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타문중세계도

강회백 선생 가계도(姜淮伯先生家界道)

야촌(1) 2014. 5. 14. 20:14

▲강회백 선생 묘(姜淮伯先生 墓)/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산 175-3(민통선내)

 

민통선 내의 강내리 능말에 동서로 나지막하게 길쭉한 구릉 상부에 동향하여 위치해 있다. 무학대사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약 20m정도의 둔덕을 쌓은 후 그 상단부에 봉분을 만든 특이한 형태의 묘이다. 묘역 하단에 상석과 묘비가 있고, 상석 좌우로 작은 문인석이 조성되어 있다.

 

▲뒤에서 바라본 봉분 모습

 

●강회백(姜淮伯)

1357년(공민왕 6)∼1402년(태종 2).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백보(伯父), 호는 통정(通亭). 할아버지는 중대광(重大匡) 군보(君寶)이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시(蓍)의 아들이다.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 성균좨주가 되었으며, 밀직사의 제학·부사·첨서사사(簽書司事)를 역임하였다. 1385년에는 밀직부사로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 창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로 부사 이방우(李芳雨)와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

 

뒤에 창왕을 폐할 때 지밀직(知密直) 윤사덕(尹師德)과 함께 부고(府庫)를 봉한 공이 있어, 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추충협보공신(推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 해에 조준(趙浚) 등과 함께 세자사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이 어린 것을 이유로 사퇴하였고,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 때 상소하여 불교의 폐해를 논하고 한양천도를 중지하게 하였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政堂文學兼司憲府大司憲)이 되었다.

 

이 때 정몽주(鄭夢周)의 사주를 받은 간관 김진양(金震陽) 등이 조준·정도전(鄭道傳) 등을 탄핵할 때 이에 동조, 대관을 거느리고 상소하였는데, 1392년 정몽주가 살해당하자 처음에는 아우 회계(淮季,1364~1392)가 공양왕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을 면하였으나, 곧 진양(晉陽)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398년(태조 7)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저서로는 『통정집』이 있다.

 

▲ 완역재 강성덕 선생 묘(玩易齋 姜碩德先生 墓) /소재지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산174-4

 

민통선 내 강내리 능말의 아버지 강회백(姜淮伯,) 선생 묘와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상부에 동향하고 있는데, 이 일대의 구릉전체가 진주강씨(晋州姜氏) 묘역이다. 묘는 활개를 갖추고 있으며, 봉분은 원형으로 직경 760cm· 높이 210cm이며 묘 앞에는 3단의 계체석((階砌石)이 있다.

 

석물은 봉분 전면에 상석, 장명등, 묘비가 있으며 좌우측에 문인석과 최근에 조성된 석양이 있다. 상석은 너비 123cm· 폭 56cm· 두께 22cm의 2개를 갖추고 있으며, 장명등의 높이는 191cm로 사방에 화창(火窓)을 둔 화사석과 사모지붕에 연봉장식을 갖추고 있다. 문인석은 좌·우 170cm로 같다.

 

묘비는 비좌· 비신을 갖추고 있는데, 비좌에는 복련문이 부조되어 있다. 비신은 전면(前面)에 「有明朝鮮國資憲大夫知敦寧府事 贈諡載민姜公之墓」의 비문 및 후면에 아들 희맹· 희안의 글씨로 된 강석덕의 일생을 적은 음기로 되어 있다.

 

비신은 상부 양단을 말각하였으며 前面 上·下 엇갈려 탄흔이 2개소 있다. 건립연대는 1461년(세조 7)이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160cm· 너비 67cm· 두께 20cm이다.

 

●강석덕(姜碩德)

 

1395(태조 4)∼1459(세조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완역재(玩易齋). 아버지는 동북면도순문사 회백(淮伯)이며, 심온(沈溫)의 사위이고, 아들이 희맹(希孟, 1424~1483). 희안 (姜希顔,1417~1464)이다.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중이던 1416년(태종 16)에 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세종 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에 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였고, 일시 면직되었다가 1441년(세종 23) 우부승지로 복직되었다. 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년(문종 1)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55년(세조 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 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이다. 저서로는『완역재집(玩易齋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