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우범선(禹範善)-농학자 우장춘박사 아버지

야촌(1) 2016. 2. 23. 20:07

■우범선(禹範善)

 

↑우범선 선생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가운데 어린이는 훗날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

     춘 박사이고,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1857년(철종 8) ~1903년 때의 조선 말의무신이며 친일파로 본관은 단양(丹陽). 농학자 우장춘(禹長春)의 아버지이다. 1881년(고종 18)별기군(別技軍)의 참령관(參領官)이 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1894년 8월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군국기무처의원에 임명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의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의 한명으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휘하장병을 이끌고, 일본군수비대와 함께 궁궐에 침입, 민비(閔妃,조선 고종의 황후(1851~1895)의 시해에 참여하였고,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는데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者들에 의해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 중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이로 인하여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시 피신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국이 일변하여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일본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에 망명하였다.

 

동경에 거주하며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와 결혼하여 재기를 꿈꾸던 중 본국에서 고영근(高永根,1853년~1923년)이 일본으로 건너가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 현 구레시의 고영근의 집에 초대 받은 후 살해 당하였다.

 

고영근은 살해 후 바로 경찰에 자수하였다. 일본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고영근은 고종의 선처 부탁으로 5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