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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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2일 (수) 윤철원 기자 ycw@ekgib.com
풍우에 씻긴 비각엔 백사의 충정 향기로 피고
<16> 화산서원
↑백사선생을 모신 화산서원 사당
‘오성과 한음’ 일화로 우리들에게 익숙한 오성대감 백사(白沙) 이항복. 병조판서로 병권을 잡고, 대제학으로 문권을 잡았으며, 영의정으로 나라 정치를 통섭했던 ‘통재’(通才) 백사. 그래서 임진왜란을 평정한 호성공신의 일등 중 일등이었고, 사후에는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충신이라 해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애국심, 공평무사한 정치가로서의 깊고 넓은 도량, 나라가 어려울 때 목숨을 바친 충성심, 뛰어난 문장과 학문, 이런 높은 공업은 이 나라 민족사상의 바탕이자 영원한 사표가 됐다.
더구나 그의 대쪽같은 선비 정신과 청렴한 공직생활은 민족혼의 큰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백사 이항복의 학덕과 충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화산서원(花山書院)이 포천 가산면에 위치해 있다.
■ 글 읽는 소리 멈춘 서원의 강당
올들어 가장 낮은 수은주를 보였던 지난 16일 화산서원을 찾았다. 강추위속에 서원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만나기로 한 이성호 화산서원 원장과 이병우 총무가 나타나서야 서원의 문이 열렸다.
↑백사선생 영정 |
↑백사선생 위패 |
화산서원은 애초 1631년에 백사서원으로 창건됐으나 1635년 지금의 자리인 ‘꽃뫼’로 이전하면서 화산서원으로 명칭을 바꿨으며, 1720년(숙종 46년)에야 비로소 사액을 받았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됐으며, 위패는 무덤 앞에 묻어뒀다가 1971년 복원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원의 외삼문을 지나면 좌우로 이항복의 또 다른 호를 따서 지은 동강재(東岡齋)와 필운재(弼雲齋)가 단정하게 자리잡고 있다. 동강재와 필운재는 강당을 겸한 재실이지만 지금은 제기를 보관하고 있을 뿐 글소리는 멈춘지 오래다.
병조판서·대제학·영의정으로 학문·문장에 뛰어난 명재상
사후엔 ‘문충공’으로 시호 내려
당시 포천 선비들 강학 장소
지금은 굳게 닫혀 찾는 이 없고
묘소앞 재실은 흉가로 방치
동·서재를 지나 사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내삼문인 초현문(招賢門)을 지나면 화산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사당이 나타난다. 사당안에는 이항복의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으며, 정면 3칸, 옆면 1칸 반 정도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벽에는 돌들을 박았는데, 아무렇게나 흙담에 박아 둔 돌들이 정감있게 느껴진다. 산비탈에 세워진 까닭에 사당을 둘러싼 담장이 계속해서 높이를 달리하며 산쪽으로 이어져 운치를 더한다. 포천 유림들은 매년 음력 9월12일이면 이곳에서 제향을 지내고 있다.
화산서원은 당시 포천 선비들의 강학장소로 포천 일대의 사람들이 운집해 백사의 학문과 덕행을 칭송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 있다. 찾아오는 이도 없는 듯 한산하다. 안타깝고 아쉽다.
■ 도 지정 문화재 묘소 관리 소흘
서원 오른쪽 산은 이런 저런 묘소들이 옹기종기 누워있고 아래로는 음식점과 공장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이항복 선생의 묘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다만 묘소 가는 길도 역시 공장들과 음식점들의 간판이 너저분하다.
↑백사 이항복선생 신도비(문화재가 비각도 없이 풍우에 방치되 있다)
↑백사 이항복선생 묘소
묘소 입구에는 경주 이씨의 문중전시관을 신축하다가 중단한 것이 보인다. 이병우 총무는 백사의 14대 종손 이상욱씨가 10년 넘게 공사를 하고 있지만 재원이 부족해 아직 완공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묘소 아래 재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흉가로 방치돼 있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틈 사이로 들여다 보니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지 오래돼 보였다.
묘소로 오르는 길목에는 이항복 신도비가 서 있다. 임진왜란 당시 온 나라가 혼비백산 할 때 흔들림 없이 조선의 조정과 백성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백사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 치고는 비각도 없이 풍우에 시달리며 초라해 보인다.
신도비문은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한 상촌 신흠이 글을 지었으며, 전서는 청음 김상헌의 형인 김상용의 글씨다. 비석은 중국 황제가 직접 하사한 옥석이라고 전한다.
