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보재이상설선생.

보재 이상설선생 관련 옛 신문기사 스크랩

야촌(1) 2015. 2. 28. 11:41

■보재 이상설선생 관련 옛 신문기사 스크랩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46년 10월 13일 기사(뉴스)

이상설선생사자 이정희씨 별세(李相卨先生嗣子 李庭熙氏別世)

 

헤아(海牙) 밀사로서 이준(李儁)씨와 함께 가서 활약한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씨의 아드님인 정희(庭熙) 48歲 씨는 숙환으로 서울대학 부속의원에 입원가료 중 지난 11일 오후 2시 별세하였다.

 

유족으로는 미망인과 재준(在濬). 재홍(在鴻). 재철(在哲). 삼형제가 있으며, 호상소는 서울대학 부속의원 영안소이며, 영결식은 13일 오전 11시 시내 정동 성공회(聖公會) 성당에서 거행 하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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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2년 9월 12일 기사(뉴스)

 

자결(自決)이냐? 분사(憤死)냐?

 

「헤이그」서 본 이열사사인(李烈士死因.

당시보도(當時報道)는 애매(曖昧).

전(傳)해지는 말로는 자결(自決).

낯간지런 애국과잉(愛國過剩).

묘석(墓石) 뚫고 화분(花盆) 놓은건 좋지만.

자기부부(自己夫婦) 이름 까지 새겨서야~~

화란(和蘭) 「헤이그」서 정연권특파원발(鄭然權特派員發).

 

지금으로부터 오십오년전(五十五年前) 기울어져 가는 한제말(韓帝末), 고종황제(高宗皇帝)의 밀사(密使)로, 제2회세계평화회의(第二回 世界平和會議)에 참석하여, 활약중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이역만리(異域萬里) 땅에서, 서거(逝去)한 이준열사(李儁烈士)의 영영(英靈)은 지금도 「헤이그」의 공동묘지(共同墓地)에서 조용히 잠들고 있다

 

이열사(李烈士)의 서거(逝去)에 대하여 그동안 그 사인(死因)이 자결(自決)이냐?

또는 분사(憤死)냐? 하여, 상당(相當)히 논난(論難)되었고, 요즘에도 일부(一部)에서 이러한 논의(論議)는 여전(如前)히 계속되고 있다.

 

반세기이상(半世紀以上)이 지난 오늘날 당시(當時)의 일을 알아내기란 결코 쉬운일은 아니지만 현지(現地)에서 그때의 신문기록(新聞記錄),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제2회 세계만국평화회의(第二回 世界萬國平和會議)는 1907년 6월 24일부터「헤이그」의 「메존.뒤.부아」라는 건물(建物)에서 개막(開幕)되어, 그해 10월 16일 폐막(閉幕) 하였는데, 고종(高宗) 파견(派遣)한 밀사(密使)로는 정사(正使)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이상설선생(李相卨先生), 부사(副使)에 전평리원(前平理院) 재판소(裁判所) 검사(檢事)였던 이열사(李烈士), 그리고 전주로공사관서기관(前駐露公使館書記官) 이위종선생(李瑋鍾先生) 세분이었다.

 

이열사(李烈士)의 묘비(墓碑)에는 다만 〃1858년 북청(北靑)에서 태어나 1907년 「헤이그」에서 몰(歿)하다〃라고만 쓰여 있어 서거일자(逝去日子)가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當時)의 신문9新聞). 시(市)의 기록(記錄). 그리고 「뉴. 에익. 엔. 뒤넨」공동묘지당국자(共同墓地當局者)의 말을 종합(綜合)해 보면, 서거일자(逝去日子)는 1907년 7월 14일(일요일) 하오(下午)가 분명(分明0한 것으로 보인다.

 

사인(死因)에 대해서는 화란(和蘭)의 전국지(全國紙)로, 가장 유력(有力)한 신문(新聞)의 하나인 「헤트. 화데란드」의 지(紙)의 1907년 7월 15일자에 〃한국(韓國)에 대한 일본(日本)의 잔인(殘忍)한 탄압(彈壓)에 항거(抗拒)하고자 평화회의(平和會議)에 참석(參席)하기 위하여, 한국대펴(韓國代表)「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양씨(兩氏)와 함께온 차석대표(次席代表) 「이준(李儁)」씨가 어제 저녁 서거(逝去) 하였는데, 그는 이미 지난 수일(數日)동안 이미 병환중(病患中)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가(街)에 있는 모(某) 「호텔」에서 심장림비(心臟麻痹-심장의 기능이 갑자기 멈추는 일)로 사망(死亡)하였다~~」라고 되어있고,

 

주간지(週刊紙)인 「베렐드크로니크」지(紙)의 7월 20일자를 보면, 〃이(李)씨는 「헤이그」에서 수술(手術)을 받은 다음 7월 14일 사망(死亡)하였다〃고만 되어 있고, 병명(病名)이나 병원명(病院名)에는 언급(言及)치 않았다.

