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이창호 칼럼] 보재 이상설, 순국 100주년에 붙임|

야촌(1) 2017. 9. 13. 01:45

[이창호 칼럼] 보재 이상설, 순국 100주년에 붙임

[생졸년] 1870(고종 7)∼1917.(향년 48세)

승인 2017. 08.28 15:05:08 금천뉴스 노익희 기자  |  gcns05@daum.ne

 

[금천뉴스 노익희 선임기자] 올해 2017년은 보재 이상설이 순국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보재 이상설’이라고 하면 아마 많은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이다. 

설령 이상설을 안다고 하여도 헤이그 특사의 일원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던, 독립운동사에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선명히 기록되어야 할 독립운동의 독보적인 선구자다. 

187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난 이상설은 시대를 뛰어넘는 냉철한 지성을 지녔던 독립지사다. 이상설은 10대 시절부터 당대의 엘리트(이시영, 이회영, 이범세, 서만순, 조한평, 여규정, 여조현, 이희종 등)들과 함께 학문을 연마했는데, 그들이 익힌 학문은 한문, 수학, 영어, 그리고 새로운 학문인 경제, 법률, 철학 등 거의 모든 과목이었다. 

 

이상설은 25세 되던 해에, 조선조 최후의 과거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였다. 만약 이상설이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일신의 영달과 부귀영화를 위해 쏟았다면 그는 아마도 일생을 평안하게 지냈을 것이다. 또한 그의 후손들 역시, 선대가 남긴 유산으로 대대로 권문세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늘 정도(正道)를 지키며 끝까지 치열하게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싸웠다.그러한 보재 이상설의 업적은 다음 여덟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막고자, 고종에게 ‘순사직’하여 조약을 파기하고 오적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둘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최초의 신학문 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서숙을 만들고 신학문과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셋째, 고종의 밀지를 받고 제2회 만국평화회의 특사로 파견되어 건너가,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으나 세계 언론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밝혔으며 미주에서 애국동지대표회와 국민회를 조직했다.

넷째, 13도 의군을 편성하고 무력을 통해 국권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다섯째, 독립운동단체 성명회를 조직하고 8,624명의 서명을 받아 성명회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섯째, 한인 독립운동단체 권업회를 창설하였다.

일곱째, 국치 후, 상하이 임시정부보다 5년 앞선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정통령에 선임되었다.여덟째, 신한혁명단을 창단하고 본부장에 추대되어 마지막까지 국권회복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끝내 좌절되

          고 말았다.

1906년 헤이그 특사로 망명한 이후, 이상설은 10여 년간 계속된 망명 생활과 치열한 항일 독립투쟁으로 병을 얻게 된다. 1916년 초, 이상설은 붉은 선혈을 토해내며 병석에 눕고 말았다. 결국 이상설은 1917년 3월,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한 교포의 집에서 순국하고 만다.

 

가족들과 몇몇 동지들이 그의 임종을 지켰다. 48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리도 허무하고 애통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육신과 유품과 유고, 모두를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려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했다.

 

‘나라를 잃어 나라를 울고/ 집을 떠나 집을 울고/ 이제 몸 둘 곳조차 잃어/ 몸을 우노라(이상설, 세 가지 슬픔 ‘삼읍’)백암 박은식 선생은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 이는 나라가 형체라면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선생은 독립운동과 역사지키기를 일체화하면서, 역사란 곧 ‘국백(國魄)’과 ‘국혼(國魂)’의 기록이라 역설했다.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소외되는 반면, 친일파의 후손들은 나라를 팔아 모은 그들의 부를 세습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정신의 정도(正道)를 가늠할 수 있는 교과서 속 역사는, 정통사가 아닌 식민지근대화론을 공인하고 친일파들의 죄를 사해 주는 등,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만약 이상설이 그토록 일찍 순국하지 않고 해방정국에서 활동했다면, 오늘날 이런 혼돈의 세상이 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보재 이상설의 신념과 사상은 늘 바른 길 위에 있었다.지금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의가 짓밟히는 어지러운 시대에 처해 있다. 지금이야말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홀연히 국권회복투쟁에 나서 치열하게 해외를 떠돌며 싸웠던 이상설의 바른 정신이 필요한 시기이다.

 

보재 이상설의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며 그의 정신이, 그의 삶이 현재에 오롯이 살아 숨 쉬기를 바란다.

「이창호(李昌虎) 박사」  

 

이창호스피치리더십연구소 대표

이순신리더십 & 안중근 평전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