묘소는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됐다는 푯말이 서 있으나, 도에서 유지·보존하는 묘소라기에는 너무나 쓸쓸해 보인다. 멀리서 뻗어 내려온 산자락의 끝부분, 서남향의 방향으로 백사와 그의 부인 권씨의 묘소는 쌍분으로 고즈넉이 누워있다. 윤철원기자 ycw@ekgib.com
■ 이항복의 재치와 충절
탁월한 외교력 ‘임란 평정’… 권율장군과 감나무 일화 유명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등으로 불렸다. 우참찬 이몽량의 아들이며 권율 장군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항복은 관료로서는 비교적 출발이 늦은 편이었다.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동네 장난꾸러기로 유명했다. 보다 못한 어머니의 피눈물 나는 꾸지람을 듣고서야 뉘우치고 뒤늦게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또래 친구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도 한참 뒤인 스물 네 살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 정계에 나섰다.
그러나 이항복은 소년시절부터 물욕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보였다. 자기가 새 옷을 입은 것을 보고 가난한 이웃집 아이가 부러워하자. 그 자리에서 새 옷을 벗어 주었고, 신까지 벗어 남에게 주고 맨발로 집으로 돌아온 일도 있었다고 한다.
동시에 강직하고 원칙에 충실한 모습도 있었으니 유명한 권율 장군과의 감나무 일화가 그것이다.
이항복의 집 마당의 감나무가 이웃해 있던 권율 장군의 마당으로 가지를 뻗자 세도 등등했던 그 집 하인들이 허락도 없이 감을 따 갔다. 이에 이항복이 권율이 기거하는 방문에 창호지를 뚫고 “이 팔이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고 답했다.
다시 이항복이 “저 마당의 감나무는 누구의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장군은 “그것도 당연히 네 것이 아니냐?”라며 소년의 재치에 탄복했다는 이야기다. 이항복이 본격적으로 정계에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된 계기는 바로 임진왜란이다.
도성의 함락이 목전에 닥치자 선조는 피난길에 오른다. 조정의 대다수 신료들은 자신의 가족을 챙겨 도망치기 바빴고 성난 백성들은 궁중의 창고에 불을 지르고 약탈에 나섰던 험악한 순간 왕과 왕비, 세자를 호위해 궁을 나선 이들은 겨우 십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피난길에 먹을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황급히 궁을 빠져나왔던 이들의 가장 앞에 서서 길을 인도하고 끝까지 함께 한 이가 바로 도승지 이항복이었다. 전란 중 왕의 신임을 얻어 병조판서에 오른 이항복은 친구인 이덕형, 좌의정 유성룡과 힘을 합쳐 민심을 수습하고 탁월한 명나라와의 외교력을 발휘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이후 이항복은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고 ‘오성부원군’에 진봉되는 등 ‘전쟁영웅’ 대접을 받지만 그 특유의 강직한 성품 때문에 공직생활은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결국 광해군 때 계비인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다가 집권파인 북인과 광해군의 미움을 사 북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유배지에서 최후를 맞게 된다.
이항복이 귀양길에 오른 당시 철령을 넘으며 읊은 시는 지금까지도 신하의 충정을 담은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철령 높은 고개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인터뷰> 이성호 화산서원 원장
백사선생은 기지·재치 뛰어난 창의적 사상가
‘오성과 한음’ 일화 스토리텔링으로 개발돼야”
“백사 선생은 그 기지와 재치가 뛰어났던 분입니다. 창의적인 사고가 중요시되고 있는 요즘 아이들에게 이 분만큼 본보기가 되는 인물은 없을 겁니다.” 이성호 화산서원 원장은 교장 출신 답게 서원의 교육적인 면을 강조했다.
이 원장은 “포천에 사는 아이들조차 화산서원은 둘째치고 이항복이 어떤 인물인지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우선은 아이들이 백사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도록 홍보용 책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만화로 만들어 각 학교에 배포해야죠. 그러면 아이들도 재미있고 자연스럽게 이항복에 대해 알게 될 것이고, 이를 바탕으로 서원에서 충·효 및 예절교육을 한다면 이보다 좋은 인성교육은 없을 겁니다.”
그는 또 서원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지자체와 유림이 머리를 맞대고 서원마다의 실정에 맞는 지원 및 활용방안에 대해 고민해줄 것을 주문했다.
“무턱대고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사람들이 모이지는 않습니다. 화산서원의 경우는 이덕형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용연서원(포천 신북면)과 연계해 ‘오성과 한음’ 일화를 활용해 이야기 벨트화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토리 텔링이 개발돼야 하는 거죠.”
그는 서원의 상시 개방을 위해 소그룹 스터디를 운영하는 방안도 계획 중이다.
이 원장은 “스터디 그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우선 냉·난방 등 시설 보완이 이뤄져야 한다”며 “시·도와 협의를 통해 화산서원이 다시금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공간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 자료는 필자가 편집 하여음을 첨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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