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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일기(楚山日記)/민진강(閔鎭綱)

야촌(1) 2013. 9. 14. 00:34

초산일기(楚山日記)는 송시열(宋時烈)이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상례 과정을 문인인 민진강(閔鎭綱, 1659년(효종 10)~1727(영조 3)이 일지의 형태로 기술한 책이다. 초산(楚山)이라는 밀은 오늘날 전라남도 정읍(井邑)의 별호이다.

 

숙종 15년(1689) 6월 8일에서 7월 22일 까지의 내용이 적혀 있다. 일지의 뒤에는 송일원(宋一源)의 <기(記)>와 송환세(宋煥世)의 <추기(追記)>가 붙어 있다. 상례(喪禮)의 준행 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어서 당시의 예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뒤에 붙어 있는 <독대설화(獨對說話)>는 송시열이 효종 10년(1659) 3월 11일에 효종과 가졌던 독대의 내용을 수록한 것이다.

<독대설화>는 별도의 책으로도 나와 있으며 (<奎 3251>‚ 1책 9장)‚ 宋子大典의 <송서습유(宋書拾遺)>에 ‘악대설화(幄對說話)’라는 제목으로 들어 있다. 송시열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정치 운영과 송시열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밖에 <연거잡록(燕居雜錄)>‚ <영릉어찰(寧陵御札)>‚ <어제 어필효종대왕밀찰발(御製御筆孝宗大王密札跋)>‚ <상답(上答)>‚ <명성대비언찰(明聖大妃諺札)>‚ <송군적어찰승수사실기(宋君積御札承受事實記)>등의 기록이 실려 있다. <연거잡록(燕居雜錄)>은 송시열이 독대의 내용을 적어두고 있다가 한림(翰林)으로 있던 이광직(李光稷) 등에게 전하게 된 경위를 적은 것이다.

 

<영릉어찰(寧陵御札)>은 효종이 송시열에게 내린 글이다. <어제 어필효종대왕밀찰발>에는 ‘正宗朝 丙申(1776)’이라는 주가 붙어 있어서 이 책의 간행이 정조대 이후임을 알 수 있다. <상답(上答)>은 송시열이 효종에게 올린 글의 내용을 적은 것이다.

 

<명성대비언찰(明聖大妃諺札)>은 숙종 6년(1680) 현종비인 명성대비의 글로서 당시 궁중에서 쓰이던 한글의 형태를 볼 수 있어 국문학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송군적어찰승수사실기(宋君積御札承受事實記)>는 현종 6년(1665)에 찰방 송군적(宋君積)이 송시열로 부터 효종의 밀찰을 받아 간직하게 된 때의 일을 후일(1721) 문인인 권상하(權尙夏)가 적은 글이다. 이 글들은 송시열의 사적을 수습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간행년대는 미상으로 조선 정조대 이후로 보인다.(윤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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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일기(楚山日記) /민진강(閔鎭綱)

 

기사년(1689, 숙종 15) 6월 8일(계유) 맑음.

 

진시(辰時=오전 일곱 시 반부터 오전 여덟 시 반까지이다)에 선생이 이후진(李厚眞)의 어깨에 기대어 누워 있었는데, 숨이 가물가물 끊어질듯하더니 갑자기 눈을 뜨고 바라보며 묻기를 ‘지금 몇 시쯤 되었느냐?’ 하였다. 이후진(李厚眞)이 ‘이른 조반을 먹을 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또 ‘언제쯤 약(藥)을 내린다고 하더냐?’ 하였고, 이후진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다시 말씀하기를 ‘나의 병이 이와 같으니 미처 왕명(王命)을 받지 못하고 죽을까 염려된다.’ 하였는데, 속히 약을 가져오라고 재촉하는 듯하였다.

 

선생은 눈을 감고 한동안 있다가 다시 눈을 뜨고 말씀하기를 ‘내 명이 다해 가는데 약이 왜 이리 늦게 오는가.’ 하였다.

이에 이후진이 두 공생(貢生=조선 시대, 향교나 서원에 다니는 유생을 이르던 말. 나중에는 향교의 심부름꾼으로 변하였다)에게 대신 부축하도록 하고 방을 나와 우물가로 가서 보니, 서리(書吏=조선 시대, 중앙 관아에 속하여 문서의 기록과 관리를 맡아보던 하급의 구실아치)와 나장(羅將=조선 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다니는 길을 인도하던 종)이 한창 소주에 세 종류의 약을 혼합하여 달이고 있었는데, 매우 걸쭉한 상태였다.

 

이후진(李厚眞)이 말하기를 ‘대감의 병환이 매우 중하여 한 수저의 냉수도 두 번에 나누어 드시는 형편이니, 결코 이 약을 드시기는 어렵다.’ 하니, 서리(書吏)들이 서로 쳐다보며 그 말이 옳다 하고, 다시 세 종류의 약을 가져다가 타서 미음처럼 묽게 하였다. 이때에 공생(貢生)이 방에서 나와 이후진을 부르며 대감이 들어오란다고 하자, 이후진은 즉시 들어가 전과 같이 부축해 드렸다.

이때 선생이 다시 눈을 뜨고 ‘날이 저물었느냐? 애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이후진이 ‘도사 권처경(都事 權處經)이 엄하게 단속하여 들어올 수 없으므로 지금 밖에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몸을 돌려 가볍게 웃으며 ‘어찌도 그리 심하게 하느냐.’고 하였다.

잠시 후에 나장(羅將)이 들어와서 ‘도사가 왔다.’고 하고는 이후진에게 밖으로 나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이후진이 말하기를 ‘내가 나가면 대감은 의지할 데가 없는데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도사가 들어와 서쪽 기둥의 대청에 서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선 물러가지 말고 마루로 안고 나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때에 선생은 숨이 매우 가빠서 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이때, 서리(書吏)가 선생에게 아뢰기를 ‘상께서 약을 내리셨는데 방금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선생이 처음에는 알아 듣지 못하였다. 이후진이 서리에게 ‘대감의 병환이 위중해서 알아 듣지 못하시니, 가까이 가서 큰소리로 말씀드려야 한다.’ 하자, 서리가 조금 앞으로 가서 귀에 대고 다시 말하니, 선생은 곧 몸을 일으켜 앉고서 상의를 가져오라고 명하시고는 그대로 눈을 감은 채로 조금 기대어 계셨다.

 

공생(貢生)이 밖에서 직렬의(直領衣)를 가져다 드리니, 선생은 팔을 들며 입히라고 명하였다. 이후진이 아뢰기를 ‘지금의 기력으로는 옷을 입으시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선생은 손으로 옷자락을 잡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이후진은 그 뜻을 깨닫고 옷을 펴서 몸 위에 얹어 드렸다. 그리고 와석(臥席=병으로 누워 있음)과 함께 선생을 받들어 대청 위 동쪽 편으로 나갔다. 이때 도사는 교생(校生=향교유생)에게 전지(傳旨=왕명서)를 읽게 하였는데, 선생은 옷으로 무릎을 가리고 눈을 감고 앉아 마치 몸을 구부리려는 듯하였다.

 

전지를 5, 6행정도 읽었을 때에 선생은 갑자기 눈을 뜨고 경청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였는데, 잠시 후에 또 그렇게 하였다. 이에 서리(書吏)가 전지를 손으로 가리키며 교생에게 5, 6행을 건너뛰어 속히 읽게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선생은 다시 손으로 옷자락을 여미고 잠시 몸을 굽혔다. 의관(醫官)이 약 세 보시기를 가지고 와 드리니, 선생은 이를 받아 마셨다.

약을 다 드시자 곧 방안으로 모시어 다시 이후진의 몸에 기대어 눈을 감고 누워 계셨는데 얼굴에 마치 술에 취한 듯한 운기(暈氣)가 있었다. 이후진(李厚眞)이 서리(書吏)에게 베개 위에 누이기를 청하니 도사가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이후진이 바로 머리를 받들어 베개 위에 모시니, 선생은 입을 벌려 세 번 숨을 크게 내쉬고는 그대로 운명하셨다.

 

심약관(審藥官=종6품의 약재 전문 관리가관)이 들어와 진찰하고 사망을 확인한 다음 도사가 밖으로 나갔다. 도사가 나가고 나서 사시(巳時=오전 아홉시 반부터 오전 열시 반까지이다)에 발상(發喪)하니, 자제와 문인들이 모두 시신에 기대어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다. 申時에 香湯으로 시신을 목욕하고 襲衣는 4벌로 하였으며 上衣는 深衣로 하였다.

 

이후진(李厚眞)은 정읍(井邑)의 아전[衙前=조선시대 각 관청(官廳)에 딸려 벼슬아치 밑에서 일을 보던 중인(中人) 계급(階級)의 사람]이다. 정읍 현감 권익흥(權益興-從六品)과, 도사 권처경(都事 權處經-從五品)이 선생을 나포하여 올 때에 갖가지로 침해하여 괴롭혔다는 소문을 듣고 색리(色吏=書吏의 다른 말)를 별도로 정하여 그로 하여금 선생을 간호하게 하였다.

 

그래서 이후진이 시종 부축하여 간호하였는데, 왕명을 받을 때의 일을 명백히 알 뿐만 아니라 그가 기록해 둔 것도 있다. 이 글은 그것에 의거하여 기록한 것이다.


습구(襲具)

심의 사, 복건 현단, 대대 방사주, 망건 현단, 멱목 현단,  현단, 충이, 과두 백방주ㆍ늑백 백방주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조대, 흰 명주 적삼 1벌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흰 명주 홑바지 1벌, 서견 남방사주ㆍ버선 백면목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반함주 3개, 흑리 당혜, 질쇄 광직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흰 명주 속바지 1벌, 흰 명주 속저고리 1벌, 옥색 누비 중치마 1벌, 초록 겹창의 1벌.


제 집사 [다른 本에는 이 부분이 대렴 조 아래에 있다.]

호상: 황세정ㆍ최세경ㆍ이상길ㆍ정치, 집례: 권상하ㆍ이우휘ㆍ정찬휘ㆍ이담, 축 : 박중석ㆍ김명석ㆍ권욱,  제복: 박세진ㆍ송상엄ㆍ황 염ㆍ송형필ㆍ임우기, 사서: 곽 경ㆍ민진강ㆍ김기하ㆍ박중회, 사화: 김중석ㆍ김태손ㆍ윤삼거ㆍ박광일, 치관 : 이실지ㆍ임세장ㆍ조명세


9일(갑술) 맑음.

아침이 되기 전에 문인(門人) 이동형(李東亨)ㆍ송원석(宋元錫)ㆍ이우휘(李遇輝)ㆍ김창석(金昌錫)ㆍ이수실(李秀實)ㆍ유명뢰(兪命賚)ㆍ민진강(閔鎭鋼)등이 와서 곡하였다.

 

○이우휘ㆍ김창석ㆍ이수실 등이 장례에 필요한 제반 물품을 장만하여 오다가 말이 지쳐 운반하기 곤란한 상황이 되었는데, 마침 말을 몰고 서울에서 내려오던 長城의 下吏 金重勳을 만나 운반해 와서 염습에 사용할 수 있었다.

 

○巳時에 정읍현감 권익흥이 檢官의 임무를 띠고 잠시 들어와 보고는 나갔다.

○申時에 소렴을 하였는데 옷은 12벌을 사용하였고, 상의는 晦翁(朱熹)이 致仕한 뒤에 입었던 衣制를 따랐다.

○정읍현감과 장성 현감 鄭齊泰, 청암찰방 尹以壽가 와서 조문하였는데, 정읍현감과 장성현감은 모두 賻儀를 하였다.

○棺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棺材는 정읍 鄕任 任漢一 등이 마련하였다.


