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 모시는‘구강서원(龜岡書院)’
‘14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시민’향사 모시는 성지(聖地)
경주신문 선애경기자 // violetta22@naver.com l 입력 : 2013년 04월 08일(월) 10:57
↑안강읍 양월리 어래산 자락에 위치한 구강서원은 ‘田’자형으로 나누어 토담을 둘렀다.
ⓒ (주)경주신문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선생은 오랫동안 고려의 재상을 지내며 원나라의 강한 정치적 압박을 해소하는데 앞장 선 고려 후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이다. 문충공 익재선생을 향사하고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구강서원(龜岡書院)은 경주시 안강읍 양월리에 있다.
구강서원은 양월리의 지형이 거북의 형태를 닮아 ‘구강’이라 전한다.수령이 100년 넘어 보이는 잘생긴 소나무로 빼곡한 어래산(魚來山)이 나지막하게 서원을 품어주고 있었는데 외삼문을 들어서자 강학의 장소였던 적취당 마당에는 환하게 붉을 밝히던 석조등대가 마당에 의젓했다.
익재선생의 고매한 학식과 사상의 깊이가 봄날의 정취가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경각과 사당 뜰의 자목련과 산수유의 향기처럼 은은하게 배어 나왔다. 지난 3일, 성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으며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는 구강서원을 찾았다.
↑강당인 적취당은 선생의 학문의 경지가 심오해 ‘학문에 도취된다’는 뜻으로 가운데 3칸의 대청과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마련했다. ⓒ (주)경주신문사
익재 이제현 선생은 1287년(충렬왕 14)∼1367년(공민왕 16)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익재·역옹이다.
고려 후기의 학자이며 정치가이다.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 있을 때 간난의 시대에 생을 누린 사람이다.
그러나 원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통일적 정치질서를 현실로서 시인하면서 젊은 시절에 그는 충선왕과의 긴밀한 관계아래 중국대륙을 무대로 폭넓은 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원의 일류 문인, 학자와 교유交遊하고 3차에 걸친 중국대륙 여행을 경험한다.
원의 연경에서 맹활약을 한다. 그것을 통해 얻은 식견과 경륜이 뒷날 그가 정치적 문화적 국면에서 고려사회를 지키고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시 된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험난한 때에 생애를 보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 동아시아 세계의 시민으로 활기찬 젊은 시절을 보내고 뒷날 그것을 바탕으로 고려사회 안에 태산북두와 같은 위치를 지키며 당시의 역사발전에 일정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민현구 고려대교수 ‘14세기 동아시아 세계의 시민’에서 인용함.) 학자로서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을 수용·발전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였고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성리학은 안향-백이정-이제현-이색-권근-변계량-정도전-정몽주의 계보로 이어졌다.
선생은 수제자였던 이색이 그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문학 부문에서도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 많은 시문을 남겼고, 고려의 한문학을 발전시켜 한단계 높게 끌어 올렸다.
한편 사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10권과 『역옹패설』2권이다.
↑익재 이제현선생 영정ⓒ (주)경주신문사
"익재 이제현 선생 단 한 분만 모시고 있어"
구강서원은 익재 이제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영정과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익재 선생의 22대손인 이상천 선생은 “익재 이제현 선생 단 한 분만 모시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원래는 고려 공민왕 때 선생의 영정을 모시는 영당(影堂)으로 세워졌다.
이후 숙종 13년(1687)에 서원으로 다시 세웠다. 하지만 고종 7년(1870)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고, 1917년 140여 문중과 지방 유림의 협찬으로 복원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서원만 철폐하고 관리사동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관리사동 이다.
ⓒ (주)경주신문사
‘학문에 도취된다’는 적취당과 사당인 문시묘
구강서원의 배치는 공간을 ‘田’자형으로 나누어 토담을 둘렀다. 그 왼쪽에는 외삼문과 강당, 내삼문과 사당을 같은 선상에 배치하고 오른쪽에는 고사와 경각을 두었다. 경각 안에는 익재영정과 익재집 책판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한다.
익재 선생의 영정은 우리나라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이는 고려충숙왕때 익재 선생이 원나라에 있을때 ‘진감여’라는 중국의 화공이 익재 선생의 초상을 그린 것. 이후의 여러 영정들은 당시의 영정을 보고 그대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현재 구강서원의 영정 역시 이를 보고 그린 것으로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0호로 지정됐다.
묘우인 문시묘(文始廟), 강당인 적취당, 동제인 시술재(時述齋), 서제인 시준재(是遵齋), 지금의 도서관이었던 경각, 외삼문(숭앙문), 고자실, 내삼문, 대문, 소문2동(일각문), 관리사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게는 공부의 공간과 제향의 공간을 앞 뒤로 구분한 것이다. 강당인 적취당은 선생의 학문의 경지가 심오해 ‘학문에 도취된다’는 뜻으로 가운데 3칸의 대청이 자리하고 양옆에 각 1칸씩의 온돌방을 마련했다.
내삼문을 통해 사당인 문시묘가 나타난다. 제수를 장만하는 전사청이 오른쪽에 있다. 문시묘에는 이제현 선생의 화상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앞면 3칸에 옆면 1칸으로 구성했다. 일년에 향례 두 번에만 개문을 해서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는 묘우 내부는 이날도 공개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동서재의 기능은 글을 가르칠때는 제자들이 숙식을 하던 기숙사였고 그 기능이 사라진 이후에는 제사를 모시러 오던 손님들의 숙박을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자실(庫子室)은 모든 제수를 장만하고 손님접대를 위해 음식을 마련하는 곳이다.
경각에는 판각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비어있는 상태였다. 선생의 책의 일부와 향악, 영정,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233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집판각은 안동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묘우 왼쪽에는 관리동이 연접해 있다.
강당의 서쪽에는 서재가 있었고 동재는 경각의 옆 자리에 있었다. 이는 ‘강당의 터가 좁았던 이유’로 동재와 서재가 분리되었다고 한다. 관리사동에는 현재 후손인 부부가 기거하며 관리하고 있다. 이 관리동은 서원보다 15여년전에 건립되었는데 대원군 당시 서원만 철폐해 관리동은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
이에 198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현재 구강서원의 소유는 경주이씨 양월문중이다.
↑사당인 문시묘에는 이제현 선생의 화상과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앞면 3칸에 옆면 1칸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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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선생 모시는 전국 몇 군데 서원 중 구강서원이 성지이상천 선생은 “구강서원은 1917년이후 여러차례 중수되었다. 도색이나 기와, 서까래도 갈았다. 오래된 건물이라 해마다 보수 및 수리를 해야한다”면서 “유사나 나는 서원의 유지 및 보수에 신경을 많이 쓴다” 고 전했다.
“우리서원은 일년에 2월 하정, 8월 하정 두 번에 걸쳐 춘계, 추계향사를 모신다. 그리고 음력 정월 초여샛날은 자손들이 선생에게 세배를 드린다”며 문유사는 음력 초하룻날과 보름에 동이 트기 전 분향을 한다고 했다. “현재 익재 선생을 모시는 곳이 전국에 몇 군데 있다.
그 중에서도 우리 서원이 각광 받는 이유는 다른 곳은 해방 후에 건립된 곳인데 비해 우리서원이 가장 오래된 서원이고 판각도 보관이 되어 있었던 연유”라고 밝혔다.겸양지심으로 노구에도 성심껏 자문을 해주신 익재 선생의 22대손인 이상천(78)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선애경 기자 violetta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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