奪者, 勿論姦未成, 首從皆不待時斬 士族妾女劫奪者, 同律.
   그 다음으로 법률적 문제를 들 수 있다. 『속대전(續大典)』, 간범(姦犯) 조항에 상세히 나온다.

  간범(姦犯)은 취첩(娶妻) 또는 취첩(娶妾) 이외 남녀(男女)의 성관계(性關係)를 말하는데 지금의 간통(姦通)과 강간사범

  (强姦事犯)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가까운 친인척 간에 간통을 하거나 사족(士族)의 여자를 강간하는 경우에는 혹형(酷刑)을 받게 된다.

 처벌 수위가 높지만 처벌되기도 쉽지 않았다. 아주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면 성 문제가 공론화되거나 처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면, 여자의 경우 남편을 제외한 혼외정사에 대해 아주 가혹하게 처벌받았다.

남성의 성에 대해 관대한 풍조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면서 사회적인 안정성을 구현하려 했다.

조선시대에 성행한 열녀 담론이야말로 여성에 대한 정신적 할례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경전이나 법률에서 성에 대한 제재를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성이 사회적

제재로부터 자유롭고, 한 개인의 도덕성으로만 환원될 때에 성의 방종은 이미 예견될 일인지도 모른다.

 

3. 단죄되지 않은 성

   1) 현지처 문제

      유배객들은 유배지에 거의 예외 없이 현지처가 있었다. 김춘택과 석례, 박영효와 과수원댁, 김윤식과
의주녀, 김정희

      와 예안 이씨 등을 예로 들 수 있다.3)

 

      이학규는 유배지에서 첫째 부인을 잃고 김해의 하층 여자인 진주강씨를 얻어 5년을 함께 살다가, 딸을 낳은지 9일

      만에 세상을 뜨자, 哭允母文을 쓰기도 했다.

 

      김려는 1797년 11월 부령에 유배를 왔다가 부령 관아의 관비인 연희와 불같은 사랑을 하다가 3년뒤 1801년 4월 진

      해로 이배(移配)를 당해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사유악부(思樂府)를 지었다.

 

      그녀들은 각종 허드렛일과 잠자리까지 도맡아 아내와 다름없었지만 해배(解配)되었을 때 여자나 자신의 소생을 다

      시 원래의 거주지로 데려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아예 데려갈 시도조차 하지 않고 버려두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저자인 유희춘은 함경도 유배 시절에 구질덕(仇叱德)이라는 노비를 첩으로 들여 네 딸을

      낳았다.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노비가 된 네 딸을 양인으로 만들기 위해 애를 쓰다가 마침내 뜻을 이루었던 이야기

      가 미담처럼 전해온다.4) 이와는 반대로 비극적으로 끝난 경우도 있다.

 

      다산은 1801년에 유배가서 1812년을 전후하여 홍임의 어미와 살림을 차린다.

      1818년 해배(解配)되어 서울에 돌아올 때 홍임이 모녀도 데려왔지만, 다산의 본처가 그녀들을 달갑지 않게 여기자

      다시 다산 초당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남아있는 기록은 없다. 다산은 홍임 모녀를 위해 남당사(南塘詞) 16수를 썼다.

      조선시대 최장기 유배객이었던 조정철(趙貞喆)은 제주도에서 무려 27년을 적거(謫居)하였으며, 총 29년 동안 유배

      지를 떠돌았다.5) 읍비(邑婢)의 신분이었던 홍윤애는 1779년 겨울부터 조정철의 적소를 드나들다 1781년 딸을 낳

      았다.

 

      제주목사는 홍윤애에게 모진 고문을 하여 조정철의 죄를 무고(誣告)하게 만들려 했지만, 그녀가 끝내 자백을 거부하

      자 곤장 70대를 때려 죽였다. 홍윤애는 고통 속에 죽어가면서도 조정철을 지켜냈고, 조정철은 유배 29년 만에 해배

      (解配) 되었다.

 

      그 후 4년이 지난 어느 날 제주목사가 되어 제주로 돌아와서 홍윤애의 빗돌을 세워주고, 자신과 홍윤애 사이에서 태

      어난 31살 먹은 딸을 만난다. 늦게 만난 딸과의 재회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은 없고, 구전으로 약간의 이야기가 전해

      올 뿐이다.6) 이렇게 의리를 지킨 경우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경우라고 볼 수는 없다.

 

3)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책이 도움이 된다. 김순인, 표성준(2012). 참조.4) 전경목(2013). 참조.5) 졸고(2007 : 2010b;

    2010c; 2011). 참조.

 

6) 조목사는 곽지(郭支) 마을에 농토(農土)를 4차에 걸쳐 총 7,000평(1차 2,500평, 2차 1,600평, 3차 1,700평, 4차 1,200

    평)을 사주어 딸네 박씨 가문(朴氏家門)에 생계(生計)를 어렵지 않게 했다. 조원환(1994), 882면 참조.


2) 첩의 문제

조선시대 남성들이 첩을 들인 이유는 제각각이다. 양반 남성들이 후사를 잇기 위해서, 집을 떠나 외지에서 장기 체류할 때 시중을 받기 위해서, 부인이 죽은 뒤 더 이상 후사를 둘 필요는 없고 오로지 시중 받을 목적으로, 여자를 만나던 중 생긴 자식을 거두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로 혹은 부인의 권유로 첩을 들이는 경우 등으로 요약된다.7)
7) 김경미(2012), 93면. 참조.

"오봉은 첩을 얻으려 했으나 항상 아내를 두려워하여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 어느 날 몰래 양가(良家)의 딸을 첩으로 얻으려 했더니 그 집에서 폐백을 지나치게 요구했다. 그는 마련할 길이 없자 다만 한 장의 장지(長紙)에

“홍문박사 이호민(弘文博士李好閔)”

이라고 자기의 관직을 적어 함에 넣어 보냈다. 그 집에서 함을 열어보고 아주 분통을 터트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우스워 포복절도하였다.8)"

 

8)『삼명시화』 : 蓋李欲卜妾而常畏內不敢動. 一日潛卜于良家, 其家苛索綵幣, 李無路備之, 只以一片長紙, 書其銜曰: “弘文博士李好閔”, 納諸函中而送之. 其家開見大懊. 聞者絶倒. 민족문학사연구소 한문분과(2006). 참조. 번역은 이 책을 참고하였다.

