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톡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찾아서… ‘슬픈 연해주’
BY pichy91 on 2. 2, 2013
연해주, 그 땅은 우리민족에게 수많은 아픔과 애한이 서린 곳이다.
이미 앞에서 이쳐진 땅,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우리민족 고구려와 발해가 남긴 유적에 대해 간략히 살펴봤다.
그리고 연해주 이주초기의 역사와 생활상에 대해서도 돌아본 바 있다.
여기서는 조국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선조들의 활동
상에 대해서 알아보자.
↑블라디보스톡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최재형이 당시 살았던 집.
지금은 러시아인이 살고 있으며, 한국정부에서 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 구입하려 했으나 거주자가 반대해
성사되지 못했다.
↑최재형의 집이라는 안내문만 붙여, 독립운동의 흔적을 가리키고 있다.
연해주에서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을 불태운 곳이었다.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의병을 조직해 일제와 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신문을 통해 대외선전전을 이끌며, 학교와 각종단체에서 민족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신문에 대해서는 다음 블로그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3.1만세운동도 연해주에서 번진 커다란 들불이었다.
그들의 혼을 심지삼아 타올랐던 불꽃은 꺼지지 않은 혼 불이되어 연해주 땅을 아직도 밝히고 있다.
↑수찬, 올긴지방을 주 무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한창걸장군의 휘하부대의 당시 모습.
↑1920년 3월 1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에서 열린 독립선언 1주년기념식.
먼저 연해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 가는 이범진이 있다. 이범진은 1901년 대한제국 초대러시아 상주공사
로 부임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그는 일본의 소환명령도 거부한 채 대한제국 황제의 특
사로 항일구국 활동을 벌이게 된다.
1907년 아들 이위종을 헤이그밀사로 파견했고, 연해주 항일의병조직인 동의회 결성에도 참여케 한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강점이 완료되자 1911년 끝내 목을 매 생을 마감했다.
최후까지 목숨으로 일제에 항거한 그의 유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우즈벤스크 묘지 제8구역에 안장돼
있다.
↑대한제국 초대 주 러시아공사관 이범진선생 묘(우스펜스크공동묘지)
↑전로한족중앙총회가 1919년 제2회 특별 전로한족대회를 열었던 우스리스크에 있는 건물.
↑입구한쪽에 대한민국정부에서 붙여 놓은 전로한족중앙총회가 열린 건물이라고 안내한 간판이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건물 옆에 지금 고려인문화센터가 있다.
한국인들에게 많은 독립운동의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연해주의 항일결사조직인 동의회에서는 최재형,
이범윤, 이위종선생 등, 1908년 4월 연추(지금의 크라스키노)에서 의병단체 ‘동의회’를 결성한다.
연추는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던 의병들의 근거지였다.
동의회 소속이던 안중근의사는 단원 12명과 함께 1909년 비밀결사체 ‘동의단지회’를 조직한다.
이들은 독립의 결연한 의지를 천명키 위해 연추의 카리에 모여 왼손 무명지를 끊었다.
그 때 끊은 단지가 지금 안중근 의사의 많은 유물에 나오는 그 단지의 모습이다.
이들이 남긴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의 혈서가 오늘날까지 뚜렷하게 남아 있다.
↑쉬코토보의 한인독립군 부대의 모습.
1910년엔 의병부대인 13도의군이 연해주에서 조직됐다.
이들의 목표는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해 일제를 몰아내는 것이었다.
13도의군은 산하에 창의군과 장의군 등 2개 부대를 두었다.
창의군 총재는 이범윤, 장의군 총재는 이남기가 맡았으며, 도총재 유인석의 직접지휘로 전투훈련에
매진 했다.
13도의군의 유인석, 이범윤, 이상설 등은 ‘합병조약’ 무효선언을 위해 “성명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선언서에는 8624명의 서명을 첨부해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했다.
↑대한제국 초대러시아상주공사로 부임했던 이범진의 당시 모습.
↑초대 주 러시아 대한제국공사관 건물.
↑헤이그에 파견된 특사세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선생.
권업회도 있다. 1911년 5월 블라디보스톡의 최초 한인마을인 신한촌에 본부를 둔 ‘권업회’가 창설됐다.
초대회장은 최재형, 부회장은 홍범도였다. 권업회의 목표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군양성과
정부수립이었다.
권업회는 북만주에 대전학교라는 사관학교를 세우고 1914년에는 마침내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제와 제휴한 러시아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는 비운을 맞는다.
↑동의회 총재 최재형선생 존영.
1914년 이상설선생의 권업회가 주축이 되어 출범한 대한광복군정부는 블라디보스톡을 근거지로 삼아
설립된 망명정부였다.
권업회의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정재관 등을 주축으로 흩어져 있는 무장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독립
전쟁을 수행할 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초대 정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 이동휘가 선출됐다.
↑1907년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퇴위를 강요하며 남산에 포를 배치하여 위협하는 일본군.
이상설은 1906년 간도의 용정에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했으며, 1907년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 “대한광복군정부”
등의 핵심인물이다.
이동휘는 1907년 의병 봉기에 실패하고 난 뒤,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했다.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 시베리아로 망명, 권업회와 한인사회당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
당했다.
↑대한광복군정부의 정통령 겸 권업신문 주필, 이상설선생 존영.
↑대한광복군 정부 부통령 이동휘선생 존영.
러시아 혁명직후인 1917년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러시아 전 지역의 고려인대표 100여명이 모여, 회의 끝에 전로
한민족중앙총회를 조직했다. 연해주 우스리스크 체체리나 거리에 본부를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전로한민족중앙총회의 활동을 기반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설립할 토대가 마련됐으며, 전로한민족중앙총회의 실체
는 한인사회당으로 넘어가 계속된다.
↑우수리스크 솔빈강(率賓江, 수이푼 강)변 옆에 있는 이상설의사 유허비
그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동지(同志)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수있으랴, 내 몸과 유품(遺品)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
다에 날린후 제사(祭祀)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遺言)을 남기었다.
↑이상설선생 유허비문(앞면은 한글, 뒷면은 러시아어로 음각되어 있다)
본 유허비는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서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곳에 건립했다.
1918년엔 마침내 일제는 시베리아 침략을 강행한다.
연해주의 한인들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1919년 2월 대한국민의회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국내외를 연합한
임시정부였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와 혈전을 벌이며, 의연금 모집과 군사훈련소 설치 등을 주도해 나
갔다. 문창범, 이동휘, 최재형, 김철훈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1919년 8월 발전적으로 해체하며, 상해임시
정부와 합병했다.
↑일제의 탄압과 만행으로 하바로프스크에 불 타는 한인촌.
↑우수리스크에 주둔했던 일본군 부대모습.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연해주에서도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운동을 주도한 핵심단체는 대한국민의회였다. 이들은 3월 17일 우스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후
블라디보스톡, 연추 등으로 만세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신한촌에 있는 한인들은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만
세운동을 전개하여 조국독립의 열정을 불살랐다.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톡의 한인들을 학살 만행하는 장면.
↑일본군에 체포되어가는 한인과 러시아혁명군.
독립운동의 불길에 놀라 탄압에 나선 일제는 1920년 4월 이틀간에 걸쳐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군대는 연해주의 한인거주지를 무차별습격하며, 무수한 인명을 살상하고 마을을 파괴했다.
신한촌에는 죽은 한인의 숫자만 무려 3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도 우스리스크에서 총살됐다.
현재 우스리스크에는 피해자를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파스크에서 잔인하게 학살당한 한인들의 현장. 정말 참혹한 현장이다. 한 여인이 가족의 시신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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