소렴구(小斂具)

野服 상의ㆍ下裳ㆍ대대, 남색 겹옷 1벌 內賜한 것임. 흰 명주 누비저고리 1벌, 남색 명주누비 중치마 1벌, 흰 명주누비바지 1벌과 세탁한 것 1벌, 초록 노주 명주 이불 1채 다홍색 노주 명주로 가를 두름. 옥색 창의 1벌 양근군수 李商翼이 마련한 것임. 초록 중치마 1벌, 흰 명주 누비 중치마 1벌 세탁한 것임. 흰 명주 바지 1벌, 초록 중치마 1벌 主簿 洪重箕가 마련한 것임. 남색 중치마 1벌 연천군수 成虎祥이 마련한 것임. 흰 명주 중치마 1벌, 흰 명주저고리, 흰 명주바지 1벌 監役 李秀實이 마련한 것임. 흰 명주 창의 1벌 통진군수 金潪가 마련한 것임. 넓은 흰 명주 누비저고리 1벌, 남색 중치마 1벌 李遇輝가 마련한 것임. 흰 명주 중치마 1벌 都事 宋炳遠이 마련한 것임. 소렴포 세로 9척, 가로 3척 5촌,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10일(을해) 맑음.

아침 식사 후에 송이석(宋彝錫)과 문인 민태중(閔泰重)이 와서 곡하였다.

○오후에 고부군수 崔瑗이 와서 조문하고 賻儀하였다.

○저녁이 지난 뒤에 문인 金萬增이 와서 곡하였다.

○선생이 생전에 ‘喪柩를 운송하여 곧바로 萬義로 돌아가라.’고 유언하였다. 그리하여 상주와 자제 및 문인들은 모두 유언을 따르려

   하였으나, 서산 군수 宋時杰이 형편상 곤란하다는 이유를 들어 우선 懷川에 빈소를 차리자고 하였다. 그래서 날이 저문 뒤에 그의

   이름으로 영좌에 고유하였다.

○전라감사 嚴緝이 부의하였다.

○酉時에 대렴을 하였는데, 옷은 10벌을 사용하였고 상의는 襴衫을 썼다. 亥時에 入棺하였다.


대렴구(大斂具)

난삼(襴衫) 1벌, 초록 면 중치마 1벌, 흰 명주 창의 1벌 영유 현령(永柔縣令) 이수준(李秀儁)이 마련한 것임. 두텁게 솜을 넣은 넓은 흰 명주 누비저고리 1벌, 흰 명주 솜저고리 1벌, 초록 중치마 1벌, 옥색 창의 1벌 주부 홍중기가 마련한 것임. 초록 누비 중치마 1벌 진안 현감 정치(鄭治)가 마련한 것임. 옥색 누비 중치마 1벌 안악 군수 서한주(徐漢柱)가 마련한 것임. 흰 명주 누비저고리 1벌, 넓은 흰 명주 누비 솜바지 1벌, 유록색(油綠色)의 넓게 짠 이불 가 선이 없는 것으로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유록색의 넓게 짠 베개, 옥색 명주 이불, 옥색 명주 요, 옥색 도관주(塗棺紬)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염포(斂布) 상동(上同) 서울에서 보내온 것임. 평소에 빠진 치아[落齒] 1봉, 낙발(落髮) 1봉, 손톱 발톱 각 1봉, 임종 후의 낙발 1주머니, 손톱 1주머니, 발톱 1주머니.


11일(병자) 맑음.

어제저녁에 正 宋時燾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서산 군수 宋時杰, 直長 宋基學 형제와 청안 현감 李德老, 宋圭錫 등이 이른 새벽에 먼저 成服을 하고 沙塢를 향해 출발하였다.

○해 뜰 무렵에 朝奠을 올리고 五服의 친척들과 여러 문인들이 모두 성복하였다. 奠은 본 고을 현감이 준비하여 행하였다.

○문인들이 加麻를 함에 있어서 林世章 등 4인은 3년, 黃世楨 등 21인은 朞年, 申啓澄 등 9인은 9월, 具致兼 등 2인은 7월, 李遇輝 등

   23인은 5월, 崔世慶 등 63인은 3월로 하기로 하였다.

○태인 현감  李益著가 와서 조문하였다.

○성복한 후에 고부군수 崔瑗, 장성현감 鄭齊泰, 정읍현감 權益興, 청암찰방 尹以壽 등이 다시 와서 서로 조문하는 예를 행하고 갔

   다.

○辰時 초에 송시도(宋時燾)가 이달 8일 저녁에 별세하였다는 부고가 도착하여 지극히 애통하였다.

○문인 정천(鄭洊)이 밤이 깊어진 뒤에 와서 곡하였다.

○들리는 소문에 李萬亨이 문생의 疏頭가 되고 朴世輝가 方外人의 소두가 되어 5일에 상소하였는데 승정원에서 저지하여 끝내 소를

   올리지 못하고 闕門으로 물러 나와 號哭을 거행하였다. 이튿날 승정원의 아룀으로 인하여 소두를 推治하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박

   세휘는 이미 서울을 떠나 喪次로 향하고 있었으므로, 형조에서는 본도 및 전라도에 공문을 보내어 도착하는 대로 붙잡아 보내라

   고 하였다.

○장성현감이 다시 약간의 제수를 보내왔다.

○정읍현감과 그의 아우 權益隆 및 그곳 鄕任 任漢一 등이 연일 治喪하였는데 온갖 誠力을 다하였다.

○羅重器가 加麻하고 와서 곡하였다.


12일(정축) 맑음.

동틀 무렵에 朝奠을 올리고 喪柩를 받들어 발인하였다. 상여꾼은 정읍의 여러 선비들 중에서 조발하였는데 태인현의 경계에 이르자 古阜의 선비들이 곳곳의 길옆에 기다리고 있다가 바꿔 메었다. 정오가 되기 전에 태인현에 이르러 아침상식을 올렸다.

○본 고을의 현감 李益著가 즉시 나와서 致奠하고 부의도 하였으며, 또 쌀 포대를 내어 상여를 따르는 사람들 중 양식이 떨어진 자

   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렇게 그는 보살피는 일에 있어서 매우 정성스러웠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후에 곧 발인하였는데 상여꾼은 태인의 선비들 중에서 1백여 명을 뽑아 2개 조로 나누어 金溝의 경계까지 교

   대로 메고 갔다. 해 질 무렵 금구현에 이르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문인 朴世輝는 금구현에 도착해서야 형조에서 推捉하라는 거조가 있었음을 알고 본현에 자수하여 본도 관찰사의 공문을 받은 뒤

   에 발행하려고 하였다. 이때 마침 상여 행렬이 도착하였으므로, 잠시 나와 곡하고 조문하였다.

○김제 군수 鄭是先이 와서 부의하였고, 본 고을의 현감 徐敬祖는 忌故가 있다 하여 나오지 않고 부의만 하였다.

○저녁나절에 문인 郭橧ㆍ洪胄炳 형제ㆍ朴禧慶 등이 서울에서 加麻하고 와서 곡하며 맞이했다.

○李萬稷이 날이 저문 뒤에 와서 곡하였다.

○권익흥(權益興)이 상여를 따라 태인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13일(무인) 맑음.

날이 채 밝기 전에 朝奠을 올리고 발인하였다. 상여꾼은 금구의 선비들 중에서 조발하였는데, 수십 리를 가서 全州의 경계에 이르니, 전 군수 李益泰, 전 현감 柳德玉 등이 곳곳에 상여꾼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상여꾼을 교체한 다음 출발하였다. 정오가 되기 전에 參禮에 도착하여 아침상식을 올렸다.

 

○전주 경계에 이르렀을 때 회령부사 金汝歡의 상여 행렬을 만났다.

○삼례찰방 韓㙉이 나와 조문하였다.

○李德遠이 임소인 전주에서 加麻하고 와서 곡하였다.

○익산과 전주의 선비 수백여 명이 함께 와서 조문하였다.

○전주 유생 金在精이 祭文을 지어 가지고 와서 致奠하였다.

○午時에 소나기가 퍼부어 상여꾼과 상여를 뒤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비를 맞았는데 상주가 까무러쳤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안정

   되었다. 이로 인하여 즉시 발인하지 못하고 거의 저녁때가 되어서야 출발하였다. 상여꾼은 전 直長 蘇后山과 그 고을의 유생들이

  수백 명을 조발하여 반으로 나누어 중로에서 교대로 메게 하였다. 해 질 무렵 여산군에 도착하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

  었다.

○본 고을의 군수 洪天敍가 상여를 안치할 곳을 지정해 주었는데, 매우 좁고 누추하여 용납하기 어려웠고 대우하는 것이 다른 읍에

   비하여 매우 박하였다.

○竹林院의 유생 金以綋과 李徽著 등이 致奠하였다.


14일(기묘) 맑음.

동틀 무렵에 朝奠을 올리고 발인하였다. 상여꾼은 여산향교와 서원에서 조발하였는데, 辰)에 恩津縣에 이르니, 본 고을의 현감 윤혁이 즉시 나와 조문하였고 아침상식을 설비해 놓았다.

○본현의 鄕廳과 作廳(아전이 집무하는 처소)에서 각각 賻儀를 보내왔는데, 이는 상주가 일찍이 이 고을의 현감을 지냈기 때문이었

   다.

○연산현감 權宇亨이 이곳 은진으로 부의를 보내왔다.

○김비(金棐, 光山人, 許通)가 와서 조문하였다. 아예 밖에서 막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미처 알지 못해 그러지 못하였다.

○정오가 되기 전에 곧바로 발인하였는데, 상여꾼은 본현의 鄕中(座首나 別監 등 향청의 직원)이 승려를 조발하였다. 저녁을 먹을

   무렵 連山縣에 이르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는데, 본 고을의 현감이 즉시 나와 조문하였다.

○尼山縣監 李尙衡이 뒤 쫓아와 吊哭하고 갔다.

○北道의 문인 朱南老ㆍ朱宅正ㆍ張永紀 등이 맞이하여 곡하였다.

○李必益이 와서 곡하였다.


15일(경진) 새벽부터 비가 심하게 내렸다.

성대한 제물을 遯巖書院에서 설비하였다. 비 때문에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아침 늦게야 비가 조금 그치자 즉시 발인하였다. 상여꾼은 연산의 향교와 서원 및 돈암 마을에서 조발하여 3개 조로 나누어 교대로 메고 갔다. 鎭岑縣 경계에 이르니 그곳의 유생들이 곳곳의 길가에 상여꾼을 대기해 놓았다. 교체해 메고 嘉水院에 이르렀는데 서산군수 宋時杰, 直長 宋基學 형제, 淸安縣監 李德老 및 인근의 士友)4, 5백 명이 서로 모여 맞이하고 곡하였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후에 곧바로 출발하였다. 상여꾼은 佳莊 및 沙塢에서 조발하였는데, 佛峙에 이르니 李再馨이 또 동네 일꾼을

   조발해 놓아 교대하여 메고 갔다. 南礀에 이르니 날이 이미 저물어 전에 希文이 신병을 조리하던 집에 喪柩를 모시고 빈소를 차렸

   다.

○달빛을 따라 선생이 전에 소요하시던 곳을 돌아보니, 溪堂은 우뚝이 서 있고 초목이 무성하였다. 가슴이 찢어지고 창자가 끊어질

   듯 슬퍼져 자신도 모르게 목 놓아 통곡하였다.


20일(을유) 맑음.

관을 바꾸기 위하여 白達村의 社倉契에 있는 板材 가운데에서 품질이 좋은 것을 골라 관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24일(기축) 맑음.

申時에, 관을 바꾸는 예를 행하였다. 대렴은 전에 한 것을 그대로 두고 단지 베개ㆍ요ㆍ이불만을 바꾸었다. 관을 채울 때에는 明聖王后가 하사한 초록색 바탕에 紋紗가 있는 團領과 분홍색 바탕에 문사가 없는 단령 각 1벌과 參判 宋奎濂, 持平 權尙夏가 보낸 襚衣 각 1벌을 사용하였다. 板材의 값은 문인들이 가을에 갚기로 하였다.


7월 11일(을사)

丑時에 빈소를 열고 朝奠과 상식을 올렸다. 동틀 무렵에 관을 받들어 상여에 모시고 遣奠祭를 지냈다. 곧이어 출발하였는데 날이 밝기 전에 비바람이 번갈아 몰아치더니, 잠시 후에 개었다.

 

○상여꾼은 注山ㆍ馬山ㆍ沙峴ㆍ瓦旨의 네 마을과 白達材ㆍ大田ㆍ沙塢ㆍ草洞의 社倉契에서 조발하여 3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메고

   갔다. 東華洞에 이르니 李德遠 등이 개울가에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상구를 멈추고 잠시 쉬었다.