후사(後嗣)를 위해 불가피하게 첩을 두는 경우가 아니라, 호색(好色)의 방편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축첩(蓄妾)은 “진사(進士)만 해도 첩을 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엄처시하(嚴妻侍下)에 있던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이 아내 몰래 첩을 얻으려는 정황이 희화적으로 그려져 있다. 첩을 두는 것이 아내의 무조건적인 협조나 승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천 강씨의 편지를 보면 이러한 상황을 알 수 있다. 김훈 신천 강씨 부부사이에 사단이 난 것은 김훈이 선현역 찰방이 되면서부터다.

 

김훈이 첩을 얻겠다고 밝히자 아내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위에게도 말하지 마라. 너희만 보아라. 이렇게 앓다가 너무 힘들면 내 손으로 죽고자 한다.

암말 않고 소주를 독하게 해서 먹고 죽을까 생각도 한다.”


"혹 또 첩을 얻을 때 나이나 얼굴은 따질 것 없이 착실하여 믿을 만한 사람을 얻는다면, 비록 나이가 아주 어리지는 않더라도 혹은 20~30세가 넘은 여자라도 무방하니 첩(妾)도할 겸 여종도 할 겸 먹고 입는 일에 이바지시킬 따름이네. 한편 한양의 여염집 아낙 중에 가난한 자가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깔끔할 수 있다면, 비단 가장에게만 음식을 댈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재물을 만들 수도 있네.

 

노모(老母)를 의지하다가 혼인이 늦어진 사람이 있다면 더욱 좋겠네.

눈앞의 하책(下策)으로는 오로지 어린 여자아이를 구할 필요도 없다네.

하물며 내 나이가 지금 41세니, 늙다리 여자를 취해 생명을 해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9)"

 

9) 1769년 8월 23일 : 或又卜姓, 不論年姿, 但得着實可信者, 雖非最少, 或逾二三十者亦不妨, 兼妾兼婢, 供衣食之役而已.

    且京中閭閻婦女之貧者, 苟於針線飮食, 能精能潔, 則不獨可以供家長, 亦可因此生財. 如有依倚老母, 晩乃成婚者尤妙.

    至於目前下計, 則不必專求童女, 我年今四十一, 豈若取其老成者, 不至傷生之爲愈乎.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난고(頤齋亂藁)』에 나오는 이야기다. 상처(喪妻)한 이후에 정식으로 혼인하기가
여의치 않은

   경우에 들이는 여자도 첩(妾)이라 했다.

 

여러가지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식모(食母) 역할이나 잠자리 상대를 원할 뿐이었다. 약간의 자조도 섞여 있기는 하지면 결국 눈높이를 낮춰 상대를 구할 요량을 한다.


◇이현환(李玄煥, 1713~1772)의 애첩설(愛妾說)에도 예순 살에 가까워서 중매쟁이의 말과는 딴판인 박색(薄色)의 여자를 첩으로 얻게 되자 모모(嫫母)와 무염(無鹽)과 같은 천하의 추녀보다는 낫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정을 붙이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나온다.


첩을 얻는 것은 기본적인 재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우선 딸을 줄 집에 10~20냥을 주어야 하고, 혹 귀첩(貴妾)을 들이려면 30여 냥과 보내야 할 의복을 대략 준비해야만 했다. 또 첩과 동거할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40냥 정도의 집값이 필요하고, 덧붙여 1년에 쌀 10여 섬도 갖추어야 살림이 꾸려진다.10)


유득공(柳得共)의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초정소실혼서(楚亭小室婚書)’에는 소실을 얻는 정황이 상세히 나온다. 1792년 박제가의 부인 덕수 이씨(德壽李氏)가 세상을 떠난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각각 셋을 두었다.

 

상처한 후 안의현에 박지원을 찾아가자 박제가에게 13살 먹은 기생을 천침(薦枕)하게 하고, 첩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지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한다.11) 그 후 서울에 사는 장씨(張氏)를 첩으로 얻게 된다.


첩을 얻는 경우의 수는 매우 복잡하다. 상처했지만 재취를 들이지 않고 첩을 두거나, 아내가 살아 있지만 첩을 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외직에 나가거나 유배에 처했을 경우 상황에 따라 불가피하게 첩을 두기도 했다.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다시 돌려보냈다. 철저히 필요에 따라 취했다가 용도 폐기한 것이다.첩의 신분에 따라 기녀, 천민, 양민, 서녀까지 실로 다양하다.

 

첩은 최소한의 보호 장치도 없이 노동과 정욕만을 채우기 위한 존재로, 실질적으로 아내의 역할을 하면서도 아내로 대접받지는 못했다. 첩은 남성은 물론이거니와 여성에게도 타자였다. 지금의 세컨드라는 말이 갖는 불온한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12)


10) 황윤석이 첩을 들이는 이야기는 다음의 논문에 상세히 나와 있다. 유영옥(2008), 70면. 참조.

 

11)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이 참고가 된다. 안대회(2005). 참조.
12) 졸고(2013). 참조.


3) 관기의 문제

"식사를 한 뒤에 강가에 나아가서 국령(國令, 李紀淵)이 곧 떠나려는 것을 보았는데 피리와 북, 돛폭과 돛대 등 위엄 있는 모습이 매우 성대하였다. 국령은 유람선 위에 단정히 앉아 있었고, 방기(房妓)인 경란(鏡鸞)이 옆에서 섭섭해 하여 이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국령이 손을 내저으며 들어가라고 했지만 경란은 말하지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다만 눈물을 비 오듯 흘릴 따름이었다. 배가 오래도록 출발할 수가 없었고, 국령 역시 정을 끊고 뿌리쳐서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이에 명령을 내려 (기생을) 함께 싣고 배를 출발시켰으니 한바탕 웃음거리가 될 만하였다.13)"

 

13) 初九日, 食後出江頭, 見國令方發行, 鼓帆, 威儀甚盛, 國令端坐畵舫上, 而房妓鏡鸞者, 在傍戀戀不能別. 國令揮之使

      入,而鸞猶不言不起, 但涕淚如雨而已. 船久不得發, 國令亦不能斷情揮去. 乃令同載發船, 可發一笑也.



