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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역인수(槿域印藪) - 오세창 저(吳世昌 著)

야촌(1) 2015. 5. 20. 09:03

↑필자소장본

 

 

 

 

 

 

 

 

 

 

 

 

 

 

 

 

 

근역인수(槿域印藪)는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이 조선 초기부터 광복 이전까지 서화가(書畵家)와 학자들의 인장을 모아 엮은 인보(印譜)이다. 오세창 자신의 것 225개를 포함하여 총 850명 3,912과(顆)의 인장이 실려 있다. 인장의 종류는 성명·호·자 및 장서인(藏書印)·사장인(詞章印) 등 다양하다.

 

전각(篆刻), 즉 인각에는 관인(官印)과 사인(私印)이 있는데, 대부분 문인 묵객(文人墨客)들이 기호에 따라 자각(自刻)한다. 이 책에 실린 인장도 대부분 장인에 의한 것보다는 자각이거나 전각가에 의하여 새겨진 것이 많다. 그중에는 중국인의 명각(名刻) 들도 눈에 뜨인다.

 

시대의 흐름과 사용자의 인품에 따라 다양한 각법(刻法)을 살필 수 있으며, 또한 이들 인장의 각법이 모두 뛰어나 조선시대 전각예술의 우수성을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규모의 인보는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방대하며, 더욱이 한 사람의 손으로 수집되었다는 것은 우리나라 금석 예술사(金石藝術史)에 있어 큰 업적이라 하겠다.

 

특히,이 책은《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근역서휘(槿域書彙)》와 더불어 오세창의3대 편저 중의 하나로,조선시대 서화 연구의 기본 자료로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하겠다.

 

-네이트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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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역인수 서문(槿域印藪)

 

서(序)

 

근역인수는 근역서화징과 더불어 위창 오세창 선생의 업적 중 쌍벽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서화징 만은 일찍이 일제 시에 발간되어 우리 서화 문화사상에 보전이었고 좋은 길잡이 역할을 다했다. 그러나 이 인수만은 아직껏 비장된 체 숨은 문화재로서 간직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자고로 문화예술의 나라 이건만 수 천년을 내려오면서도 이에 대한 서화 보나 서화사가 없었음을 위창 선생은 통감하여 모든 정력을 여기에 경주하였고, 또한 여러 문헌 기록 유적 등을 상란 중에도 이를 수집 정리하고 일사의 인몰 이전에 이를 채철 하기 반세기여에 근역서화징과 근역 인수의 양거 편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이는 실로 우리나라 서화사 상의 위업일 뿐만 아니라 또한 크게 민족문화를 선양하는 데에도 일자가 될 것이며, 국내외를 막론하고 예술을 논하는 인사들에게는 큰 보전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양대 업적 중 지금까지 비장되었던 인수를 이번에 본관에서 인수하여 처음으로 공간하게 된 것이다. 이 근역 인수는 이조 초기서부터 해방 이전에 이르기까지 즉 1390-1945년에 이르는 동안에 우리나라의 서화 인이 수용하던 성명, 아호, 별호, 자, 기타 별칭, 이명, 등의 인장을 수집 대성한 것이다.

 

그러나 인장 자체의 수집이 아니라 인장의 날인 본을 수집한 것이며 직접 날인 본을 구하기도 하였고 혹은 책에 날인된 장서인 기타 인을 도려내기도 하였고 또 서화 등에서 오려낸 것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책이나 서화 등에서 인장을 오려냄으로 해서 그것이 손상되는 가치를 아끼는 마음도 간절하지만 또한 이렇게 수단 방법을 도외시하고 인장을 집대성하여 우리나라 금석 예술사 상 절세의 대위업을 이룩한 금자탑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옛날이라고 해서 서화 인이 따로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은 대체로 학덕이 높은 이는 서화에도 능했고 또 인각도 장했을 뿐만 아니라 국사도 담당했던 것인 만큼 이 인수는 서화인의 인수에 그치지 아니하고 문화예술인이나 정치가들의 인수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인수가 비단 금석 예술 사학 상에 큰 업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문화 정치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지닌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뜻에서 위창 선생의 업적을 다시 한번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위창 선생이 우리 문화 및 정치사상에 남긴 공이란 이러한 데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국운이 기울어지자 자강회 대한협회 등을 조직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자강 책을 도모하여 구국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고, 또한 국민대중의 민의를 창달 지도하기 위하여 만세보 대한민보 한성순보 한성주보 등을 발간하여 국민 대중을 구국 대열에 동원하는데 앞장섰던 것은 물론이요또한 이 나라 신문 잡지 발간의 선구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위창 선생은 거족적인 삼일 독립운동의 주동자이며 삼십삼인의 한분으로서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은 분이었다. 다시 머리를 돌려 위창 선생의 예술을 논한다면 그는 전예의 우아한 필치와 인각의 신묘로서 당세 무주라는 고평을 받았고 또한 서화 감식에 있어서도 석봉, 표암, 자하, 추사 등의 뒤를 이어온 국보적인 존재로서 일세를 주름잡았으므로 우리나라 예원에 끼친 선생의 외연 한 공적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더욱 빛날 것은 자명한 일이다.

 

끝으로 이 인수를 간행함에 있어 선생이 남긴 위업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경탄해마지 않으며 이를 간행하는 데 있어 비장해 두었던 인수를 본 도서관에 넘겨주신 유족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며 각체 각자를 정자로 풀어주는 데 각별한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사계에 조예가 깊은 임창순 원충희 김문현 김충현 제선생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올리는 바이며 또 시종 정리 주역 교정에 수고가 많은 이종규 형에게도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서기 1968년 9월 일 국회도서관장

상운 강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