 

다음에 지방지(地方紙)로 가장큰「하그스꾸랑」지(紙)의 7월 16일자를 보면 〃이씨(李氏)는 7월 14일 하오(下午)「바겐슈트라트」의 모(某)「호텔」에서 서거(逝去)하였는데, 그는 빰에 종기(腫氣)가 난 것을 의사(醫師)가 수술(手術)로 도려냈으나 그 수술(手術)에서 충격(衝擊)을 받고, 사망(死亡)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이상(異常)한 것은 수술(手術)을 하였다면,「호텔」에서 했을리(理)는 만무(萬無)할텐데, 병원(病院)이름은 고사하고 병원에 입원(入院)했다는 이야기조차 없다.

 

동지(同紙)에는 장례식(葬禮式)에는 이상설(李相卨)씨와 「호텔」주인만이 참석(參席)하였다고, 쓰여 있다. 물론 「호텔」이름은 영업상(營業上) 신문(新聞)에는 밝히지 않았으나 막상 「호텔」번지(番地)인 「바겐슈트라트」가(街) 119번지를 찾았으나 그「호텔」은 그 후 주인(主人)이 여러번 바꿔젔을뿐 아니라 지금은「호텔」이 아니고, 여러 사무소(事務所)가 들어 앉아있다.

 

이열사(李烈士)의 사인(死因)이 신문(新聞)에는 이와 같이 자결(自決)로는 보도(報道)되지 않았는데,「헤이그」시(市)의 기록보관소장(記錄保管所長)「멘소니데스」씨(氏) 역시 자기(自己)도 퍽 흥미(興味)를 가지고 있어 앞으로 글을 쓸 계획이 있다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기록(記錄)을 보여주면서 이열사(李烈士)의 사인(死因)이 자결(自決)로 된 것은 작년(昨年) 6월 13일 「하그스꾸란트」지(紙)에 김재원(金載元) 박사(博士)가 쓴 묘지방문기(墓地訪問記) 가운데서, 자결(自決) 했다고 한 것을 처음 보았다고, 말하였다.

 

「멘소니데스」씨(氏)에 의하면 이열사(李烈士)가 처음부터 회의결과(會議結果)를 예상한 것도 아니며, 회의(會議)는 10월 16일 까지 계속(繼續) 되었는데 조급(早急)히 자결(自決)할 필요(必要) 까지는 없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더구나 이위종((李瑋鍾)씨가 「페데루스브르그」현 「레닌그라드」에 가서 돌아오지도 않았으며, 일본(日本)이 화란영동인도(和蘭領東印度)에 차츰 마수(魔手)를 뻗치려고, 했기 때문에 화란(和蘭)은 일본(日本)을 경계(境界)하는 한편 한국밀사(韓國密使)를 동정(同情)하여 비록 그들이 회의(會議)에는 참석(參席)치 못하였으나 주위(周圍)에서 정신적(精神的)인 위로(慰勞)는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경찰당국(警察當局)에 문의(問議)해 보았더니 이열사(李烈士)에 대한 기록9記錄)이라곤 없다. 이차대전(二次大戰)때,「나치」군(軍)이 인사기록(人事記錄)을 모조리 압수(押守)했기 때문에 그때 없어 졌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열사(李烈士)의 죽음은 자결(自決)이 아니고, 분사(憤死)나 병사(病死)였는가?

그러나 화란인(和蘭人)들 가운데도 자결설(自決說)을 주장(主張)하는 이가 많다.

 

기자(記者)가 만난 대부분(大部分)의 사람들은 이열사(李烈士)가 자결(自決)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우선 전기공동묘지(前記共同墓地)의 소장(所長)인 「하셀바하」씨는 그의 전임자(前任者)로부터 이열사(李烈士)가 자결(自決)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자결이 분명(分明)하다고 말하였다.

 

「하그스꾸란트」지(紙)의 주필(主筆)인 「홀스라그」씨는 자기가 1925년 신문사(新聞社)에 처음 입사(入社)하였을 때, 당시(當時) 평화회의(平和會議)를 취재(取材)한 선배기자(先輩記者)들로부터 이열사(李烈士)가 자결(自決)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이열사(李烈士)의 사인(死因)이 자결(自決)이던 병사9病死)이던 간에 결정적(決定的)인 증거물(證據物)이 될 수 있는 것은 당시(當時) 의사(醫師)의 사망진단서(死亡診斷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시(市) 기록보관소(記錄保管所)에 없다.

 

이열사(李烈士)의 사인(死因)에 관하여는 전문가(專門家)들이 앞으로도 연구(硏究)하겠지만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머나먼 이역(異域)에서 외로이 가신 선열(先烈)의 고귀한 피의 값을 사인(死因)을 가지고, 그 경중(輕重)을 다룰 수는 없다.

 

작년(昨年)에 주모씨(朱某氏)가 이열사(李烈士)의 묘(墓)를 참례(參禮)하고 기석(基石)앞을 뚫어서 들로 화영(花盈)을 만들어 놓았는데, 대리석(大理石)에 자기 이름이 잘 보이도록 검은 글자로 자기와 부인[夫人-당시 화란(和蘭)에 간 일이였음]의 이름까지 큼직하게 새겨놓은 것이 묘소참례자(墓所參禮者)의 눈을 거슬리게 한다.