◇박래겸(朴來謙, 1780~1842)의 『서수일기(西繡日記)』14) 중 한 대목이다. 『서수일기』는 1822년 3월 16
일부터 동년 7

   월 28일까지 장장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활약했던 일을 담고 있다.

 

위의 글은 이기연(李紀淵, 1783~?)이 기생과 헤어지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서로 정이 들어 끝내 헤어지지 못하고 기생을 배에 태우고 함께 떠나는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면서도 우스꽝스럽다.



『서수일기』에는 조선 3대 명기(名妓)였던 부용(芙蓉), 즉 김운초(金雲楚, 1800~1857)를 만난 일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녀와의 만남이 꽤나 인상적이었는지 몇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도 기생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자신 또한 기생과 두 차례 동침한 일을 기록하기도 했다.

 

『북막일기』에는 옥(玉)이란 이름의 기녀와 헤어짐을 안타까워하거나15), 당숙과 옛날 연분이 있던 회령(會寧)의 퇴기인 해옥(海玉)과 만나는 사연이 등장한다.16)

14) 졸고(2013b); 조남권, 박동욱(2013). 참조.15) 박래겸, 『북막일기』 3월 6일.

     初六日, 風止. 早發, 玉妓昨冬, 來留於行營, 有若相依者, 然今當別, 涕泣不忍辭. 余亦爲之涕.

 

16) 박래겸, 『북막일기』 10월 5일.

     會寧退妓海玉, 出來相見, 卽兵使從叔, 所眄者也, 率置京第, 下世後, 還歸. 聞余之來, 中路來迎, 涕泣話古, 不覺愴憐

    也.是日, 行六十里.



조선시대에는 관기와의 로맨스가 없었던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이이(李珥)와 유지(柳枝), 유희경(劉希慶)과 이매창(李梅窓), 최경창(崔慶昌)과 홍랑(洪娘), 김이양(金履陽)과 김부용(金芙蓉), 이황과 두향(杜香) 등의 이야기는 일반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기생은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해야만 했다. 그들에겐 늘 사랑하면서도 늘 버림받아야 하는 유기(有期)의 사랑만이 허락되었다. 또, 선택하는 것이 아닌 선택되어지는 수동의 삶만이 강요된 셈이다. 외직(外職)에 나갔던 관리에게는 담당 방기(房妓)가 있었다.

 

그녀들과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수년 동안 인연을 맺으니 남녀 간에 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관기는 이동의 자유가 없었지만 여러 가지 편법으로 관기를 유출하여 솔축(率蓄)을 하였고, 관에서는 집요하게 쇄환(刷還)을 요구했다.

 

직접 데려가지 못하는 경우 후임 지방관에게 자신을 담당했던 관기의 구휼을 부탁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기생과의 관계는 관리의 임기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종료된다.

 

자신의 원래 생활공간으로 기생을 데려가는 것은 여러모로 무리수가 따랐다.

둘 사이에 아이가 있을 경우 아이만 거두는 일은 간혹 있었지만, 아이까지 모른 척하는 일도 빈번했다.17)



17) 박래겸의『심사일기(瀋?日記)』 7월 26일 기록에도 이러한 경우가 나온다.(……)
은산(殷山)의 천한 소생(所生)이 이미 5살이 되었다. 여기에 와서야 처음으로 만나보았으니, 도리어 불쌍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돌아갈 때 데려가기로 약조하고 그 어미가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殷山賤産已五歲矣. 到此始相見. 還不勝可憐之心也. 約以歸時率去, 還送其母處).



"또 30리를 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향청(鄕廳) 곡산 지점(谷山支店)에 숙사를 정하였다. 주수 최홍덕(崔弘悳)이 보러 나오고, 곡산 원 서만순(徐萬淳)이 정사(正使)가 여기 오는 것을 영접하기 위하여 나왔으며, 본부(本府) 사인(士人) 임계영(林啓榮)과 사문(斯文) 신영태(愼永泰)가 보러 왔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방기(房妓)가 있다. 양서(兩西) 기생들이, 북경(北京) 가는 사람에게 천침(薦枕)하는 것을 별부(別付)라 칭하는데, 미친 듯이 분주하여, 심지어 하룻밤 동안에 3, 4군데를 편력(遍歷)하는 자까지 있다고 한다.18)"

 

18) 김경선(金景善), 『연원직지』, 1832년 10월 23일.

박래겸은 암행어사로 공무를 집행하는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두 번이나 기생과 동침을 했다. 연행사(燕行使)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생들이 연경(燕京)에 가는 사신 행렬과 동침하는 것을 별부(別付)라고 했는데, 기생들은 하룻밤에 3-4명의 상대를 감당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연행 기간 동안 오래도록 금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것을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상사와 같은 고급 관료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사에게는 고을마다 방기(房妓)가 있었는데 만부에서는 유이(有二)였고 선천에는 태진(太眞)이라 하였다.”19)라는 기록이 있다.



지방에 파견된 관리와 관기(官妓)와의 인연은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에 상세히 나온다.
마흔두 살에 열여섯 살 갑산부 기생 석벽(惜璧)을 맞아 솔축(率蓄,예전에 여자 종을 첩으로 맞아 동거하던 일)할 계획을 세우고 무진 공을 들여서 결국 그녀를 얻었다.

 

첩으로 들인 지 1년 반 만에 딸아이를 낳고, 그 이듬해 훈련주부(訓鍊主簿)로 자리를 옮겨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석벽과는 어떻게 헤어졌는지, 또 딸아이를 데려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된 내용이 없고, 그 후 여섯 살 된 딸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마흔세 살에는 스물넷의 유애(裕愛)라는 시기(侍妓)를 만나 일주일 넘게 밤마다 시중을 받았고, 마흔여덟 살에는 구성부(龜城府) 소속 옥매(玉梅)를 만났다. 그녀는 남편까지 있었던 처지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1년 이상 유지되었다.20)



19) 최덕중, 『연행록』, 1713년 3월 18일.20) 노상추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서가 도움이 된다. 문숙자(2009). 참조.