○金宙一ㆍ李德遠ㆍ趙相一)등이 각각 致奠하였다. 곧바로 발인하였는데, 상여는 백달촌의 상여꾼들이 그대로 메고 太峴까지 갔다.

   동화동ㆍ紫雲ㆍ新灘에서 교체하여 메고 達田에 이르니, 成楚柏이 개울가에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상구를 멈추고 점

   심을 먹었다.

○성초백과 林遇箕가 각기 치전하였는데, 임우기는 제문을 지어 올렸다.

○말에 먹이를 먹인 뒤에 동화동의 상여꾼들이 그대로 메고 東倉까지 갔고, 그곳에서 달전의 상여꾼이 교대하여 獨樂津까지 갔는데

   柳星彩가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상여를 멈추고 잠시 쉬었다.

○유성채 형제가 치전하였다. 강을 건넌 뒤에도 달전의 상여꾼이 그대로 메고 갔다. 해 질 무렵 燕岐에 이르렀는데, 날이 저문 뒤에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본 고을의 군수 李元齡이 鄕任에게 장막을 치고 기다리게 했다고 하였다.

○문인 黃世楨ㆍ宋元錫과 文義 儒生 吳再昌 등이 각자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였다. 李萬稷과 朴世周도 치전하였다.


12일(병오) 맑음.

날 샐 무렵에 朝奠과 상식을 올리고 곧바로 발인하였다 상여꾼은 유성채ㆍ이만직 등이 조발하였는데, 盲橋에 이르러 연기의 유생 朴璨 등이 상여꾼을 조발하여 교대해 메고 갔다. 松峙에 이르니 연기의 유생 崔有華 등이 또 조발해 두어 교대하게 하였다. 全義縣에 이르러 상구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본 고을 현감 洪受灃이 즉시 나와 조문하고 이어 치전하였는데 미리 장막을 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 곧바로 발인하였는데 상여꾼은 淸州의 木果洞에서 조발하였다. 德坪에 이르니 全義 출신 鄭以泰와 그

   고을 유생들이 곳곳에 기다리고 있다가 교대해 메고 갔다. 다시 10여 리를 가니 전 현감 金允厚가 또 상여꾼을 곳곳에 세워 놓아

   교대해 메고 가게 하였다. 天安郡에 도착하니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는데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본군의 兼官인 전의현감이 本縣의 下吏를 보내어 장막을 치게 하였다.

○전의현감과 그의 아들 禹翰이 상여를 따라 金川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문인 郭始徵이 자기 집에서 나와 상여를 맞이하여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였다.

○전 군수 徐漢柱가 아들 夢祖를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게 하였다.

○金輔臣이 와서 조문하였다. 전의 유생 수십 명이 돌아갔다.


13일(정미) 맑음.

새벽닭이 몇 차례 울자, 조전과 상식을 올리고 곧바로 발인하였는데, 상여꾼은 徐夢祖가 조발하였다. 아침밥을 먹을 때쯤 成歡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호남 사람인 金聖恪이 朴萬最란 자에게서 상여꾼 수십 명을 구해 中路에서 교대하게 하였는데, 이를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박만최란 자는 일찍이 師門에 죄를 얻은 자였다.

○성환찰방 尹晳이 즉시 나와 조문하였고, 전 都事 任弘益, 전 府尹 任弘望은 牙山에서 상여꾼 수십 명을 데리고 나와 기다리고 있

   다가 조문하였다.

○柳成宇 및 여러 유생들이 각각 치전하였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 곧바로 발인하였는데, 상여꾼은 鄭治와 부윤 임홍망 형제 및 인근의 여러 유생들이 1백여 명을 조발하여

   3개조로 나누어 교대로 메게 하였다. 葛院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 곧바로 발인하려고 하였으나 애당초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계획했기 때문에 상여꾼을 미리 뽑아

   놓지 않았으므로 즉시 출발하지 못했다. 崔遠ㆍ許璜 등이 한두 명의 상여꾼을 불러 모아 겨우 충원시켜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출

   발하였다. 振威邑의 앞 시냇가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가 다시 출발하여 해 질 무렵 淸淮에 도착하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상여 행렬이 진위읍 앞에 이르렀을 때에 본 읍의 수령 尹以復이 나팔을 불며 달려오다가 길에서 만났는데 靈車와 서로 가까워진

   뒤에야 샛길을 따라 지나갔다.

○날이 저문 뒤에 德普가 萬義에서 와 곡하며 맞이하였다. ‘장사의 모든 일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18일에 하관할 수 있으며 石灰는 청

   주 유생 卞東尹 등이 12냥을 주고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사서 16일까지 운반해 오기로 하였다.’고 전하였다.


14일(무신) 맑음.

첫닭이 울자, 朝奠을 올리고 발인하였다. 상여꾼은 인근의 여러 유생들이 조발하였는데, 십여 리를 가자 상여꾼들이 점차 빠져나갔다. 그래서 상여를 길옆에 세우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아침밥을 먹을 무렵에 만의(萬義)의 묘소 아래에 이르러 빈소를 설치하고 즉시 아침상식을 올렸다.

 

○李秀實이 外棺의 재목을 싣고 왔다. 서울에서도 이미 석회를 사서 운반해 오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하인 한 명을 보내어 중지

   하도록 하였다.

○오후에 상주와 여러 조문객들이 모두 장지로 가서 나무와 풀을 베고 穴을 정한 다음 어둘 녘에 돌아왔다.

○李遇輝ㆍ李秀儁등이 玄纁(장례 시 山神에게 드리는 검고 붉은 두 조각의 폐백)과 柩衣)및 木主를 준비하여 承碩을 시켜 미리 보내

   왔다.

○저녁때에 外棺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5일(기유) 바람이 불고 흐렸음.

날이 밝을 무렵 敍九와 柳星彩ㆍ閔鎭綱이 함께 산으로 가서 破土하고 土神祭를 지내고서 金井을 놓고 구덩이를 파려 하였는데, 黃延豐(연풍현감 黃世楨)ㆍ權持平(權尙夏)이 와서 보고는 잡아 놓은 穴의 위치가 너무 높다고 하여 그 아래에 다시 잡았다.

 

○해 뜬 뒤에 성대한 조전을 올렸다.

○문인 尹寀가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였다.

○금정을 놓고 파기 시작하여 한 자 남짓 내려갔을 때에 큰 돌이 나왔다. 저녁 무렵에 다시 몇 步 위로 올라가 금정을 놓고 穿壙하기

  시작하였다.

○李遇輝ㆍ李湛 등이 19바리의 人馬에 석회와 장례품 및 각종 祭用品을 싣고 왔다.

○李秀儁과 宋三錫 형제가 와서 곡하였다.

○청주 儒所에서 석회 값으로 9냥을 내놓았으나 되돌려 주었다.


16일(경술) 아침에 바람이 불고 흐렸음.

조반 전에 문인 이우휘가 치전하였다.

 

○아침상식을 올린 뒤에 문인 金潪ㆍ宋三錫ㆍ尹泓ㆍ李光周가 각각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였다.

○오후에 문인 李湛ㆍ이수준ㆍ이수실 등이 각각 치전하였다.

○문인 韓聖輔ㆍ李橝ㆍ洪萬選ㆍ洪重箕ㆍ洪得禹ㆍ趙楷 등이 와서 곡하였다.

○천광을 끝내고, 三物(석회ㆍ세사 ㆍ황토)을 체로 치고 흙과 莎草를 져 나르는 제반 일을 시작하였다.

○敍九) 조전을 올리고 곧 산에 가서 종일토록 일하는 것을 살폈다.

○오후에 宋炳夏가 懷川에서 뒤쫓아 왔다.

○이곳에 모인 여러 조객의 노비 1명씩을 뽑아 여러 가지 일을 나누어 시켰다.

○저녁때에 直長 宋基學이 三山에서 뒤쫓아 왔다.

○銘旌 하나는 谷雲(金壽增)이 八分體로 ‘華陽先生’이라고 썼는데, 이는 서울 사람들이 잘못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다

  시 딴 것을 준비하여 ‘尤庵先生’이라고 썼는데, 이는 洪得禹가 썼다.


도유사: 이수준ㆍ홍중기,

집례 : 권상하ㆍ정찬휘,

축: 민진강,

역군 : 이동형ㆍ유성채,

천광 축회: 이수실ㆍ홍주형,

삼물 섞는 일: 곽진ㆍ김창석ㆍ송형필,

세사와 황토 : 박희경ㆍ홍주화ㆍ김용겸,

부토: 곽병ㆍ김태손ㆍ오일휘ㆍ조광한,

사초: 허황ㆍ유억ㆍ임우기ㆍ홍주병,

조묘: 변동윤ㆍ오도현


17일(신해) 맑음.

날이 밝을 무렵 朝奠을 올렸다. 敍九가 즉시 산에 올라가 하루 종일 일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조반 전에 문인 韓聖輔ㆍ洪重箕 등이 각각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였다.

○조반 전에 外棺을 다 만들었는데 즉시 가지고 산으로 올라갔다. 조금 뒤에 구덩이에 내려놓고 灰를 다졌다.

○경향의 조객들이 잇따라 와서 곡하였다.

○문인 李橝ㆍ權尙夏ㆍ李光夏ㆍ李暻ㆍ韓永徽ㆍ李喬岳ㆍ鄭維漸ㆍ尹泓ㆍ姜宅揆ㆍ李喜朝ㆍ趙裕慶ㆍ金潪ㆍ鄭溫ㆍ張鼎顯ㆍ申啓澄ㆍ

   宋三錫ㆍ南宮迪ㆍ李翊亮ㆍ兪命健ㆍ兪命岳ㆍ鄭津ㆍ金昌直ㆍ趙鴻紀 등과 忠烈院 유생 李志儒 등이 각각 제문을 지어 가지고 치전

   하였으며 崔星瑞도 치전하였다.

○문인 兪命賚는 신병으로 오지 못하고 아들 廣基를 보내어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게 하였다.


18일(임자) 맑음.

첫닭이 울자 朝奠과 상식을 올렸다. 그 후에 曺寯卿이 제문을 가지고 치전하였다. 곧 빈소를 허물어 喪柩를 모시고 산으로 올라갔는데, 날이 아직도 새지 않았었다. 상구를 광중 서쪽에 모셔 놓고 卯時를 기다려 下棺하였다. 먼저 侇衾(널을 덮는 이불)을 덮고 명정을 바르게 펴고, 관 양쪽에 箑[주D-001]을 넣었다.

 

주인이 손을 씻고 玄纁을 받들어 축관에게 주니, 축관은 그것을 받들어 관 동쪽에 올렸는데, 위에는 검은색[玄]이었고 아래에는 붉은색[纁]이었다. 주인이하 여러 자제들은 차례로 광중 동쪽에 섰고, 문인과 여러 조객들은 차례로 광중 남쪽에 서서 각각 자기 위치에서 곡하고 곧 순서대로 광중에 가서 슬피 곡한 뒤에 물러났다.

 

○灰隔을 가하고 油芚을 덮은 뒤에 役夫를 불러 물에 갠 회를 밟아 채우게 하였다.

○洪受瀗ㆍ金世翊ㆍ柳尙咸ㆍ李東馣 등이 와서 곡하였다.

○회를 지면과 같게 다지고서 묘 옆에서 土神祭를 지냈는데, 헌관은 전 奉事 李範錫이었다. 제사를 마친 뒤에 글씨를 잘 쓰는 전 현

   감 金潪에게 명하여 靈幄에서 신주를 쓰게 하였다. 다 쓰자, 축관이 신주를 받들어 椅卓에 모시고 전을 올리고서 곧 返魂하였는

   데, 館舍에 돌아오니 때가 이미 정오였다. 우제를 올렸는데, 문인들이 모두 와서 참석하였고 몇 사람만을 남겨 두어 묘를 만드는

   일을 살피게 하였다.

 

○우제를 지낼 때에 가랑비가 약간 내렸다. ○下棺한 뒤에 경향의 조객 몇몇 사람이 먼저 돌아갔고, 반혼제를 지낸 뒤에는 과반수의

   조객들이 돌아갔다.

