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고하는 글

야촌(1) 2016. 5. 1. 18:59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고하는 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특명에 의해 헤이그 평화회의 대표로 파견된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 전 대한제국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 전 상트 페테르부르크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의 전 서기관 이위종(李瑋鍾)은 존경하는 각하 제위들에게 우리나라 독립이 1884년 여러 강대국에 보장・승인되었음을 주지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의 독립은 현재까지도 귀 국가들에 의해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상설은 일본이 완전히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우리나라와 여러분들 나라와의 사이에 오늘날까지도 유지되는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강제적으로 단절하고자 했던 그 음모를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유도하기 위해 폭력으로 위협함은 물론, 인권과 국법을 침탈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던 일본의 소행을 각하 제위 여러분께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보다 명료하게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규탄 이유를 아래 3가지 경우로 나누어 진술하고자 합니다.

 

1. 일본인들은 대한제국 황제 폐하의 정식 허가 없이 행동하였다.

2.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인들은 황실에 대하여 무력을 행사했다.

3.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모든 국법과 관례를 무시한 채 행동했다.

 

각하 제위께서 공명정대함으로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사실이 국제 협약에 명백히 위반되었는지 여부를 판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와 우방 국가 사이에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던 독립국가인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우호적인 외교관계를 단절케 되고 극동 평화를 끊임없이 위협하도록 방임할 수 있겠습니까?

 

본인들은 황제 폐하로부터 파견된 대한제국의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이 헤이그 회의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몹시 통탄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이 떠나 오던 날까지 일본인들에 의해 취해진 모든 수단과 자행된 행위들을 요약하여 본 서한에 첨부하오니, 우리 조국을 위하여 지극히 중대한 본 문제에 호의적인 관심을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제국 황제 폐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전권에 대해 확인이 필요하신 경우에는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각하 제위들의 요청에 기꺼이 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과 여러 국가 간의 외교 관계 단절은 한국의 의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나라의 권리를 침해한 결과라는 점에 비추어, 우리는 각하 제위들께 우리가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인들의 수단과 방법을 폭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권리를 수호할 수 있도록 대표 여러분들의 호의적인 중재를 허용해 주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먼저 감사드리오며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서명 이상설

서명 이준

서명 이위종

 

『나라사랑』20집,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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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글]

 

Yi-Sang Sul, former Vice Minister, Yj-Tjoune, former prosecutor of the Supreme Court of Korea and Yi-Oui Tjyong, former Secretary of the Korean Legation in St. Petersburg, all designated by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as qualified delegates for the Peace Conference in The Hague, have the honour to inform:

 

Your Majesties,

 

From 1884, up to the present, all the Powers guaranteed and recognised our independence.

 

On November 17 1905 the Vice Minister Yl-Sang-Sul witnessed the Japanese act defying the international law, and by using military force compelled us to break off the mutually friendly diplomatic relations, which had up to this date existed.

 

Taking this into consideration, we permit ourself to inform your Excellencies of the violent tactics used by the Japanese in order to achieve their goal, while obstructing the rights and the laws of the nation. For more clarification we will separate our grievances in three points:

 

1. The Japanese acted without the consent of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2. To achieve their goal, the Japanese used military force against the Imperial Government of Korea.

3. The Japanese acted in defiance of the laws and customs of the nation.

 

Your Majesties′ impartiality will be appreciated that the above three points are a direct infringement of the International Conventions.

 

Can we, as an independent nation, allow this Japanese trick to suppress our friendly and diplomatic relations which had until now existed with all other nations, and allow Japan to become a constant threat to peace in the Far East?

 

We extremely regret the fact of not being allowed to attend the Conference in The Hague by Japanese objection since we are appointed delegates chosen by H. M. the Emperor of Korea.

 

Enclosed with this letter is a report outlining all the operations and actions used by the Japanese up to and until our departure, and we implore you to be very attentive to this matter, which is so important for our country. If at any time you need further details or you wish to ascertain yourselves of our power assigned by our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please do not hesitate to contact us; it would be a great honour to be at the service of your Excellencies.