4. 일기에 나타난 성생활의 실제

 

1) 심노숭의 『남천일록(南遷日錄)』, 한 과다 성욕자의 자기 고백

『자저실기』21)에는 심노숭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결벽증에다 조급한 성격, 기록벽, 과벽(果癖, 특히 감을 좋아했다)을 갖고 있었던 인물이다.

 

또 담배 피우기를 즐겨 했으며, 지팡이나 화로 모으기를 좋아했다. 여러 가지 벽(癖)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섬세하고 예민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한 남편이며 딸을 아끼던 아버지였다.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거의 2년간의 작품들을 모두 아내를 그리워하는 시문으로 채웠으며, 유배지에 있어서 딸의 혼례를 직접 치러주지 못한 자책, 소실에게서 난 딸이 학질에 걸려 죽은 것에 대한 슬픔을 눈물겨운 필치로 그려냈다.

그런 그였지만 남다른 성욕 때문에 자책과 회한을 토로하는 나약함을 보이기도 했다.22)



21) 심노숭 저, 안대회, 김보성 옮김(2014). 참조.

 

22) 이 부분은 정우봉의 논문에 큰 도움을 받았다. 이 논문에는 성욕을 토로한 구절을 한데 모았다. 번역은 이 논문을 참고하였다. 정우봉(2013). 참조.

"내가 평생 가장 괴로워한 것은 성욕을 억제하지 못함이 남들보다 지나친 것이었다.내 나이 서른 살 이전에는 거의 미친놈처럼 집착하여서, 성욕과 관련된 일이라면 세상에 창피한 일이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아주 통렬하게 반성하여 극복하려 했지만 끝내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일찍이 내가 생각하기를 세상의 모든 일은 거의 모두 다 자신이 있었다지만 성욕에 대해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대개 실제 일의 정황이 그러했었다. 서른네댓 살 이후엔 기력은 빠졌지만 마음만은 여전하였다. 신유년 이후로는 기운이나 마음이 사그라진 재처럼 되었다.23)"

 

23) 심노숭(1804.3.27), 『南遷日錄』 11책,
余平生最苦, 情病過人. 三十歲以前, 殆汲汲如狂人. 一涉情邊, 不知世間有羞恥事, 非不欲猛自省剋, 而終不能擺脫出. 嘗自謂天下事, 幾皆有自信, 而此事無可奈何, 盖其實情則然. 三十四五歲, 氣始衰而心猶不衰. 辛酉以後, 氣與心, 漠然死灰.


성욕은 대부분 수치스러움과 죄책감을 수반한다. 성욕의 발현은 사회적으로 금기시된다. 합법적인 혼인을 통한 성욕의 배출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성으로 제어되지 않는 몸을 보면서 겪는 생경함은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나 자학까지 이어지기 마련이다.

 

심노숭은 자신의 과도한 성욕 때문에 고민을 토로한다. 집착이나 행위의 정도가 미친 놈[狂人]이라 자평할 정도였으니 분명 예사로운 수준은 넘었던 것 같다.

 

그의 다른 글인 『자저실기』에서도 그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열네댓 살부터 서른대여섯 살까지 거의 미치광이 같아서 패가망신할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기생들과 노닐 때에 좁은 골목과 개구멍도 가리지 않아서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다.

 

나 스스로도 혹독하게 반성도 했지만 끝내 그만두지 못했다”24)라는 내용도 있고,

“평생 동안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소싯적에 글짓기를 좋아한 것, 벼슬하려는 계획, 정욕에 사로잡힌 것 세 가지 가운데 정욕이 가장 심하였다.”25)라는 부분도 찾아볼 수 있다.

 

벼슬에 대한 욕망도 사그라졌지만 끝내 성욕에서 해방되지는 못해서 기질의 병이라고까지 표현했다.26)

 

이 밖에도 자신의 성적 욕망을 토로한 것으로는 금강산 여행기인 해악소기(海嶽小記)와 이후록(貽後錄) 저술에서도 보인다.

27)

 

동생 심노암(沈魯巖)이 형이 유배갈 때 두 가지 충고 중에 하나로 정욕을 삼가기를 권할 정도였으니, 주변 사람들도 심노숭의 호색(好色)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8)



24) 심노숭, 性氣, 自著實記, 『孝田散稿』 33책. 情慾有過於人. 始自十四五歲, 至三十五六歲, 殆似顚癡, 幾及縱敗, 甚至

      挾斜之遊, 不擇逕竇之行. 人所指笑, 自亦刻責, 而卒不得自已.

 

25) 심노숭, 性氣, 自著實記,『孝田散稿』33책. 平生無嗜癖. 少時, 文字之好·進取之計·情慾之累三者, 情慾有甚.

 

26) 심노숭(1801.10.2.),

     『南遷日錄』 4책. 余平生無嗜好, 十餘年來, 進就之念, 亦索然無意. 惟不能遽斷者, 是情欲, 殆如質之病, 不可以易變

     也.

 

27) 정우봉(2014). 참조. 이 논문에서 남천일록, 자저실기와 함께 이 두 문헌을 소개하였다.28) 심노숭(1801.4.19),

     『南遷日錄』1책. 來時, 泰詹有二戒, 愼情慾遠術說, 此謫居良詮. 盖知余情累,平生所病, 少時有過人, 殆不能自定. 及

     老大, 氣視衰而心有甚, 常自憂之也. 此來憂畏薰心, 疾病纏身, 一切舊好, 若隔前世.



어떤 기록도 자기 검열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 수위의 자기 고백은 요즘에도 찾기가 쉽지 않다. 성욕은 식욕과 매우 닮아 있지만 매우 다르기도 하다.

 

식욕이 과다하면 식탐이 과하다는 가벼운 질책 정도에서 끝난다지만 성욕이 과다하면 인간본질에 대한 평가까지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심노숭은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저주스런 성욕이 한풀 꺾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나이가 들면서 몸이 점차로 쇠한 탓이었지 자신의 의지로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평안도 기생이 옆에 있더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거나,29) 성욕이 고목(枯木)이나 사그라진 재처럼 되어 보살이 다 되었다는 데에서30) 확인할 수 있다.