○해가 진 뒤에 일이 끝났으므로 일을 주관하던 사람들은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갔다.

○會葬한 천여 명의 조객들은 광중에 흙을 덮을 때에 마치 至親의 상에 곡하듯이 모두 목 놓아 통곡하였다.


19일(계축) 맑음.

날 샐 무렵에 재우제를 지내고 정오가 가까워져서야 반혼 길을 출발하였는데 서울의 조객들이 모두 인사하고 돌아갔다.

○振威縣 남쪽 安處重이 사는 마을에 당도하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20일(갑인) 맑음.

닭이 몇 번 운 뒤에 출발하여 葛院에 도착하였는데, 許楫이 와서 조문하였다.

 

○아침상식을 올린 뒤 출발하여 成歡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池萬朝가 와서 조문하고 돌아갔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 조금 쉬었다가 출발하였다. 天安 주막촌의 千善生의 집에 이르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朴文古ㆍ洪禹翰ㆍ具致兼 등이 와서 조문하였다.

○愁潭의 길가에 이르자, 燕岐의 士人 崔焌 등 세 사람이 와서 곡하고 상경하였다.


21일(을묘) 맑음.

첫닭이 울 때에 출발하며 동틀 무렵에 全義縣에 이르러 아침상식을 올렸는데, 아침상식은 전의 현감 洪受灃이 준비한 것이다.

 

○말에게 먹이를 먹인 뒤에 곧 출발하였는데 전의 현감이 松峙까지 따라왔다가 돌아갔다.

○午時에 燕岐縣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는데, 날이 너무 더웠으므로 조금 쉬었다가 출발하였다. 羅津에 이르자 柳星彩가 그의 자제

   들에게 천막을 치고 기다리게 하였으므로 잠시 쉬었다가 먼저 人馬가 건너고 나머지는 해 질 때에 건넜다. 成楚興ㆍ柳星斗가 따

   라왔다. 해가 저문 뒤에야 嗚灘에 이르러 저녁상식을 올리고 그곳에서 묵었다. 상주가 몸이 불편하여 저녁상식에 참석하지 못하

   였다.


22일(병진) 맑음.

새벽닭이 몇 번 운 뒤에 아침상식을 올리고 곧 출발하였다. 貞民에 이르자, 懷德의 유생 몇 사람들이 와서 맞이하였다. 정오가 되기 전에 南礀에 도착하였는데 모인 손님은 겨우 5, 60명밖에 되지 않았다.

 

○白達村의 사람들이 新灘으로 온다고 잘못 듣고 나루터에서 기다리다가 오후에야 돌아왔다.

○瑞山郡守 宋時杰 및 宋圭錫이 鳴灘에서 곧바로 沙塢의 喪次로 갔다가 오후에야 따라왔다. 그들이 온 뒤에 곧 삼우제(三虞祭)를 거

   행하여 제사를 마치니,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다. 조객들이 모두 갔다.

○文義縣令 趙之耘이 와서 조문하였다.


작년 초산(楚山 : 井邑의 별칭)의 慘禍 때에 黃江 權丈(권상하를 가리킴)께서 이 일을 기록한 것이 있는데, 지금 士正(閔鎭綱을 가리킴)이 기록한 것을 보니, 황강이 기록한 것과 약간 차이가 있으나 이는 기록함에 있어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사정의 정성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사실을 빠뜨린 것이 없지 않다. 그 당시 金吾(의금부 都事)가 명령하지 않은 것까지 지나치게 금지하였으므로 자제나 골육의 친척들도 임종할 때 참여하지 못하여 痛恨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는데 더구나 문인에 있어서 임에랴.


지난 6월 7일 선생이 잡혀서 정읍현에 도착하자, 권처경(權處經)은 군인들로 하여금 선생이 계신 곳을 포위하여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는 자제ㆍ문인ㆍ노복 등이 들어가 간호하는 것을 모두 허락하지 않았고, 다만 鄕所에게 명하여 간호하게 하였는데, 향소는 바로 任漢一이었다.

이때 선생은 성화같은 독촉에 급히 오느라 氣息이 가물 가물하여 경각(頃刻)도 보존하기 어려웠는데, 任君은 밤새도록 성의를 다해 선생을 부호(扶護=돕고 보호함)하였다. 날이 새려고 할 때에 임군은 자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군인들에게 지키는 것을 조금 풀어 주어 자제들을 들여보내 주기를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만일 자제들을 들여보낸 것을 허락한 일로 인하여 금오(金吾: 보초 근무자)가 죄책을 받게 된다면 내가 그 죄를 받겠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자제와 문인들이 모두 들어와 영결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선생은 손으로 임군을 잡으면서 감사해하며 말하기를 ‘그대의 高義에 대해 보답할 길이 없다.’고 하고는, 자제들에게 필묵을 후히 주어 은혜를 잊지 않는 뜻을 보이라고 명하였다. 8일 어명을 받을 때에도 선생을 부호하고 주선한 사람은 임 군이었고, 임종할 때 머리를 받들어 베개 위에 누인 사람도 임 군이었다.

 

李厚眞은 오직 임군의 분부와 지휘에 따라 자제와 문인들이 있는 곳에 왕래하면서 말을 전한 사람이었다. 이후진도 그 사이에서 정성을 다한 자이기는 하나 사정이 기록한 사실에는 이후진의 이름만 쓰여 있고 임군은 빠져 있으니, 어찌 진실을 빠뜨렸다는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만 전하는 말만을 근거로 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임군이 한 일은 지극하고도 근실하다고 할 만한데도 일을 기록한 자들이 모두 그의 성의를 자세히 알지 못하였으니,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은 임군의 처신은 더욱 가상하다고 할 만하다. 황강이 기록한 것에도 이후진이 했다고 쓰여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이 황강이 기록한 것을 보고 내가 보고 들은 것과는 다르므로, 의아하게 여겨 황강에게 여쭈어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喪中에 있었으니 보고 들은 것이 다른 사람이 자세히 알고 있는 것만 못할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여쭈어 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金錡를 만나 처음으로 당시의 일을 물어보니, 내가 보고 들은 것과 부합되었으므로 내가 보고 들은 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이에 사정이 기록한 사실 밑에 변증을 하고 우선 사정에게 질정을 부탁하는 바이다. [신미년 4월 일, 宋一源은 쓰다.]

 

年譜에는 사약을 갖고 온 都事의 성명을 말하지 않았는데 尹珍山이 기록한 것을 보니 李行道라 하였고, 그 당시 朝紙 일부를 보니 朴履寅이라 하였는바 무슨 까닭으로 이처럼 서로 다르단 말인가? 윤진산이 서울에 있었으니 반드시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지금 조지와 서로 다른 것은 혹시 이행도가 출발하려 하였는데 박이인이 불시에 출발했기 때문인가?

 

지금 우선 두 기록을 그대로 적어 두어 사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린다. 또 연보에 이르기를 ‘任漢一이 전날 밤부터 정성을 극진히 하여 선생을 扶護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貢生 李厚眞을 지휘하여 함께 부호하게 했다.’ 하였는데, 여기에 ‘이때에 이르러’란 말은 8일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祖考(宋一源을 가리킴)가 기록한 것이 正論인 듯하다. 당시 상황이 애통 절박하였고 비록 문인이라 하더라도 밖에 있었으니 어찌 내막을 상세히 알 수 있었겠는가.[甲申年 季秋에 宋煥世는 追記한다.]

 

稗林에 이르기를 ‘濟州에서 압송해 온 書吏ㆍ羅將은 白光立 - 그는 애꾸눈이었다. - 이었고, 사약을 갖고 온 도사는 朴履寅이었다. 서리ㆍ나장ㆍ도사들이 한 일은 차마 말할 수 없는데, 그중에서도 백광립의 사납고 극악스런 행동은 더욱 차마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박이인의 행동은 閔黯 등도 매우 그르게 여겼다.’ 하였다.


[주D-001]

삽(箑) : 장례 때 쓰는 물건으로 원래는 깃발로 만들어 부채 모양과 같았다 함. 후세에는 나무로 틀을 만들고 삼베나 깔 자리를 넣어 만들며 너비는 3척, 높이는 2척 4촌이고, 자루의 길이는 5척인데, 천자는 8개, 제후는 6개, 경대부는 4개, 士庶人은 2개를 각각 나누어 관의 양옆에 넣는다. 통상 삽(翣)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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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宋子大全續拾遺附錄卷之二 [日記] 

楚山日記 門人閔鎭綱錄

 

[己巳][六月]

初八日癸酉。晴。辰時。先生枕李厚眞肩而臥。氣息奄奄。若將垂盡。忽開眼視之而問曰。日勢早晩何如。厚眞對曰。早食時矣。又問曰。當以何時宣藥云耶。未及對而又曰。吾病如此。恐未及受命而死。似有促令進藥之意。瞑目須臾。又開眼曰。吾將盡矣。藥來何如是遲耶。厚眞使兩貢生。代其扶持。出來房外井上。則書吏羅將。方以燒酒合三種藥而煎之。始甚稠粘。厚眞謂曰。大監病患極重。雖冷水一匙。亦必二次分飮。決難進此藥矣。書吏輩相顧曰。此言是矣。復取三種藥。淡和如米飮。此時貢生出。呼厚眞曰。大監命入矣。厚眞卽入。扶抱如前。先生又開眼。問曰。日已晩乎。兒輩何在。厚眞對曰。都事權處經。令嚴。不得入來。故方在外矣。先生轉身微哂난001曰。何其甚哉。俄而。羅將入來曰。都事至矣。仍麾厚眞退出。厚眞曰。吾若退出。則大監無所支倚。其將柰何。都事入來。立於西楹廳上。而聞之曰。然則姑不退出。擁出末樓可也。此時先生氣息尤急。命在頃刻矣。書吏告於先生曰。自上賜藥。故方持藥而來矣。先生初不省聞。厚眞謂書吏曰。大監病患方急。不能省聞。宜近前高聲也。書吏稍進前。附耳更告。則先生卽動身起坐。命取上衣以來。仍復少倚瞑目。貢生覓直領於外。告而進之。先生擧臂命著。厚眞告曰。卽今氣力。決無穿衣之勢矣。先生以手攬取衣裾。加於胸上。厚眞悟其意。展衣加身。幷臥席。奉出廳上東偏。都事令校生。讀傳旨。先生以衣斂膝。瞑目而坐。若欲俯身者。讀過五六行時。先生忽開眼若傾聽者然。移時又如此。書吏就傳旨。以手指點。使校生。越五六行而遄讀。讀畢。先生復以手斂衣裾。仍暫俯身。醫官持藥三甫兒以進。先生飮訖。卽奉入房內。復枕厚眞。瞑目而臥。面上有暈氣若醉者。厚眞言於書吏。請臥之枕上。都事許之。厚眞卽奉首就枕。先生開口噓氣者三。因以氣絶。審藥入診屬纊。然後都事出去。都事出後巳時。發喪。子弟門人幷憑尸哭擗。申時以香湯沐浴。因襲衣。用四稱。上衣用深衣。李厚眞。卽井邑吏也。井邑倅權益興。聞都事權處經拿來時。百端侵困。別定色吏。使之看護。故厚眞終始扶護。詳言受命時事。不啻明白。渠亦有所記。故仍記此耳。


襲具

深衣 紗 裹肚 白紡紬 京來 飯含珠三 幅巾 玄段 勒帛 白紡紬 京來 黑履 唐鞋 大帶 紡紗紬 絛帶  質殺 廣織京來 網巾 玄段 白紬衫一 京來 白紬襦袴一 幎目 玄段 白紬單袴一 白紬襦赤古里一 握手 玄段 舒絹 藍紡絲紬 京來 玉色縷比中赤莫一 充耳  襪 白綿木 京來 草綠袷敞衣一 


諸執事 此一段。一本。退在大斂條之下。

護喪 黃世楨 祭服 朴世振 尹三擧 崔世慶 宋相淹 朴光一 李相吉 黃燫 治棺 李實之 鄭治 宋衡弼 林世章 執禮 權尙夏 林遇箕 趙鳴世 李遇輝 司書 郭檠 鄭纘輝 閔鎭綱 李湛 金器夏 祝 朴仲錫 朴重繪 金明錫 司貨 金重錫 權煜 金兌孫  