 

선열(先烈)에 대한 정성(精誠)에서였다면 구태어 이름까지 새겨넣을 필요(必要)까지야 없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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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75년 10월 23일 기사(뉴스)

 

이상설선생(李相卨先生) 특집계간(特輯季刊) 「나라사랑」20집

 

이상설(李相卨)선생 특집(特輯).

계간(季刊) 「나라사랑」20집.

 

외솔회에서 발행하는 계간(季刊)「나라사랑」20집이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선생 특집호로 나왔다.

 

구한말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3밀사(三密使)로서, 유명한 보재(溥齋)의 자료를 집대성한 이번호에는 특히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科擧)인 갑오문과(甲午文科)에 급제한 2편의 과거시권(科擧試券)과 성리학 관계 저술인 심성론(心性論)이 수록됬다.

 

이와 함께「일인요구 전국 황무지개척권 불가소」「을사오조약후 사직소」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각국대표들에게 보낸 「제2회 만국평화회의 제출 공고사(控告詞)」일제의 한일합방을 계기로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족을 규합하여,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선언한 「성명회선언서(聲明會宣言書)」등 귀중한 자료가 원문과 함께 실려 있다.

 

[국판210면(面) 5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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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986년 8월 19일 기사(뉴스)

 

이상설선생 유품(李相卨先生遺品) 51점 미(美)서 환국(還國)

 

이상설선생 유품(李相卨先生遺品) 51점 미(美)서 환국(還國).

유족(遺族) 독립기념관 기증 뜻 밝혀.

항일(抗日) 활약상 규명할 귀중자료(貴重資料).

내년 서거(逝去) 70주기(周忌) 때맞춰~~연구에 활력소

 

초기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인물이며, 헤이그망국평화회의에서 고종(高宗)의 밀사로 활약한 보재 이상설(溥齋 李相卨-1870~1917)선생의 미국에 있는 자료 51점이 독립기념관에 기증된다.

 

이상성(李相卨)선생의 큰 조카 관희(觀熙)씨의 큰아들 재흥(在興)씨[미국 세인트루이스 거주]는 최근 동생인 재열(在悅-한국인삼연초연구소 연구원)을 통해 소장 자료들을 독립기념관에 헌납 하겠다는 뜻을 본사(本社)에 밝혔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1910년대에 이르기 까지 민족 독립운동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 지도자이다. 그는 민족의 근대적 역량의 향상을 기본 명제로 하여 교육. 군사. 외교 등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우리 힘으로 해방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독립운동 노선을 걸었다.

 

그러나 망명지 니콜리스크에서 운명할 때,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처지에 무슨 흔적을 남기는가 하여, 자신에 관한 기록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고, 따라서 독립운동사에서 정당한 평가가 내려지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전면에 나서서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았다. 내년은 그의 서거 70주기가 되는 해, 마침 관련 자료가 독립기념관에 기증됨으로서 이상설(李相卨) 연구는 좀 더 활기를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기증될 자료는 과거시권(科擧試券). 「지어지선론(止於至善論)」.상소문「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1904년 상소문「을사오조약후 사직소(乙巳五條約後辭職疏)」.5차 상소문「권황제아령파천소(勸皇帝俄領播遷疏)」.1910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제출공고사(第二回 萬國平和會議提出控告詞)」.「성명회선언서(聲明會宣言書)」.이상설((李相卨). 삼밀사(三密使). 서전서숙(瑞甸書塾)등. 사진 5장. 그리고 그에 관한 기사 등 51점이다.

 

이 자료들은 이상설(李相卨)의 독립운동 활동상과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이상설(李相卨)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에서 출생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를 조술(祖述)할 학자로 촉망받은 그는 27세에 성균관 관장을 역임했고, 학부, 법부협판을 거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으로 있을 때 을사조약을 맞았다.

 

을사조약은 곧 국권상실로 본 그는 이듬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북간도 용정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건립하고, 1907년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온 세계에 밝혔다.

 

이후 미국. 유럽등지에서 외교로 조선의 국권회복을 호소했고, 1909년 북만주로 돌아와 최초의 한인촌 한흥동(韓興洞)을 건립하고, 이듬해에는 의병을 규합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기도 했다.

 

1914년에는 국권상실이후 첫 번째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구성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고, 1915년에는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 본부장등으로 활약하다 1917년 망명지 연해주에서 4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이처럼 그는 독립운동기지를 마련, 청소년에 대한 민족교육, 외교를 통한 국권회복운동, 독립전쟁을 치를 광복군의 양성 등, 다양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윤병석(尹炳奭) 교수(인하대국사학)는 ″이상설((李相卨)선생은 1910년대 까지 항일독립운동의 주동적 인물로 파악된다. 앞으로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진천군(鎭川郡)에 있는 선생의 생가(生家)가 퇴락하고 71년에 건립한 숭모비 옆으로 중부고속도로가 뚫려 이에 대한 정화작업이 시급하다.

 

〈이연재(李演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