29) 심노숭(1803.1.9),『南遷日錄』 8책.
30) 심노숭(1802.12.27), 『南遷日錄』7책. 所謂情欲一念, 眞如枯木死灰, 不知人生有此事. 此固心思之不自暇及, 而亦知筋力之已盡枯也. 然而有時自量, 無事忽笑, 使有朝雲之相隨, 最可寓念. 始知黎渦之不斥, 未必深議, 此非謂宴安之可移也, 寃憤之可忘也, 憂愁之可寬也. 情有所屬, 心或得按, 亦人之常耳. 雖然, 今吾身在此, 中心萌此念, 非但天必厭之, 亦將我自惡之, 在吾則自甘毒, 使人而好發狸笑, 雖死, 吾寧爲此? 是以過有一念之差, 然如避遠盜賊, 遂至兩年于玆, 泊焉若眞成菩薩. 今則自以爲, 廣平之鐵腸, 無以尙之.

"정욕의 병통은 내가 평생 괴로워하는 것인데, 6년 동안 곤궁하게 지내니 좌불(坐佛)처럼 되어 세상에 그러한 일이 있는 줄 모르게 되었다. 갑자년(1804)에 성동쪽 관청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에 그 이웃에 아전의 아내로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얼굴이 자못 추하지 않고, 문과 창을 마주하여 그녀가 웃고 말하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나는 마음이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없지도 않았다.

 

덕삼과 팔십이 두 아이는 잘 알고 있었다. 몇 개월 지나 집으로 돌아온 뒤로는 잊고 지냈다. … 이 일은 한 번 웃을 일이라고 할 만하며, 정사(情史)의 일사(逸事)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31)"

 

31) 심노숭(1806.6.1), 『南遷日錄』 20책.
一段情病, 卽余平生所自苦者, 六年窮居, 便如坐佛, 不知世間有此事矣. 甲子移接城東公廳時, 其隣有吏屬之妻, 年少孀居者, 貌狀頗不?門相對, 笑語近聞. 吾未嘗有意, 而亦未嘗無意, 德八兩童頗知之. 數月還寓後,仍忘之矣,… 其事可謂一笑, 而備之爲情史逸事, 亦未謂不可耶.

이 정도의 수위와 빈도로 성욕에 대한 고민을 토로할 정도였으면 실제로는 더 심각했음이 분명한데, 유배까지 와서 혼자 금욕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통상 유배지에 현지처가 있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기록에 직접 노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이미 1804년에 자색이 괜찮은 송씨 여인을 첩으로 두려 했었는데 그 이유가 성욕 때문이 아니라, 자식을 갖고 싶어서라고 분명히 밝혔다. 거의 혼인이 성사가 될 뻔했지만 어쩐 일인지 일이 어그러졌다.32)

 

위의 글에서는 아전의 아내였던 과부를 첩으로 들이려다 마음을 접은 사실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그녀를 취하려는 간절한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해배(解配)되어 돌아갈 날이 임박해 있었으니 6년간 첩을 들이지 않고 살았던 시간들이 아깝기도 했을 것이다.

 

그녀를 불러 마음을 타진해 보았더니 함께 돌아가고 싶다고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나 끝내 심노숭은 그녀를 포기하고 그녀와의 사연이 풍몽령(馮夢龍)의 정사(情史)에나 수록될 일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32) 심노숭(1804.3.27),『南遷日錄』 11책. 四年窮居, 衣服飮食之策, 相須於女人者甚多. 人或有爲之勸之者, 而自養之薄, 雖至於死, 如石之心, 不可轉也. 嚮在德發村寓隣有宋姓童女, 書童武甲庶姑母, 年數十歲. 余嘗一見, 姿貌頗可. 且聞女紅爲村中之最. 非爲情慾也, 非爲自養也. 壽命難期, 生育有望, 則於是乎不得無動心, 略費經營, 幾得成就.

2) 박계숙(朴繼叔), 박취문(朴就文) 부자의 『부북일기(赴北日記)』,
어느 군관의 섹스 다이어리

부북일기(赴北日記)33)는 조선시대 선조~인조대에 무과에 급제한 울산 출신의 박계숙(朴繼叔), 박취문(朴就文) 부자가 함경도 회령 지역에서 약 1년씩 부방(赴防) 생활을 할 때 남긴 것으로 두 사람의 일기가 합책(合冊)되어 있다.

 

◇박계숙(朴繼叔, 1569~1646)은 1605년 10월 15일 울산에서 출발하여 함경도 회령 보을하진(甫乙下鎭)에서 부방 생활을 하고 1607년 1월 2일 집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고, 박취문(朴就文, 1617~1690)은 1644년 12월 9일 울산에서 출발하여 함경도 경성 변방의 길주(吉州)에서 부방 생활을 한 후 1646년 4월 4일 집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다.



박계숙이 2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0여년 뒤 37세에 부방했고, 아들 박취문은 28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곧바로 부방했다는 것만 다를 뿐 40년의 간격을 두고 이 부자는 똑같이 부방의 체험을 일기로 남긴 셈이다.



박계숙의 일기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1605년 12월 8일에 동행한 몇 사람들이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 자신의 짝은 서시(西施)를 능가할 만큼 아름답다고 알려진 18살 은씨(銀氏)였지만 끝내 동침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이었는지 분명치 않지만 길을 떠난 지 두 달이 되도록 금욕(禁慾)을 유지했다.12월 25일에 경성(鏡城)에서 동료들과 함께 길 가던 여자들을 희롱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때 알게 된 애춘(愛春)이란 여자로부터 그 다음날에 16살의 금춘(今春)을 소개받았다.

 

그녀에 대해서 박계숙은 “서시가 놀랄 정도이고 아름답기가 왕소군을 능가했다. 나삼을 반만 여민 자태는 가을 구름 뒤에 숨은 달 같았고, 비취색 소매에 웃는 모습은 봄 연못에 비치 연꽃 같았다”라고 감탄했지만 웬일인지 그녀와 그날 동침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부방 내내 여색을 멀리하겠다는 다짐을 지키는 듯 했으나 오래가지는 못하고 27일에 드디어 금춘과 동침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동침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1606년 7월 12일 어느 기와집에 들어가서 대접을 잘 받고는 우연히 그 집 미녀와 동침하였고, 7월 18일에는 기생 배종과의 동침을 암시하는 기록을 남겼다.34) 그 뒤로도 동침을 암시하는 기록이 있긴 하나, 동침을 더 이상 적시하지는 않았다.