初九日甲戌。晴。朝前。門人李東亨,宋元錫,李遇輝,金昌錫,李秀實,兪命賚,閔鎭鋼等。來哭。○李遇輝,金昌錫,李秀實等。備送終諸具而來。馬憊難運。適逢長城 下吏 金重勳 自京持馬而歸者。輸致及斂。○巳時。井邑縣監權益興。以檢官暫入。臨視而出。○申時。小斂。衣用十二稱。上衣用晦翁致仕後所著衣制。○井邑縣監及長城縣監鄭齊泰,靑巖察訪尹以壽來弔。井邑,長城兩倅。皆致賻。○始治棺。棺材則井邑鄕任任漢一等。辦出。


小斂具

野服 上衣下裳大帶 草綠中赤莫一 洪主簿重箕 藍袷衣一 內賜 藍中赤莫一 成漣川虎祥 白紬縷比赤古里一 白紬中赤莫一 李監役秀實 藍紬縷比中赤莫一  白紬赤古里 李監役秀實 白紬縷比袴一又澣件一  白紬袴一 李監役秀實 草綠潞洲紬衾一 紞多紅潞洲紬 白紬敞衣一 金通津潪 玉色敞衣一 李楊根商翼 白紬闊縷比赤古里一  草綠中赤莫一  藍中赤莫一 李遇輝 白紬縷比中赤莫一 澣件 白紬中赤莫一 宋都事炳遠 白紬袴一  小斂布 縱九尺橫三尺五寸 京來


初十日乙亥。晴。朝食後。宋彝錫及門人閔泰重來哭。○午後。古阜郡守崔瑗來弔。仍致賻。○夕後。門人金萬增來哭。○先生遺敎。必令運喪。直歸萬義。喪主及 子弟門人。皆從治命。而宋瑞山난002以形勢之難便。姑欲歸殯于懷川。故日昏後。以其名告由于靈座。○全羅監司嚴緝致賻。○酉時。始大斂。衣用十稱。上衣用襴衫。亥時入棺。


大斂具

襴衫一  油綠廣織枕 京來 草綠綿中赤莫一 李永柔秀儁 玉色紬天衾 京來 李永柔秀儁 白紬敞衣一 玉色紬地褥 京來 白紬廣縷比厚綿赤古里一 玉色塗棺紬 京來 白紬綿赤古里一 斂布 上同 京來 草綠中赤莫一  平日落齒一封 玉色敞衣一 洪主簿重箕 落髮一封 草綠縷比中赤莫一 鄭鎭安治 手足爪甲 各一封 玉色縷比中赤莫一 徐安岳漢柱 終後落髮一囊 白紬縷比赤古里一  手爪甲一囊 白紬廣縷比綿袴一 足爪甲一囊  油綠廣織衾 無紞京來  


十一日丙子。晴。前夕。聞宋正時燾病急。宋瑞山時杰,宋直長基學兄弟及李淸,安德老,宋圭錫。曉頭先行成服。發向沙塢。○日出時。因朝奠。五服之人及諸門人皆成服。奠則本倅備行。○門人加麻。三年之制。林世章等四人。朞年之制。黃世楨等二十一人。九月之制。申啓澄等九人。七月之制。具致兼等二人。五月之制。李遇輝等二十三人。三月之制。崔世慶等六十三人。○泰仁縣監李益著來弔。○成服後。古阜郡守崔瑗,長城縣監鄭齊泰,井邑縣監權益興,靑巖察訪尹以壽等。復行相弔禮而去。○辰初。宋正亦以今初八日夕別世。訃書至。慘痛慘痛。○門人鄭洊。夜深後來哭。○聞李萬亨爲門生疏頭。朴世輝爲方外疏頭。初五疏上。而見阻喉司。終不得上徹。故退守闕門。爲號哭之擧。翌日。因政院之啓。有疏頭推治之命。朴則謂已發京口。向喪所。自刑曹移關本道及全羅道。使之隨所到。捉送。○長城倅復助若干饋奠之物。○井邑倅與其弟權益隆及其鄕任任漢一等。連日治喪。備盡誠力。○羅重器加麻來哭。


十二日丁丑。晴。昧爽。祇行朝奠。奉柩發引。擔夫則井邑多士。相聚調發。行到泰仁界。古阜多士。又爲點待於路左。替擔。日未午。至泰仁縣。行朝上食。○本倅李益著。卽爲出見。致奠致賻。且出米包。分諸隨喪諸人絶糧者。凡所以顧護者。極有情款。○秣馬後。卽發引 行。擔夫則泰仁多士。調出百餘名。分二次替擔於金溝界。日晡時。到金溝縣。行夕上食。仍止宿。○門人朴世輝到金溝縣。始知有自刑曹推捉之擧。自首本縣。將受本道方伯關文。然後發行矣。靷行適到。故暫出哭弔。○金堤郡守鄭是先致賻。本倅徐敬祖謂有忌故。不爲出見。祇致賻儀。○臨夕。門人郭橧,洪胄炳兄弟,朴禧慶等。自京加麻迎哭。○李萬稷。日昏後來哭。○權益興隨喪。到泰仁而歸。


十三日戊寅。晴。日未明。行朝奠。發引行。擔夫則金溝多士調出。行數十里。到全州界。前郡守李益泰,前縣 監柳德玉等。點立擔夫以待之。小停替擔。日未午。到參禮。行朝上食。○到全州界時逢,會寧府使金汝歡喪行。○參禮察訪韓㙉出弔。○李德遠自全州任所。加麻來哭。○益山全州士人數百餘人。相聚而弔。○全州儒生金在精。操文致奠。○午時驟雨。大注喪行及隨喪諸人。俱未免沾濕。喪主氣塞。移時乃定。以此不得。卽發引行。日幾夕始發。擔夫則前直長蘇后山與其鄕諸儒。調出數百人。分半替擔於中路。日落時。到礪山郡。行夕上食。仍止宿。○本倅洪天敍所定停柩之處。狹陋難容。凡所以見待者。視他邑甚薄矣。○ 竹林院儒金以紘,李徽著等致奠。


十四日己卯。晴。昧爽。行朝奠發引行。擔夫則自礪山校院調發。辰時到恩津縣。本倅尹卽出弔。備設朝上食。○本縣鄕廳作廳。各致賻儀。蓋以喪主曾經本倅故也。○連山縣監權宇亨。送賻至恩。○金棐來弔。初欲自外拒不納。未及知而不果焉。○日未午。卽發引行。擔夫則自本縣鄕中調發。僧食時到連山縣。行夕上食。仍止宿。本倅卽出弔。○尼山縣監李尙衡追來弔哭而去。○北道門人朱南老,朱宅正,張永紀等。迎來而哭。○李必益來哭。


十五日庚辰。自曉大雨。殷奠。自遯院備設。而以雨不能早行。日晏後雨勢少歇。卽發引行。擔夫則自連山校院及遯村調出。分三運替擔。至鎭岑縣境。鎭儒點立擔夫於路左替擔。至嘉水院。則宋瑞山宋直長兄弟,李淸安及隣近士友四五百人。相會迎哭。○秣馬後卽發引行。擔夫則自佳莊及沙塢調出。行至佛峙。李再馨又發洞軍替擔。至南磵。日已昏矣。奉柩成殯於希文所嘗調病之舍。○乘月顧瞻杖屨所嘗逍遙之處。溪堂巋然。草樹茂密。心摧腸裂。自不覺失聲而痛哭。


二十日乙酉。晴。爲改棺。擇取白達諸契板材中品好者。因始治役。


二十四日己丑。晴。申時行改棺之禮。大斂則因前。祇改枕褥及天衾。實棺時。用明聖王后所賜草綠有紋紗團領,粉紅無紋紗團領各一件及宋參判,權持平所襚衣各一領。板材價則諸門人待秋備償。


[七月]

十一日乙巳。丑時。破殯。因行朝奠及上食。昧爽。奉柩載轝。行遣奠。仍就道。日未明。風雨交作。差晩小霽。○擔夫則自注山,馬山,沙峴,瓦旨四村及白達村,大田,沙塢,草洞社倉契調出。分三運替擔。至東華洞。李德遠等。設依帳於川邊以待之。停柩少憩。○金宙一,李德遠,趙相一等。各致奠。卽發引行。白達諸軍仍擔。至太峴。東華,紫雲,新灘替擔。至達田。成楚柏。設依帳於川邊以待之。停柩晝點。○成楚柏,林遇箕各致奠。林則操文。○秣馬後東華諸軍仍擔。至東倉,達田軍替擔。至獨樂津頭柳星彩設依帳以待之。停柩少憩。○柳星彩兄弟致奠。渡江後達田軍仍擔。日落時。至燕岐。日昏後。行夕上食。仍止宿。○本倅李元齡言于鄕任使之設依帳以待云。○門人黃世楨及宋元錫。文義儒生吳再昌等。各操文致奠。李萬稷,朴世周。 亦致奠。


十二日丙午。晴。日未明。行朝奠及上食。卽發引行。擔夫則柳星彩,李萬稷等。調出。至盲橋。燕儒朴璨等。調出替擔。至松峙。燕儒崔有華等。又調出替擔。至全義縣。停柩晝點。○本倅洪受灃。卽出弔。仍致奠。且豫設依帳以待之矣。○秣馬後。卽發引行。擔夫則自淸州木果洞調出。至德坪。全義出身鄭以泰及其鄕儒生等。點立替擔。行十餘里。前縣監金允厚。又點立替擔。至天安郡。日未暮矣。行夕上食。仍止宿。○全義倅以本郡兼官。送其本縣下吏。使之設依帳。○全義倅與其子禹翰。隨喪到金川而歸。○門人郭始徵。自其家出迎。操文致奠。○前郡守徐漢柱送其子夢祖。操文致奠。○金輔臣來弔。全義儒生數十人。還去。


十三日丁未。晴。鷄數喚。行朝奠及上食。卽發引行。擔夫則徐夢祖調出。朝食時。至成歡晝點。○湖南人金聖恪。覓得數十名擔夫於朴萬最者。要擔於中路。而拒不許。蓋萬最者。曾所得罪於師門者也。○成歡察訪尹晳。卽出弔。前都事任弘益,前府尹任弘望。自牙山。率數十名擔夫。出待以弔。○柳成宇及諸生。各致奠。○秣馬後。卽發引行。擔夫則鄭治及任府尹弘望兄弟及隣近諸儒。調聚百餘名。分三運替擔。至葛院少憩。○秣馬後。卽欲發引行。而當初期以止宿於此。故擔夫不爲點待。崔遠,許璜等。稍稍招集。僅能充擔。日幾夕。始發。至振威邑前川邊。又少憩。日落時。至淸淮。行夕上食。仍止宿。○喪行到振威邑。前本倅尹以復。吹角馳來。遇諸道。與靈車相迫。然後從閒路過去。○日昏後。德普自萬義迎哭。仍傳葬事凡百。幾盡就緖。可及十八日而奉窆。石灰則淸州儒生卞東尹等。以十二兩。貿於數十里地。期以十六日運來云。


十四日戊申。晴。鷄初鳴。祇行朝奠。卽發引行。擔夫則 隣近諸儒調出。行十餘里。所擔軍稍稍出去。故停喪於路左。招集待日明。食時。到萬義墓下成殯。卽行朝上食。○李秀實備載外棺材而來。聞石灰自京又已貿置。方將運來。急送一力。使之中止。○午後。喪主及諸客。皆往所占山。伐樹刈草。占穴後。乘昏還來。○李遇輝,李秀儁等。備玄纁柩衣及木主。使承碩先送。○夕時始治外棺。


十五日己酉。風而陰。日明時。敍九及柳星彩,閔鎭綱偕往山。破土祠土神。且將開金井矣。黃延豐,權持平來見。以爲所占穴太高。改占於其下。○日出後。行殷奠。○門人尹寀。操文致奠。○開金井穿壙。過尺許。逢石患。日幾夕。復上數步而開金井。始穿壙。○李遇輝,李湛等。以十九馱人馬。運石灰。且備葬需及祭用凡物而來。○李秀儁及宋三錫兄弟來哭。○淸州儒所給石灰價錢九兩。推還。


