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의 시대
- 김동야 -
스타일은 그 사람 자신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라고 선언한 뷔폰의 말이 문체학에서는 자주 인용된다. 움직일 수 없는 진리처럼 들리기도 하고. 하지만 이 말은 원래 그가 의도하는 바대로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과학적 진리는 인류 공유의 재산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는 뜻으로 썼다고 한다. 우주만물을 대상으로 할 때 그의 말이 옳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양태가 그가 단언한 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스타일은 각자가 갖고 있는 개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 지구상의 어떤 사람도 꼭 같은 사람이 없듯이 개성이 같을 수는 없다. 각기 다른 개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분류해 보려고 했다.
분류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이해의 첫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분류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짠맛, 단맛, 신맛을 분류하는 것은 감각의 시작이지만 수컷 암컷, 남자 여자를 구분하는 것은 지각 분류의 시작이다. 이 분류로 시작된 감성과 지성의 발달이 오늘날의 인류 문명을 이룩한 것이다.
17세기까지만 해도 ‘개성’(individuality)이라는 말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느 유명한 서양의 신부는 군중들이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제 멋대로 날뛴다고 해서 “저 저주 받을 개성이여!” 라고 한탄했다. 제멋대로 날뛰고 있는 인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각자 개성대로 행하니까 진리와 자꾸 멀어진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후 ‘개성’이라는 말은 그의 예측과는 반대로 점점 긍정적인 힘을 얻어 갔다. 보편적(universal)인 가치관이 아니라, 개성적(individual)인 가치관이 더 우세해지기 시작했다.
개신교(protestants)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신부의 저주와는 달리 하나님을 믿는 방식도 유니버살(캐도릭) 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대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문명의 발달에 따른 문화의 발달은 곧 인간의 개성을 점점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가는 과정과 같다. 문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예술의 예를 보자. 오늘날 개성이 인정되지 않는 예술이 있는가.
개성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못하는 예술, 그 자체의 가치를 상실할 정도로 개성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양 예술에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없는 진리처럼 버티고 있던 미메시스(mimesis)의 이론이 서서히 물러서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개성을 중시하는 창작의 예술로 그 가치관을 바꾸어 간 것이다. 개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예술이 있다면 어디 말해 보라. 자연을 얼마만큼 잘 모방했느냐는 예술관에서 개성을 얼마만큼 창조적으로 표현했느냐가 문제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예술의 가치관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스타일의 시대가 박두했음을 알리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사회에서만은 아직도 스타일이 몸살을 앓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스타일대로 정치하기를 바란다면 제어할 수 없는 난장판이 된다. 그래서 사회적 규율이 생겨나고 법이 생겨난 것이다. 권력을 쥔 사람은 스타일이 마치 눈의 가시 같을 것이다.
통치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면 질서가 제대로 서지 않는다. 제어를 받지 않은 스타일은 마치 제 멋대로 굴러가는 바퀴와 같다. 적어도 정치에 있어서는 그렇다.
통치자의 의도대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움직여 가야 할 것이다. 일률적으로 움직여 가는 것이 그가 바라는 바다. 일률적이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곧 스타일과 정반대편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독재자는 스타일을 싫어한다. 그의 통치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피통치자가 제 하고 싶은 대로 해 보아라. 나라꼴이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 그가 시키는 대로 일률적으로 생각하고 일률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 그렇지 모두 제복을 입혀서 군대처럼 행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재국가에서는 외부와의 통신을 가능한 억제한다. 피통치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정보만 주고 싶은 것이다.
민주주의란 스타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혼란 없이 국민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느냐에 그 승패가 달려 있다.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각자의 스타일대로 살 수 있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민주주의는 없다. 각자의 스타일을 얼마큼 누리며 살 수 있느냐에 그 승패의 관건이 달려 있다.
예술에 있어서는 입씨름이야 좀 하겠지만 스타일의 충돌은 거의 없다. 하지만 정치에 있어서는 스타일의 충돌이 격렬하다. 그 충돌 때문에 옛날에는 정적을 몰아서 죽이기까지 했다. 지금은 많이 완화된 셈이지만. 그래서 예술이 지향하는 바는 평화와 자유다.
각자의 스타일을 어떻게 조화롭게 표현할 수 있느냐에 따라 민주 정치의 승패가 달려 있다. 국민들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항의할 수 있다. 뜻 맞는 사람과 어울려 시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적 혼란이 되도록 방치되면 그 스타일은 서로에게 불행이 될 수밖에 없다.
내 젊었을 때만 해도 거리에 나가면, 남녀 가릴 것 없이 옷 입는 스타일이 비슷했다. 한 공장에서 한 사람이 지시해서 만든 제복과 같은 것을 유행이라고 해서 입고 다닌 셈이다. 얼마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같은 몸짓으로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경제가 어려워서 그렇게 된 면도 없지 않다.
유행이다 하면 색깔도 비슷하고, 모양도 비슷해진다. 여인들은 돈 있는 사람들(있는 척 하는 사람인지 모르지만)을 뒤따라가느라고 바빴다. 그것을 유행이라고 했다. 유행은 스타일을 아무리 구기고 나와도 당당했다. 오래 전이지만 어느 해 동남아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옷 입은 스타일로 봐서 금방 한국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 해 마 제품이 유행해서 한다는 여인들은 마 제품을 입고 다니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근년에 와서는 개인의 스타일은 보다 다양해졌다. 워낙 다양하다 보니 유행이라고 해도 한 눈에 들어오지 아니한다. 이 정도만 되어도 일률적인 유행의 시대는 지나 간 듯하다.
개성의 시대에 돌입한 것 같다. 이제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한 유행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 젊은이 중 일부는 명품 핸드백을 들고, 명품 구두를 신고, 명품 시계를 차는 것이 자기만족의 유행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이 이런 어른들의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어쨌든 스타일의 시대가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 곁으로 가까이 오고 있다. 도도한 물결처럼 밀려오는 유행이지만 오는 듯 마는 듯 우리 곁으로 다가서는 스타일이다. 각양각색의 유행이 아무리 판을 쳐도 그것은 절대로 스타일이 될 수 없다. 유행은 개성이 없기 때문이다. 유행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지만, 스타일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유행이 스타일이 될 수는 없다. 시대를 거스를 수 없듯이 점점 스타일의 시대로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편리함 때문에 스타일을 희생해 왔지만 공장 제품이 예술이 될 수 없듯이 개성을 팽개치고 스타일을 이룰 수 없다. 예술은 우리와 더불어 숨을 쉬는 생명체다. 자유와 평화, 그리고 창조 정신이 그 속에 숨 쉬고 있다.
생명과 더불어 사는 시대에서의 스타일, 그것은 예술과 더불어 사는 시대의 스타일이다. 인류 문화는 개성의 인격화(individuation)라고 한다. 그것은 영원히 추구해 가야 할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예술에 완성이 없듯이 스타일도 완성은 없다. 왜 사느냐는 물음에 신처럼 완전하게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듯이 스타일의 실현도 그와 같다.
그렇다. 우리는 스타일의 구현을 위해 우리의 온 몸을 던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몸으로 던지는 그 시대가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보다 더, 보다 더 라고 외치면서. (2013,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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