<표> 박취문 일기에 나오는 동침녀

 

 

 


33) 우인수(1997 : 2003). 참조.

34) 두 사람이 서로 만나니 그 기쁨을 알 만하다. 새벽에 나와서 밝기 전에 돌아왔다.

박계숙과 박취문의 일기에는 자신은 물론 함께 동행한 사람의 동침 사실까지 기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박취문은 아버지의 일기를 일별했을 것이고, 그 체제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박취문의 일기는 아버지 것보다 성에 대한 기록이 훨씬 더 노골적이고 빈도수도 잦다. 부방(赴防)은 군역(軍役) 가운데에서도 가장 혹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혼자 외지(外地)에 나와 있어야 하는 어려움도 함께 짊어질 문제였다. 고단한 임무와 외로운 독신(獨身) 생활을 위무하기 위해서 공식적인 방기(房妓)를 두었다.



무과에 급제한 군관(軍官)은 1년간 변방에서 근무할 때 현지에서 방직기나 방직비를 배정받았다. 관기를 배정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여의치 못하면 사비(私婢)를 배정하기도 했다.

 

35) 박취문에게도 의향(義香)이라는 방기

 

36)가 있었지만, 다른 상대들과 훨씬 각별한 정을 나누었다.

 

그의 동침 상대는 기생이나 여종, 주막의 주탕 등 실로 다양하다. 특정 대상과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가지 않고 다양한 상대와 관계를 맺었다. 2월에는 총 7명의 상대와 관계를 가지기도 했는데, 대부분 일회성 만남에 그쳤다.

그중 월매(月梅)는 인상적이다. 아버지 박취문은 기생 배종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월매가 바로 배종의 딸이다. 월매는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 배종에게서 박취문과의 인연에 대해 듣고는 그의 아들을 직접 찾아 왔다.

 

이처럼 어떤 지역을 방문했을 경우, 자신의 일가와 가까웠던 기생들과 만나는 일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이들은 이날 바로 동침을 하고, 근 6개월 동안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37) 선대에 걸친 기이한 인연에 감탄하고 관계를 지속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설매와는 불타는 사랑을 나누었다.

38) 그녀와 가장 많은 동침을 나누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그런데 그녀와의 관계는 좀 남다르다.

      정황상 설매는 다른 사람의 방기(房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5월 11일에 “술기운을 틈타 설매 집에서 몰래 잤다”와 윤 6월 2일에 “이날 밤 몰래 설매의 집에서 잤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잠숙(潛宿)이란 말에서 불온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점점 대담해져 갔다.

 

윤 6월 19일에는

“밤에 설매를 동문루 상층으로 데리고 가서 잤다”

에서 보듯 설매가 숙직하는 곳으로 찾아와서 관계를 맺기도 하고, 10월 19일에는

“설매가 병사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몰래 빠져 나왔기에 크게 꾸짖어 들여보냈다. 여인의 하는 일이 진실로 마음이 아팠다.”

라고 했으니 병사의 첨침(薦枕)을 하다가 박취문을 찾아오는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35) 우인수(1997), 66면 참조.
36) 원래 방기가 있었는데 2월 27일 의향으로 바뀌었다.
37) 3월 14, 15, 20, 21일, 4월 3, 14, 18, 20, 27일, 5월 7일, 윤 6월 28, 29일, 6월 14일, 7월 1,10일, 11월 27일, 12월 9, 30일, 24년 1월 2, 15일.
38) 그와 관련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4월 13, 17, 24일, 5월 11, 15일, 윤 6월 2, 19일, 10월 19일.

"이름난 기생 건리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저녁에 눈을 무릅쓰고 그녀의 집에 가서 동침하였다. 한밤중에 서로 함께 이야기할 때에 물었다.
“선달님! 선달님 근처에는 기생 연향이 있었을 터인데 동침하신 적이 없으셨나요?”
내가 대답했다.

“데리고 잤지.”

그러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나 앉아서 소리 높여 크게 곡을 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생(同生甥, 오빠 또는 남동생)이 그 연유를 물었다.
“이 선달님께서 어젯밤 연향이란 아이와 잠자리를 가졌답니다.”라고 하니 그 어미도 따라 곡을 하였다.

 

괴이하여 그 연유를 따져 물었더니, 연향이 당창(唐瘡, 매독을 가리킴)을 앓았다 하였다.39)모두 다 낙심하여 밤을 지새웠다.

이날 밤에 언양의 선달 이득영은 기생 대향(代香)과 잠자리를 가졌고, 이확(李擴, 자 士推)은 기생 막개(莫介)와 잠자리를 가졌다. 막개는 도사(都事)의 방기(房妓)로 개골산(開骨山)으로 놀러 갔을 때 말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고 는 하나, 이름난 기생이었다.

 

건리개에게 약을 사라고 세목(細木) 1필과 중목(中木) 1필을 주자 “나는 비록 전답을 팔아서라도 약값을 댈 수는 있지만, 선달님께서는 삼천리 밖으로 와서 약값을 대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받지는 않았다."

 

39) 聞有名妓件里介, 昏冒雪而去其家, 近之. 夜半, 相與語時, 問曰, 主近有妓蓮香, 無乃近之耶” 答曰, “近之”云爾, 則無雜談, 着衣起坐, 高聲大哭. 其母及同生甥等, 大驚出來, 問其由, 則 “此先達主, 昨夜近蓮香兒云” 其母亦哭. 怪問其由, 則蓮香患唐瘡云. 主客具落心, 僅僅達宵. 是夜彦陽李先達, 抱妓代香, 士推抱妓莫介. 莫介腰折人也. 都事房妓, 開骨山遊山時, 落馬腰折云. 然名妓也. 件里介處貿藥次, 細木一疋中木一疋給之, 則答曰, “吾則雖賣田畓, 可得藥價, 先達主,則三千里外, 藥價難得” 終始不捧.

부북일기에는 성과 관련된 흥미로운 사실이 자주 등장한다. 이석로와 박이돈이 모두 말기(末妓)인 회덕과 동침하는 등 변태적 성행위를 하기도 했고,

 

40) 자신이 향생(香生), 천시(擅時) 두 명과 동시에 동침하기도 했다.