十六日庚戌。朝風陰。朝前。門人李遇輝致奠。○朝上食後。門人金潪,宋三錫,尹泓,李光周。各操文致奠。○午後。門人李湛,李秀儁,秀實等。各致奠。○門人韓聖輔,李橝,洪萬選,洪重箕,洪得禹,趙楷等。來哭。○畢穿壙。始篩正三物之役及負土莎草諸役。○敍九行朝奠。卽上山。終日看役。○午後。宋炳夏自懷川追來。○抄出所會諸客奴各一名。分付諸役。○夕時。宋直長自三山追來。○銘旌一。谷雲以八分。書以華陽先生。洛下諸人。蓋有所聞之誤故也。改備佗件。書以尤菴先生。此則洪得禹筆也。


十七日辛亥。晴。日明時。行朝奠。敍九卽上山。終日看役。○朝前。門人韓聖輔,洪重箕等。各操文致奠。○朝前。畢外棺之役。卽舁而上山。差晩下壙。仍築灰。○京鄕諸客。隨續來哭。○門人李橝,權尙夏,李光夏,李暻,韓永徽,李喬岳,鄭維漸,尹泓,姜宅揆,李喜朝,趙裕慶,金潪,鄭溫,張鼎顯,申啓澄,宋三錫,南宮迪,李翊亮,兪命健,兪命岳,鄭津,金昌直,趙鴻紀等。忠烈院儒李志儒等。各操文致奠。崔星瑞亦致奠。○門人兪命賚。病不能來。使其子廣基。操文致奠。


十八日壬子。晴。鷄初鳴。行朝奠及上食後。曺寯卿操文致奠。仍卽破殯。奉柩上山。日尙不明矣。停柩於壙西。待卯時下棺。先覆以侇衾。整鋪銘旌。納箑於柩兩傍。主人盥手。奉玄纁授祝。祝奉以奠于柩東。上玄下纁。主人以下衆子弟序立於壙東。門人諸客序立於壙南。各居位而哭。仍以次臨壙盡哀而出。○加灰隔蓋。覆以油芚。召役夫。以泥灰躡實之。○洪受瀗,金世翊,柳尙咸,李東馣等。來哭。○築灰至平土。祠土神於墓左。獻官則前奉事李範錫也。禮畢後。命善書者前縣監金潪。題主於靈幄。題畢。祝奉置於椅卓設奠。仍卽返魂歸所館。日已午矣。行虞祭。諸門人皆來參。祇留若干人監視役事。○行虞時。微雨少灑。○下棺後。京鄕諸客若干人先歸。返魂後。散歸者過半。○日落時。畢役。幹事諸人。乘暮而歸。○所會客千餘人。當掩 壙時。皆失聲痛哭。如哭其至親。


十九日癸丑。晴。質明。行再虞。日幾午。發返魂之行。洛下諸客。皆辭歸。○行至振威縣南安處重村。行夕上食。仍止宿。


二十日甲寅。晴。鷄數喚。發行至葛院。許楫來弔。○行朝上食後。發行至成歡。晝點。池萬朝來弔而歸。○秣馬後。少憩。發行。至天安酒幕村千善生家。行夕上食。仍止宿。○朴文古,洪禹翰,具致兼等來弔。○至愁潭路邊。燕岐士人崔焌等三人。拜哭而上京。


二十一日乙卯。晴。鷄初鳴。發行。平明。至全義縣。行朝 上食。卽本倅洪受灃所設也。○秣馬後。卽發行。本倅隨行。至松峙而歸。○午時。至燕岐縣晝點。以日炎。少憩而發。至羅津。柳星彩預令其子弟。設遮帳以待矣。少憩。先渡人馬。日落時始渡。成楚興,柳星斗隨來。日昏後。至鳴灘。行夕上食。仍止宿。喪主氣不平。不得參上食。


二十二日丙辰。晴。鷄數喚。行朝上食。仍卽發行。至貞民。懷儒若干人來迎。日未午。至南磵。會客僅五六十餘人。○白達諸人。誤聞取路新灘。往待於津頭。日午後。還來。○宋瑞山及宋圭錫。自鳴灘。直往沙塢喪次。午後追來。來後卽行三虞。禮畢。日未暮矣。諸客皆散去。○文義縣令趙之耘來弔。


昨年楚山慘禍時。黃江權丈。有記事。今見士正所錄。則與黃江所記。略有同異。蓋互有詳略故也。士正之誠。可謂勤矣。然未免有失實之歎也。蓋其時金吾極肆令外之禁。雖子弟骨肉之親。不免有含痛抱憾於幽明之際。況門人乎。初七日。拿行到井邑縣。處經使軍人圍守下處。子弟門人奴僕。一皆不許入護。祇令鄕所看守。鄕所。卽任漢一也。時先生嚴程督迫。氣息奄奄。頃刻難保。任君終夜扶護。竭其誠心。將曉。任君聞子弟號呼之聲。令軍人少止防塞。許入子弟曰。若許入子弟。而金吾有罪責。則吾自當之。由是。子弟門人。皆得入訣。則先生手把任君謝曰。荷君高義。無以相報。仍命子弟。使之優給筆墨。以示不忘之意焉。初八日受命時。扶護周旋者。亦任君也。臨終時。奉首就枕者。亦任君也。李厚眞惟是受任君之分付指揮。而往來傳說子弟門人處者也。然厚眞。亦多有致誠於其閒者也。然士正之記事。祇書厚眞名字。而遺任君。則烏得無失實之歎也。蓋祇憑其傳言而記之故然也。任君之事。可謂至矣勤矣。而記事者。皆不知。其意尤可尙也。黃江所記。亦以李厚眞書之。故昔者。余嘗見黃江所記。而心訝其與余之所聞見者相左。欲以奉稟於黃江。而抑又思余之罔極中所見所聞。不如它人之相悉矣。終未之果矣。今見金錡。始問當時事。則與余符合。故始信吾之所見聞者不虛也。乃於士正所記之下。遂以卞證。而姑且請質於士正焉。辛未四月日。宋一源。記。


年譜。不言宣藥都事姓名。而得見尹珍山所記。則云李行道。又見其時朝紙一段。則云朴履寅。是何故也。尹珍山旣在京。則必無不知之理。而今與朝紙如是相左。抑或行道將發而履寅不時發去耶。今姑兩存。以俟考實。且年譜曰。任生漢一。自前夜已扶護先生。頗盡其誠。至是。又指揮貢生李厚眞。共相扶護。至是云者。指八日也。然則王考之所以記之者。似爲正論矣。事旣慟迫。則雖門人在外。何能詳知裏面事哉。甲申季秋。宋煥世。追記。


稗林云。濟州押來書吏羅將白光立。眇一目。賜藥都事朴履寅。書吏,羅將,都事輩所爲。固不可言。而白光立痛駭極惡之狀。尤不忍言。又云。履寅所爲。黯輩亦爲極非云。

 

 [난-001]哂 : 哂一作笑.  [난-002]山 : 一本山字下有時杰二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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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일기(第二) [朴光一]

기사년(1689, 숙종15)


6월 3일.

저녁에 선생의 행차가 선암역사(仙巖驛舍)에 도착하였다.


6월 4일.

새벽에 朴光一이 족질 朴重繪와 함께 달려와 선생을 뵈려 하였으나 의금부의 관리가 엄하게 지켜 들어갈 수 없었다. 이에 찰방 宋基德을 통하여 꿀과 미음을 올리면서 그 속에 別章을 넣어 선생께 들여보냈다. 조금 뒤에 內奴가 나와 말하기를 ‘대감께서 자리에 누워 신음하시다가 여러 가지 물건이 들어온 것을 보고 일어나 베개에 기대어 앉아서 꿀물과 미음 등을 조금 맛보시고는 오랫동안 글을 음미하셨다.’ 하였다.

 

선생이 宋修撰(宋疇錫을 가리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내가 죽을 날이 머지않았으니 士元(박광일)과 受汝(朴重繪)는 나를 따라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자, 송수찬이 아뢰기를 ‘사원과 수여는 이런 부탁을 안 하셔도 본래 따르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長城의 邸舍에서 묵었는데, 禁吏의 구박이 더욱 심하였다.

 

金吾郞은 바로 權處經이다. 날이 저문 뒤에 박광일이 송수찬을 보고 묻기를 ‘어떻게 해야 한 번이라도 들어가 선생을 뵐 수 있겠는가?’ 하니, 송수찬이 말하기를 ‘조부께서도 만나고 싶어 하시지만, 금리의 지킴이 이처럼 엄밀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밤이 깊은 뒤에 사랑채에 가 있다가 형편을 보아 들어가 뵙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였다. 이에 주인집에 물러 나와 있다가 야심해지기를 기다려 박중회와 함께 들어가 배알하고서 아뢰기를 ‘이번 일에 대해 선생께서 이미 마음에 결정하신 바가 계신 줄 압니다만 병환이 이처럼 위중하시니 어떻게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선생께서 이르기를 ‘며칠을 살지 못할 목숨이니 내가 오늘 죽더라도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매우 통분스러운 일은, 主上의 입장에서 보면 大妃와 中殿은 진실로 차이가 있지만 신민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 똑같은 國母이신데 지금 덕이 있고 잘못이 없으신 중전께서 저들에게 폐위를 당하셨으니, 애통 박절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또 앞으로 어떤 종류의 화가 있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뒤에 죽는 사람이 지금 죽는 사람보다 못할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또 ‘侍奉이 안녕하신가?’ 하고 물으시기에, 박광일이 ‘가친께서도 이곳에 오셨으나 禁防이 매우 엄하여 들어와 문안드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하자, 선생은 ‘존장께서도 수고스럽게 여기까지 따라오셨는가.’ 하였다.

 

가친이 그때 들어와 문안드리자, 선생은 아픈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씀하기를 ‘그동안 전후로 상종한 것은 매우 좋았던 일이었는데, 오늘 저녁의 대화가 바로 사생간의 마지막 이별이 될 것이니 매우 기이한 인연이오.’ 하였다. 그때 금리의 기찰을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곧바로 일어나 절하고 물러 나오면서 아뢰기를 ‘금리의 방수가 이처럼 엄밀하니 곧 물러나 돌아갔다가 내일 저녁에 다시 배알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선생은 ‘이처럼 서로 만나는 것이라면 아예 안 만나 보는 것이 낫겠다.’ 하였다.


6월 7일.

아침에 도사가 출발을 서두르자, 송수찬이 머물러 조리할 시간을 달라고 여러 번 부탁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박광일이 마침내 陪行하였는데 옛 長城의 주막에서 조반을 먹고 저녁에는 泉院驛舍에 당도하여 묵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별안간 賜藥都事가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금리가 끝내 떠날 것을 재촉하기를 심악스럽게 하여 선생의 병환이 더욱 위중해졌다.

 

宋 瑞山 이하 여러 사람이 뜰에 서서 머물 것을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이때 날은 이미 어두운 데다가 비까지 억수같이 내렸는데 횃불을 들고 급히 달려 2경에 정읍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師門의 자손들도 선생이 계신 곳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군사들을 풀어 지키게 하였으므로 박광일도 들어가 문안드릴 수가 없었다.


6월 8일.

새벽에 송수찬 부자가 들어가 영결하였고 자제들도 따라 들어가 영결하였으며, 持平(權尙夏)가 들어가 영결하였고 박광일도 들어가 영결하였다. 선생이 권지평에게 이르기를 ‘학문은 마땅히 朱子를 위주로 해야 하고 사업은 반드시 孝宗의 遺志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애통함을 참고 원한을 가슴에 새겨 절박한 마음을 갖는다.[忍痛含怨迫不得已]」는 여덟 글자를 명심하고서 동지들에게 전하여 지키도록 하여야 한다.’ 하고, 또 말씀하기를 ‘주자가 임종할 때에 直자 하나로써 문인들에게 말씀해 주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도 오직 이 한 글자뿐이다.’ 하였다.