 

Since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the other nations were only terminated not voluntarily by Korea, but by the Japanese violation, we would be honoured in addressing Your Excellencies by requesting them to intervene, so that we may participate at The Hague Conference in order to defend our rights by exposing the Japanese′s deeds.

 

Our sincere gratitude and estimation to your Excellencies.

 

signed  Yi-Sang-Sul.

     Yi-Tjoune.

     Yi-Oui-Tjyong.

 

『나라사랑』20집,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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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료는 1907년(대한제국 융희 1년) 7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특사로 참석한 이상설(李相卨, 1870~1917)•이준(李儁, 1859~1907)•이위종(李瑋鍾, 1887~?) 등이 일본의 공작으로 평화회의에 공식적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일제의 폭압적인 한국 침략과 부당한 을사늑약의 무효함을 알리고자 작성한 글이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해외 주재 공관을 통해 주재국 정부에 그 불법성을 비밀리에 알렸다. 제2차 만국평화회의는 열강 간의 식민지 쟁탈에 따른 분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1899년(광무 3년)에 개최된 제1차 회의에 이은 것으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4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1907년 6월 15일부터 10월 18일까지 개최되었다.

 

밀사인 이상설•이준•이위종 3인의 구성은 의미 있는 조합이었다. 이상설은 을사조약 강제 체결 당시를 목격한 인물이었고, 이준은 법률가로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설파할 수 있었으며, 이위종은 외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이었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대한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었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이상설•이준•이위종 세 명의 특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 본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 대표의 방해와 을사조약을 특별히 문제 삼지 않던 열강들의 무관심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의를 취재하던 프랑스, 독일, 영국, 네덜란드 등 각국 기자들은 세 명의 대한제국 특사 활동을 언론에 보도하였다. 특히 영국인으로 평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스테드(Stead, William T.)의 전폭적인 지지로 6월 30일자 〈만국평화회의보(Courrier de la Conférence DE LA PAIX)〉에 세 명의 특사가 연명한 「공고사(고하는 글)」를 게재할 수 있었다.

 

글에서 밀사들은 한국에 대한 일제의 침략, 특히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 불법성을 규탄하였으며, 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한 세계 각국의 협조를 정당히 요구하였다. 첨부된 문서에는 일본이 을사늑약을 어떻게 강제하였는지, 그리고 한국인이 여기에 어떻게 저항하였는지를 밝혔다.

 

7월 9일 기자협회는 국제협회 건물로 세 명의 특사를 연사로 초대하였다. 여기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일본의 부당한 침략과 을사늑약의 파기, 한국의 독립을 위한 강렬한 열망을 담은 이 연설은 회합에 참석한 각국 대표와 배석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옹호하는 결의문이 만장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이위종의 연설 내용은 바로 다음 날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회의 참석은 끝내 좌절되었다. 이후 이준은 음식을 끊었고 그로 말미암아 병이 생겨 7월 14일 유숙한 호텔에서 병사하였다. 한편 이위종은 국제협회에서의 연설 직후 잠시 페테르부르크에 돌아갔으나, 이준의 순국을 알리는 급전을 받고 18일 헤이그로 돌아와 이준의 장례를 치렀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7월 3일 밀사 파견 사실을 알고는 고종을 찾아가 협박한 후 고종의 폐위를 일본 총리대신에게 건의하였다. 이에 이완용(李完用, 1858~1926) 내각은 7월 6일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고종에게 일제에 대해 사죄해야 한다고 협박하였다.

 

8일 통감부는 궁금령(宮禁令)을 실시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17일 이완용•송병준(宋秉畯, 1858~1925) 등으로 하여금 고종에게 퇴위하도록 협박하게 하였다. 마침내 20일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 고종은 순종(純宗, 1874~1926)에 대한 양위의 형식을 빌려 사실상 폐위당했다. 이어 일제는 한국 군대를 해산하고 정미조약을 강요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장악함으로써 합병의 형식만 남겨 놓게 되었다.

 

통감부는 밀사 세 명에게 결석재판 형식으로 이상설에는 사형을,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언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