41) 또 자신의 동침 상대가 자유롭게 다른 사람의 동침 상대가 되기도 했으며, 아주 예사롭게 동침 상대를 상급자와

공유하기도 하였다.42)

 

40) 1645년 2월 19일 기록.
41) 1645년 10월 25일 기록.
42) 자신은 2월 5일 예제(禮悌)와 2월 6일 옥매향(玉梅香)과 동침을 하였는데, 1645년 8월 14일 옥매향이 병사의 수청을, 8월 15일에는 예제가 병사의 수청을 들었다. 자신도 14일, 15일 격향과동침을 한다.

 

이밖에도 박이명이 ‘인색대장군(忍色大將軍)’이라 떠벌리다가, 이날 밤 주탕인 도선과 잠자리를 가진 뒤 부끄러운 마음에 날도 밝기 전에 서둘러 떠나가 버린일43), 병사가 남편이 죽어 몇 년 동안 수절을 하는 사비(私婢) 태향(苔香)에게 군관과 당장 그날 밤에 동침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듣지 않았는데44), 다른 날 태향의 어미와 오빠를 불러 곤장을 때리자 그날 밤에 여러 군관들에게 둘러 싸여 함께 갔다는 기록도

보인다.

 

위의 기록은 건리개란 기생과 동침을 하다가 건리개가 뜬금없이 연향과의 동침 여부를 확인하고는 동침했다는 답변을 듣자 통곡을 한다. 연향이 매독을 앓고 있었으니 이미 박취문에게 전염이 되었고 자신도 전염되었을 것이란 예상 때문이었다.

 

다른 날의 기록에도 매독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었는지 당창을 앓고 있던 향교의 계집종 옥환(玉環)이 주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장준민과 동침하여 일대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이 나온다45).

 

그나마 이 정도의 자유로움에 그친 건 성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한 몫 했을 터이니, 매독은 자유로운 성생활을 방해하는 큰 장애물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3) 1644년 12월 26일 기록.
44) 1645년 7월 22일 기록.
45) 1645년 1월 24일 기록.

3) 유희춘의 『미암일기』, 초로의 외정(外情) 기록

『미암일기』는 유희춘(柳希春)이 55세 되던 1567년 10월부터 1577년 5월까지 약 11년간 작성한 일기이다. 초로의 나이였지만 다른 기록보다 상세하게 성생활을 그리고 있다.

 

유희춘 자신이 평생 여색을 멀리 했다고 자술하기도 했고,

 

46) 부부 사이에 특별한 문제없이 시문(詩文)을 주고받을 만큼 동지애도 있었지만 첩(妾)과 방기(房妓)와 관계를 맺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46) 1571년 5월 11일 기록. 又以我平生罕近色, 而獨憐玉瓊兒, 特親執盃以饋之.
"(전략)
三四月獨宿, 謂之高潔, 有德色, 則必不澹然無心之人也. 恬靜潔白, 外絶華采, 內無私念, 則何必通簡誇功, 然後知之哉 傍有知己之友, 下有眷屬奴僕之類, 十目所視, 公論自布, 不必勉强而通書也.
… 서너 달 홀로 잠을 잔 것을 가지고 고결한 행동이라고 하면서 덕을 베풀었다고 생색을 내는 것을 보면, 당신은 욕망이 없는 담박한 사람은 분명코 아닐 것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고 결백하여, 밖으로는 화려한 치장을 끊고 안으로는 사사로운 욕심이 없는 분이라면, 굳이 서찰을 보내 자신이 행한 일을 자랑한 뒤에야 남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주겠습니까?

 

곁에는 당신을 잘 아는 벗들이 있고, 휘하에는 가족과 종들이 있어서 수많은 눈들이 지켜볼 터이니 공론이 저절로 퍼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억지로 서찰을 보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以此觀之, 疑有外施仁義之弊, 急於人知之病也. 荊妻耿耿私察, 疑慮無窮. 妾於君亦有不忘之功, 毋忽! 公則數月獨宿, 每書筆端, 字字誇功. 但六十將近, 若如是獨處, 於君保氣, 大有利也, 此非吾難報之恩也. 雖然, 君居貴職, 都城萬人傾仰之時, 雖數月獨處, 此亦人之所難也.
이런 것을 볼 때, 당신은 아무래도 밖으로 드러나게 인의를 베풀고서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을 급급해 하는 병통을 지닌 듯합니다. 소첩이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소첩이야말로 당신에게 잊어서는 안 될 공을 세워놓았으니 이점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마세요.

 

여러 달 홀로 잤다고 당신은 편지를 보낼 때마다 그 끝에 구구절절 자랑하지마는, 예순 살이 곧 닥칠 분에게는 이렇듯이 홀로 지내는 것이 양기를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그것이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신은 귀한 직책에 있어서 도성의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볼 테니, 여러 달 홀로 지낸 정도만 가지고도 남들은 하기 어려운 일을 했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荊妻昔於慈堂之喪, 四無顧念之人, 君在萬里, 號天慟悼而已. 至誠禮葬, 無愧於人. 傍人或云, 成墳祭禮, 雖親子無以過. 三年喪畢, 又登萬里之路, 間關涉險, 孰不知之, 吾向君如是至誠之事, 此之謂難忘之事也. 公爲數月獨宿之功, 如我數事相肩, 則孰輕孰重, 願公永絶雜念, 保氣延年, 此吾日夜?望者也. 然意伏惟恕察! 宋氏白
하지만 소첩이 옛날 어머님 초상을 치를 때, 사방 천지에 돌봐주는 사람 하나 없고, 당신은 만 리 밖 유배지에서 하늘만 찾으며 통곡이나 했지요.

그때 저는 지극 정성으로 예법을 갖춰 장사를 치러서 남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이르기를, 분묘를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친아들이라도 그보다 잘할 수는 없다고 하더이다.

 

삼년상을 마치고는 또 만 리 길에 올라 온갖 고생을 하며 험난한 유배지로 당신을 찾아간 일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요?