 

이날 새벽에 금리가 사약을 내리려는 뜻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자손과 문생들은 모두 쫓겨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邑人 任漢一과 貢生 李厚眞이 함께 선생을 부호하였다. 선생의 기식이 가물가물하여 다시 몸을 일으켜 옷을 입을 기운이 없었으므로 옷을 펼쳐 몸에 얹고 臥席에 누우신 채로 받들어 대청 위로 나갔다. 도사가 校生으로 하여금 전지傳旨를 읽게 하였는데, 선생은 옷으로 무릎을 가리고 몸을 구부리고서 들으셨다. 도사가 드디어 약 두 사발을 드리자, 선생은 이를 다 마시고 그대로 베개에 누워 운명하셨다. 애통한 소식이 유림에 전해지자 사람들은 모두 실성통곡하였다.


6월 9일.

박광일이 들어가 곡하고 송수찬ㆍ권지평과 함께 喪禮를 치르는 일에 대해 의논하였다. 권지평이 말하기를 ‘선생께서 遺訓하시기를, 《家禮》를 위주로 하되 미비한 것이 있으면 《喪禮備要》를 참고하여 쓰라고 하셨다.’ 하기에 박광일이 ‘한결같게 유명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6월 10일.

들어가 곡을 하였는데, 권지평이 ‘선생이 유명하시기를, 公服을 쓰지 말고 深衣를 쓸 것이며, 다음에 襴衫을 쓰라고 하셨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하고 함께 소렴례를 행하였다.


6월 11일.

들어가 곡하고 成服禮를 행하였다. 복을 입은 문인들이 백여 명이었는데, 勉齋 黃氏(黃榦을 가리킴)가 朱子가 돌아가셨을 때에 입었던 服儀에 따라 白布巾을 쓰고 環絰과 素帶를 착용하였다.


6월 12일.

발인하여 懷德으로 향하였다. 大轝를 설치하지 않고 다만 竹格 위에 油芚을 덮어 가렸는데, 이는 선생의 유명에 따른 것이다.


6월 13일.

상여가 礪山에 이르렀다. 밤에 권 지평과 함께 비통한 마음을 달랬다.


6월 14일.

들어가 朝哭에 참여하였다. 상여가 連山에 이르렀다.


6월 15일.

興農 본가에 도착하였다. 빈소를 차리고 곡하고 영결한 후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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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宋子大全續拾遺附錄卷之二 [日記]

楚山日記[第二] 門人朴光一錄

[己巳]

[六月]

初三日夕。先生行次。到仙巖驛舍。初四日曉。光一與族姪重繪疾走。欲爲瞻拜。禁吏防守甚密。不得入。因宋察訪基德。以別章。納之蜜糜中。入送于先生。少頃。內奴出曰。大監方委席呻楚。見數件物入。始強起倚枕而坐。卽嘗蜜糜等小許。久吟紙上語云矣。先生以片紙。出送于宋修撰曰。吾死日不遠。士元,受汝。從行爲好。修撰報曰。士元,受汝。不待此請。而固將從行矣。是日。宿于長城邸舍。禁吏之驅迫愈甚。金吾郞。乃權處經云。日暮後。光一見宋修撰。仍問曰。何由得一入瞻拜耶。修撰曰。王父亦欲得見。而禁都之防守。若是 其嚴密。柰何。須於夜深後試到外舍。觀勢入謁似好。退歸主人。待夜深。與重繪。偕往入拜曰。此事固知先生已有所定。但病患如此。何以得達乎。先生曰。祇是數日之命矣。吾之死於今日。不亦宜乎。其所痛憤者。自上言之。則大妃與中殿。誠有閒矣。自臣民言之。則均是國母也。今有德無失之中殿。爲彼輩所廢。可勝痛迫。又未知更有何等禍機。恐後死者寧不如死於今日者之爲愈也。先生又曰。侍奉無恙否。光一曰。家嚴亦從行至此。而禁防甚密。末由入候矣。先生曰。尊丈亦辛勤追來耶。家親及時進候。先生強病起坐曰。先後相從。極是好事。而今夕對話。政是死生一訣。甚爲奇幸。時禁吏之譏察。有不可測。遂起拜。臨退俯曰。禁吏之防守。若是其嚴密。遽此退歸。明夜亦當圖入拜矣。先生曰。相見如是。不如不見。初七日朝。都事促發。宋修撰累乞留調。而不見許。光一遂陪行。朝飯於古長城酒舍。夕至泉院驛舍。將宿焉。俄聞賜藥都事將至。禁吏遂促發甚刻。先生患候倍劇。宋瑞山以下立庭請留。而猶不聽。時日已昏矣。雨下如注。帶炬疾馳。二更。始到井邑。師門諸子孫。使不得入。發軍牢守。光一亦不得入候。初八日曉。宋修撰父子入訣。諸子弟隨以入訣。權持平入訣。光一亦入訣。先生謂權持平曰。學問則當主朱子。事業則必遵孝廟遺志。而忍痛含怨。迫不得已八字。存諸胸中。同志之人。傳守勿失可也。又曰。朱子臨終。告門人以一直字。吾言亦不外此矣。是晨禁吏。以宣藥之意。入來子孫及門生。皆被驅出。不得在傍。邑人任漢一,貢生李厚眞。共相扶護。先生氣息奄奄。更無起身著衣之勢。故展衣加身。幷臥席奉出廳上。都事使校生讀傳旨。先生以衣斂膝。俯身而聽。都事遂進藥二椀。飮訖。因就枕而盡。痛纏儒林。人皆失聲。初九日。光一入參哭。與宋修撰,權持平。講治喪禮。權持平曰。先生遺訓。當以家禮爲主。而其未備者。以備要參用。光一曰。一遵遺命可也。初十日。入參哭。權持平曰。先生遺命。勿用公服。當用深衣。次用襴衫。是以用之。俱行小斂禮。十一日。入參哭。行成服禮。門人持服者百有餘人。而依黃勉齋服朱子儀。白布巾。加環絰素帶。十二日。發引。向懷德。不設大轝。祇加油芚于竹格而掩之。從遺命也。十三日。護至礪山。夜與權持平。共說悲抱。十四日。入參朝哭。護過連山。十五日。到興農本第。成殯哭訣而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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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산일기(第三)[金道器] 

기사년(1689, 숙종15)

6월 1일.

선생의 압송 행렬이 초산(楚山)에 도착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급히 말을 몰아 초산에 사는 이득영(李得榮)의 집에 가서 기다렸다.


6월 2일부터 5일까지

鄕中의 士友인 金璡ㆍ柳漢祥ㆍ金鰲柱ㆍ朴楚耉ㆍ朴漢耉ㆍ金璉ㆍ權穗ㆍ金益爀ㆍ申琨ㆍ洪禹錫ㆍ金元柱ㆍ金汝弼과 감찰 崔休, 영동현감 柳彬 등이 잇따라 와 모였으며, 興德의 黃載萬, 茂長의 庾錫輝도 왔다. 庾友는 金溝의 疏廳으로부터 왔는데 ‘상소를 가지고 가는 일행과 6일 礪山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고 하였다. 황혼에 別將 金錡가 長城)로부터 와서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여 장성에서 체류한다는 기별을 상세히 전해 주었다.


6월 6일.

조카 儁孫ㆍ義孫과 생질 禹命欽ㆍ禹鼎鑑과 懷川의 참봉 宋相抃과 그의 아들이 함께 모여 조반을 일찍 마치고 고개에 올라가 선생의 행차를 맞이하려고 하였는데, 頒藥都事가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그때의 창황하고 애통 박절하던 정황이 어떠했겠는가.


6월 7일.

本邑(정읍을 가리킴)의 현감 權益興이 그의 동생 및 座首 任漢一과 함께 와서 접대하는 절차에 대해 상의하였다. 이웃의 여러 집을 널리 차지하여 師門과 멀고 가까운 士友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李得榮의 집을 內應하는 곳으로 하고, 金愛龍의 집을 왕명을 받는 장소로 삼았다.

 

또 재간이 있는 李厚眞을 주인으로 가칭하여 미리 약물과 미음의 재료를 가지고 먼저 김애룡의 집에 들어가게 하였다. 또 동쪽과 서쪽의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대나무로 문을 만들었는데 이는 안팎이 서로 호응하여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려는 것이었다. 이날 산을 넘고 내를 건너 경황없이 길을 가다가 도중에서 光州의 朴光一ㆍ朴重繪, 長城의 金器夏ㆍ李實之, 淳昌의 金時瑞를 만났는데, 행차가 역원에서 머물지 않고 이미 출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하여 다시 돌아서서 오는데, 날은 이미 저물고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온갖 고생을 하며 숙소에 돌아오니 압송 행차가 잇따라 도착하였는데, 도사는 權德輝의 아들 權處經이었다.

 

처경은 성품이 몹시 괴팍하고 악독하여 제주에서 초산까지 오는 동안 자제들로 하여금 상견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온갖 구박과 곤욕을 주었다. 그는 밤에 급히 本官의 좌수 임한일을 불러 당부하기를 ‘군인들을 많이 데리고 가서 죄인을 철저히 지켜 실수가 없도록 하라.’ 하였다. 그리고 3경에 또 영을 내리기를 ‘날이 밝기 전에 출발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이것은 서둘러 몰아쳐서 泰仁으로 가려는 의도에서였다.

 

임한일이 앞장서서 들어가 선생의 병환이 위중해서 움직이기 어렵다는 상황을 말하니, 권처경은 사람을 시켜 서울에서 내려온 도사 朴履寅에게 세 차례나 서신을 보내어 속히 와서 사약을 내리라고 하였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문생ㆍ사우ㆍ자손들이 누구인들 한번 들어가 선생을 뵙고 싶지 않았겠는가 마는 금리들이 권처경의 명령에 따라 매우 포악하게 굴었으므로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할 수 없이 밤새도록 문밖에 서 있었다.

 

선생이 侍者에게 ‘내 자손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니, 임한일이 도사에게 달려가 병세가 위급한 상황을 말하고 자제 중 한 사람을 들여보내어 扶護하게 해 달라고 청하자, 권처경이 허락하였다. 임한일이 자제와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들어가자 금리가 쇠 채찍을 들고 마루 위에 올라가 임한일에게 욕을 하며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이때 임한일이 동요하지 않고 대항하여 말했으므로 우리들이 모두 들어갈 수 있었다.

 

선생은 敍九의 손을 잡고 行裝)속에 있는 필묵을 찾아 임한일에게 주라고 하시면서 ‘이 사람은 큰 은인이다.’ 하였고, 나를 돌아보며 손을 잡고 말씀하기를 ‘자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 하였다. 조카 兌와 趙善伯이 함께 들어가자, 조선백을 돌아보시면서 ‘시봉이 평안하신가?’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씀하기를 ‘자네들은 예법을 버리지 말라. 지금 예법을 경멸하는 집안을 보지 않았는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였다.

 

지평 권상하, 문의현감 金萬埈이 들어와 뵈었는데, 이때 나는 선생의 왼쪽에 있었다. 선생이 눈을 들어 말씀하기를 ‘우리나라의 전해 온 道統의 연원이야말로 분명한 것인데도 근래에 邪說이 마구 퍼지고 선비들의 취향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니, 자네들은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하였다.

조금 뒤에 금리가 소리쳐 금하자, 작은 병풍을 쳐서 바깥을 가렸다. 그 사이에 자손을 대하여 훈계하고 유언한 것이 한두 마디가 아닌데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었고 다만 ‘잊지 말라. 잊지 말라.’는 말씀만 들렸다. 이어 長城의 여러 어른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혹은 서명만 하고 혹은 반줄만 쓰고 혹은 겉봉만 쓰고는 서구에게 불러 주어 쓰게 하였다 黎明에 사람들이 모두 나왔다.


6월 8일.

날 샐 무렵에 모두 문밖에 모여 경황없이 망극할 때에 宣藥都事가 왔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오늘이 上弦이기 때문에 사약을 내릴 수 없다.’고 하면서 다시 들어가 영결할 것을 도모하였다. 그런데 선약 도사가 와서 곧 권처경과 함께 나팔을 울리며 안으로 들어가니 자손과 문도들은 문밖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도 모두 들어갈 수가 없어 슬피 울부짖기만 하였다.