제가 당신에게 베푼 이러한 지극한 정성 정도는 되어야 ‘잊기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답니다. 당신이 여러 달 홀로 잔 일과 제가 한 여러 가지 일을 서로 견주어 보세요,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거운지를. 이제부터 당신은 잡념을 영영 끊고 기운을 보전하여 수명을 늘리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바라는 소망이랍니다. 그런 제 뜻을 너그러이 살펴주세요. 송씨는 아룁니다.47)

47) 三四月獨宿, 謂之高潔, 有德色, 則必不澹然無心之人也. 恬靜潔白, 外絶華采, 內無私念, 則何必通簡誇功, 然後知之哉 傍有知己之友, 下有眷屬奴僕之類, 十目所視, 公論自布, 不必勉强而通書也. 以此觀之, 疑有外施仁義之弊, 急於人知之病也. 荊妻耿耿私察, 疑慮無窮. 妾於君亦有不忘之功, 毋忽! 公則數月獨宿, 每書筆端, 字字誇功. 但六十將近, 若如是獨處, 於君保氣, 大有利也, 此非吾難報之恩也. 雖然, 君居貴職, 都城萬人傾仰之時, 雖數月獨處, 此亦人之所難也. 荊妻昔於慈堂之喪, 四無顧念之人, 君在萬里, 號天慟悼而已. 至誠禮葬, 無愧於人. 傍人或云, 成墳祭禮, 雖親子無以過. 三年喪畢, 又登萬里之路, 間關涉險, 孰不知之 吾向君如是至誠之事, 此之謂難忘之事也. 公爲數月獨宿之功, 如我數事相肩, 則孰輕孰重? 願公永絶雜念, 保氣延年, 此吾日夜望者也. 然意伏惟恕察! 宋氏白. <안대회 번역을 참고하였다.>

1570년 유희춘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어 서울에 있던 중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서너 달 동안 여색을 멀리했다고 자랑을 하며 칭찬을 기대했다가 오히려 부인에게 심한 질책을 당한다. 부인 송덕봉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핀잔을 주었다.

첫째는 여색을 멀리하는 것은 군자라면 당연히 취해야 할 도리이다. 둘째,남이 알아달라고 하는 것도 군자답지 못하다. 셋째 나이깨나 먹어 여색을 밝히는 것보다 독숙하는 것이 건강에 좋은 법이다.

 

그렇게 모질게 질책을 하고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었는지 그녀는 남편이 여색을 지키는 것과 자신이 아무런 도움도 없이 시어머니 초상을 치른 뒤 종성 땅까지 남편을 찾아간 것과 비교해서 어느 것이 더 어려운 일이냐고 되물었다.

유희춘의 방기(房妓) 현황 48)

 


이들은 방기(房妓) 천침기(薦枕妓)?창기(娼妓)차비(差備)?시아(侍兒) 등으로 불려졌다. 방기, 천침기, 창기는 시침을 드는 관기를 일컫는 것이고, 차비는 역을 지고 있는 관노비를 말하는 것이다.49)

 

1571년 2월 4일에서 동년 10월 15일까지 약 8개월 동안 전라감사로 나가게 되는데, 부북일기보다는 많지 않지만 유희춘 역시 적지 않은 방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종성으로 유배 가서는 구질덕이란 노비에게서 4명의 딸(海成, 海福, 海明, 海歸)을 둔다.



이러한 불특정 다수와의 성관계는 필연적으로 성병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임질은 유희춘이 걸린 고질병 중의 하나로 이로 인하여 그는 말년까지 상당한 고초를 겪게 된다. 일기에는 유희춘뿐만 아니라 부인 송씨와 아들 경렴(景濂),조카 오언상(吳彦祥), 오성(吳星) 등이 임질에 걸렸다고 나오니, 가족원 중 상당수가 이 병으로 고통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50)

 

미암일기에는 뚜렷한 치료법이 없어 병을 치료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그렇다고 유희춘의 외정에 대해서 부인인 송덕봉의 저항이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유배 중에 축첩을 해서 자식까지 두는 것은 부인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송덕봉이 종성에 찾아간 것도 실제로는 첩과의 관계를 정리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게다가 여러 차례 남편에게 계색(戒色)할 것을 부탁하기도 하였다.51)

 

49) 이성임(2003), 35면 참조.50) 이성임(2003), 43면 참조.51) 1571년 2월 19일, 21일에 보인다.

5. 결론

현재에도 성 문제, 성희롱, 성추행, 성도덕 등 성(性)과 관련된 무수한 문제들이 끊임없이 발생되고 있다. 노소와 지위를 막론하고 여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람의 몸은 성욕(性慾)에 나약하게끔 프로그래밍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성 문제는 욕구 자체가 죄악이 아니라 욕구의 발현이 문제인 셈이다. 현대에는 자신의 배우자를 제외한 대상과의 성행위는 도덕적이거나 법률적으로 모두 단죄된다. 조선시대는 일부일처제가 아닌 일부다처제였다. 적어도 성에 관한 일이 법률적으로는 문제될 일이 없었다는 말이다.



서얼, 열녀, 축첩, 처첩 간의 갈등까지 많은 문제들이 성 문제와 연동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인 성 그 자체에 대해서 당시에 주목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남성의 성욕에 대한 관대함은 상대적으로 여성의 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틀어진다.

 

여성은 무성(無性)의 존재로 만들어 놓았으며, 열녀(烈女)의 삶을 강제했다. 엄격한 부도(婦道)를 강조하며 가부장제를 곤고히 했고, 현모양처(賢母良妻)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인 사회적 활동을 봉쇄하고 가족 내에 얽매어 두었다.

 

자신의 성욕으로 파생한 결과물인 자식마저도 서얼이란 이름의 딱지를 붙여서 사회 주류로 편입되는 것을 막아, 자신들만의 견고한 성을 구축해 놓았다. 이러한 데에는 구조적인 문제도 한 몫을 했다. 장기적이고 연례적인 외직(外職)과 유배로 인해 실제 부부가 동거한 기간이 길지 않았다.

 

그렇지만 성에 대해 상호 대등한 책임과 의무를 갖지 않고서 여성 일반의 인내만을 강요한 것은 틀림없다.

계색(戒色)과 관련된 글이 적지 않으나 수신(修身), 위생과 건강에 국한될 뿐이었지, 사회 일반과 관련된 논의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성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믿고 싶고 보고 싶은 조선이 아니라, 조선의 민낯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낯설지만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남성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 주목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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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2014년 6월 29일 투고되어 2014년 7월 31일 심사를 완료하여 2014년 8월 22일 게재를 확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