 

도사가 대청 위로 올라가 방문을 활짝 열고 校生 李明達로 하여금 앞에서 傳旨를 읽게 하였다. 선생은 부축을 받아 방문 밖으로 나오려 하였으나, 나오지 못하고 손으로 시렁 위에 있는 直領을 가리켰다. 임한일이 급히 가져다가 선생의 어깨 위에 입혀 드리자, 선생은 친히 고름을 매고 小帶를 띠고는 무릎을 꿇고 부복하여 조용히 어명을 받았다.

 

이후진이 무릎을 꿇고 약을 올렸는데 반쯤 마셨을 때에 약물이 선생의 수염과 턱에 묻었으므로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 선생은 계속해서 약을 다 달라고 하여 다 마시니, 선생의 안색이 술에 취한 듯 훈기가 있었다. 이후진이 선생을 부축해서 베개에 누이고는 밖으로 나와 나를 재삼 부르며 ‘대감의 氣息이 가물가물한데 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잠시 후에 선생이 운명하셨으니, 참으로 통곡할 일이다. 문밖의 여러 유생들이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한참 후에 권처경이 먼저 나오고 박이인이 따라 나오자,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가 곡하고 皐復하였다.

 

이날 모여 곡한 사람은 연산현감 鄭纘輝), 덕산현감 崔世慶), 인동현감 柳星彩ㆍ柳星斗 형제, 연풍현감 黃世楨, 宋相淹ㆍ朴世振ㆍ林世章ㆍ李湛ㆍ權煜ㆍ金益熞이었고, 선생의 자손으로는 진안군수 殷錫, 수찬 疇錫의 4형제, 宋一源의 3형제, 그의 사촌 세 사람이었으며, 외손 尹周敎ㆍ權以鋌ㆍ權以鎭과 재종손 비안현감 宋彝錫, 별제 宋元錫과 外從 해남현감 郭櫓 형제와 생질 청안현감 李德老, 찰방 宋基德ㆍ宋基學이었다.

 

그리고 기타 멀고 가까운 곳에서 온 사람이 모두 백여 명이나 되어서 다 셀 수가 없었다. 李愛龍의 집 동쪽의 舊家를 호상소로 삼았다. 治棺은 趙鳴世ㆍ任漢一이었고, 집례는 정찬휘, 사서는 권욱, 사화는 尹三擧ㆍ李實之였으며, 나에게는 斂具와 祭奠 및 내외의 응대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는 내가 이 고을의 사정에 밝았기 때문이었다. 古阜 향교와 長城의 사우들은 부고를 내어 道內에 알렸다.


6월 9일.

조금 늦게 監役 李秀實이 경중의 사우 10여 명과 함께 의복과 제반 물품을 가지고 내려왔으므로 이곳 衙門에서 致賻한 質殺[주D-001]와 주단 등은 모두 쓰지 않았다. 그리고 염구는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었으니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오에 본읍의 현감에게 檢屍하기를 간청하였다. 효종이 하사한 貂裘의 안감 명주만을 떼 내어 單衣를 만들어 염하는 데 사용하였는데, 이는 선생의 유지를 따른 것으로, 이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또 上衣下裳의 복제를 썼으니, 이것은 朱子가 致仕한 뒤에 입었던 것이었다. 입관할 때에는 날이 어두워 촛불을 밝히고 하였는데, 관은 얇은 連板을 사용하였고, 염의에 사용한 주단은 모두 무늬가 없는 것으로 하였다. 대렴할 때에 사용한 이불은 수놓은 것을 썼는데, 이것은 연전에 어떤 사람이 장만하여 보낸 것으로 지평 권상하가 일찍이 선생에게 사용 여부에 대해 질문하였기 때문에 쓴 것이다.

 

충주의 鄭溫과 고창현감 申啓澄, 덕산현감 宋三錫 형제, 監役 金昌錫 형제, 僉正 金萬增, 삭녕군수 李東亨, 참봉 郭始徵, 全州의 서산군수 李益泰, 黃澗의 朴晦章, 공주의 閔鎭綱ㆍ李師顔ㆍ蘇漢圭와 옥천ㆍ영동ㆍ청주ㆍ연산ㆍ회덕 등지 및 道內의 선비들이 계속해 와서 모인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본도의 수령으로서 호상한 사람은 古阜의 崔瑗, 태인의 李益著, 장성의 鄭齊泰 등 세 사람뿐이었다. 宋時燾 어른이 별세했다는 凶音이 도착하였는데 지난 8일 별세하였다 하니, 화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됨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참봉 奇挻翼, 主簿 金宅三, 영동현감 柳彬이 왔고, 白光瑚의 아우 白光瑀가 왔는데, 여러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주저하는 사이에 미처 조문을 받지 못하자 그는 그대로 가 버렸다.


6월 11일.

성복 후에 곧 출발했어야 하는데, 장애되는 일이 많았으므로 출발하지 못했다. 선생이 운명하신 후부터 성복할 때까지 본 고을의 현감 형제는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제의 의리가 없는데도 반드시 성의를 다하려고 노력하였으니, 어찌 다만 슬픈 심정에서 한 것이었겠는가. 진실로 가상하다고 하겠다. 집주인 李愛龍과 李厚眞, 護喪色吏 柳時雨 및 상하 인원들이 모두 애통해하며 부지런히 힘써 시종일관 정성을 다하였다.


6월 12일.

일찍 출발하여 詩山을 향해 갔는데, 상여꾼은 官軍을 쓰지 않고 인근 士友들의 힘을 빌었다.


[주D-001]

질쇄(質殺) : 상례 때 소렴을 하고서 시체를 감싸는 물건임. 두 개의 자루 모양과 같은 것인데, 質은 시체의 윗부분을 감싸는 것이고 殺는 아랫부분을 감싸는 것이다.《禮記 喪大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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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宋子大全續拾遺附錄卷之二 [日記]

楚山日記[第三] 門人金道器錄

 

[己巳]

[六月]

初一日。聞師門拿行到楚山。急馬出待於楚山主人李得榮家。自初二日至初五日。鄕中士友金璡,柳漢祥,金鰲柱,朴楚耇,漢耇,金璉,權穗,金益爀,申琨,洪禹錫,金元柱,金汝弼,崔監察休,柳永同彬。相繼來會。興德黃載萬,茂長庾錫輝。亦來。庾友自金溝疏廳而來。疏行以初六日期會礪山云。黃昏。金別將錡。來自長城。詳傳先生病㞃。滯留長城之報。六日。家姪儁孫,義孫。禹甥命欽,鼎鑑兩兒及懷川宋參奉相抃,其子俱集蓐食。欲向嶺路迎候矣。聞頒藥都事下來。其蒼黃痛迫之狀如何。初七日。本倅權益興與其弟及座首任漢一來見。相議接待之節。廣占隣舍。以爲迎館師門及遠近士友之計。以李得榮家爲內應。以金愛龍家。爲受命之房。又使幹能人李厚眞假稱主人。預持藥物米飮之資。先入愛龍家。又撤東西籬藩。以竹作門。欲爲表裏相應救急之地。是日。川原途上。逢著光州朴光一,朴重繪。長城金器夏,李實之。淳昌金時瑞。聞行次不留驛院。已發遂復路。日已暮矣。暑雨滂沱。閒關還寓。行次繼到。都事權處經。乃德輝之子也。性甚怪毒。自濟州至楚山。不令子弟相見。驅迫困辱。罔有紀極。乃夜急招本官座首任漢一捧招曰。多率軍人守直。罪人勿失。夜三更。權又下令曰。未明發行。此欲驅迫促馳向泰仁之意也。任漢一挺身入告病重難動之勢。則權差人三次送書於下來都事朴履寅處。使之急急來到頒藥。門生與士友及子孫先期來者。孰不欲一番入見。而禁吏輩承令肆虐。亦甚怪惡。坌集諸員。達夜立門外。先生問侍者曰。吾子孫安在者三。任以病勢危急之狀。奔告都事。因請令子弟一人救。權許諾。任乃引子弟及諸人入。禁吏持鐵鞭上軒。叱辱任而禁入。任抗言不撓。我輩皆 得入。先生執敍九手。而索行中筆墨。使之授任曰。大是恩人也。顧我執手曰。君何能穿到此中耶。兌姪與趙善伯偕入。顧善伯曰。侍奉安乎。又謂諸人曰。諸君勿捨禮法。不見今時輕蔑禮防之家乎。甚無謂矣。權持平尙夏,金文義萬埈入拜。時我亦在先生之左。先生擧眼而言曰。吾東道統淵源之傳。不啻分明。而近來邪說橫流。士趨多岐。諸君於此。不可不審矣。小頃禁吏呵禁。以小屛遮外面。其閒對子孫訓戒遺言。不止一二。而聽不可瑩。但聞勿忘勿忘。仍書長城丈諸處簡札。或祇著署。或書半行。或祇書外面。令敍九執筆口授。黎明。諸員俱還出。初八日平明。俱聚門外。遑遑罔極之際。宣藥都事來。衆皆以此日上弦。不可施藥云云。方謀更入永訣矣。都事來。卽與權鳴螺入內。子孫與門徒在門外咫尺之地。俱不得入。發哀嗷嗷。都事入于廳上。洞開房門。使校生李命達讀傳旨於前。先生欲扶出房門外而未能。以手指架上直領。任漢一急取加肩上。先生親自結紐。因施小帶。跪俯席上。從容受命。李厚眞以藥跪進。飮至半。藥汁汚鬚及頷。左右以巾淨拭。先生連急索藥。飮盡。顏色如醺。厚眞扶以就枕。厚眞再三出來呼我曰。大監氣息奄奄。此將柰何柰何。俄頃之閒。性命已矣。痛哭痛哭。門外諸生。相持號慟逾時。權先出。朴亦繼出。諸員一時入哭復。此日會哭者。鄭連山纘輝,崔德山世慶,柳仁同星彩,星斗兄弟,黃延豐世楨,宋相淹,朴世振,林世章,李湛,權煜,金益熞,先生子孫鎭安修撰四兄弟,一源三兄弟,其從三人及外孫尹周敎,權以鋌,以鎭,再從孫宋比安彝錫,宋別提元錫,表從郭海南櫓兄弟,甥姪李淸安德老,宋察訪基德,基學。其餘遠近來會百餘人。而難以悉擧。以愛龍東邊舊家爲護喪所。治棺趙鳴世,任漢一。執禮鄭纘輝。司書權煜。司貨尹三擧,李實之。使我主看斂具,祭奠內外應待等事。蓋以慣於此鄕事情故也。阜鄕,長城士友。發文告哀道內。初九日差晩。李監役秀實與京中士友十餘人。持衣服凡具下來。故本衙所賻質殺紬緞等皆不用。而斂具一無所欠。可幸。及午。懇請本倅檢屍。孝廟所賜貂裘。但取內紬作單衣用斂。蓋遺志也。聞者莫不流涕。又用上衣下裳之服。此乃朱子致仕後所服也。入棺時。日昏秉燭。棺用薄板連材。斂衣紬緞。皆用無文。而大斂衾用文綉。此則年前有人備送者。而權持平尙夏曾已質問。故用之。忠州鄭溫及申高敞,宋德山兄弟,金監役昌錫兄弟,金僉正萬增,李朔寧東亨,郭參奉始徵,全州李瑞山益泰,黃澗朴晦章,公州閔鎭綱,李師顏,蘇漢圭。沃川,永同,淸州,連山,懷德等處及道內章甫相繼赴喪者千數。本道守令護喪。古阜崔瑗,泰仁李益著,長城鄭齊泰三人而已。宋正丈凶音亦至。以初八日捐世。禍不單行。而亦可異也。奇參奉挺翼,金主簿宅三,柳永同彬來,白光瑚弟光瑀來。而僉議不一。躊躇之際。未及受弔。而渠自旋歸。十一日。成服後。卽當發行。而事多所礙停行。易簀後至成服。本倅兄弟無親炙之義。而必欲盡誠。豈但窮途之意。良可尙也。家主李愛龍及李厚眞。護喪色吏柳時雨及上下人員。莫不哀號奔走。終始竭誠。十二日。早發向詩山。擔持不用官軍。借於隣近士友焉。  

 

[문헌자료 : 송자대전 송서습유 부록 제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