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금헌 박팽년선생가계도
(醉琴軒 朴彭年先生家界圖)
[성명] : 박팽년(朴彭年)
[생졸년] : 1417년(태종 17) - 1456년(세조 2)
[자] : 인수(仁叟)
[호] : 취금헌(醉琴軒)
[본관] : 순천(順天)
[시호] : 충정(忠正)
[기타] : 死六臣의 한 사람. 李瑢 등과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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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안생(朴安生)
의영고사(義盈庫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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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림(朴仲林)
대제학(大提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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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氏(金益生의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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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ㅣ----박팽년(朴彭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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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ㅣ 全氏(全彌의 女)
∥ ㅣ ㅣ
∥ ㅣ └--박헌(朴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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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ㅣ ㅣ----박순(朴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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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ㅣ ㅣ----여(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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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ㅣ └----여(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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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ㅣ 李公麟(경주이씨 팔별의 아버지)
∥ ㅣ 창평현령(昌平縣令)
∥ 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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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년(朴引年)
∥ ㅣ 정언(正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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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기년(朴耆年)
∥ ㅣ 수찬(修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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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년(朴大年)
∥ ㅣ 정자(正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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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년(朴永年)
∥ 문한(文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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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氏(李德培의 女)
作成者 : 野村 李在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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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七十一
회덕박선생유허비(懷德朴先生遺墟碑)
惟此興農村玉竹丘者。懷德縣治之南境也。自昔相傳以爲故平陽朴先生彭年之遺址也。其少北若干步。有石礎在稻田中。謂是先生蓮亭也。又其北幾百步。卽先生從父典農根之妻墓也。自其墓西去二里許石南村。朴宗多居之。卽先生從祖判官易生子孫也。自村而南十五里許公州遯頤洞。卽先生曾祖典書元象墓也。孝考朝。筵臣宋浚吉請命祠享于懷。上不以爲不可。下其事相臣李忠貞公厚源。引世祖大王萬世忠臣之敎。且據皇朝于少保故事。請施行之。顧以廷議不一而不果行。識者恨之。顧玆遺址荒茀堙廢。殆不可辨識。朱夫子所歎沼平臺傾。鞠爲灌莽。而樵兒牧子嘯歌躑躅於其上者。正謂是爾。以故鄕人惻愴。行路咨嗟。至有泣血者。夫使人心如此者。不知其何故也。縣之耆老章甫。懼彌久而彌失其處。立小石以識之。倘幸後日聖考之意。果行無閼。則豈無攘剔檿柘。起立門亭。以復其舊者乎。先生事蹟。略見於南秋江所記。欲知先生者。斯可考焉。時崇禎戊申四月二十二日。
▲박팽년선생 유허비각(朴彭年先生遺墟碑閣,)/소재지 : 대전시 동구 가양동 161-1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성삼문·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兪應孚)· 김질(金礩) 등과 함께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 해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을 모시고 명나라 사신들을 위한 만찬회를 창덕궁(昌德宮)에서 열기로 하자 이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즉, 왕의 호위역인 운검(雲劍)으로 성승(成勝)· 유응부· 박쟁(朴崝)을 세워 일제히 세조와 추종자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서 단종을 복위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날 아침에 세조는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갑자기 운검들의 시위를 폐지하였다.
이에 유응부 등은 거사를 그대로 밀고 나가자고 했으나, 대부분은 훗날을 기약하며 거사일을 미루자고 해 뒷날 관가(觀稼 : 곡식 씨를 뿌릴 때 왕이 친히 관람하면서 위로하는 권농 의식) 때로 다시 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함께 모의한 김질(金礩-安東人) 이 세조에게 밀고해 성삼문 등 다른 모의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그는 이미 성삼문이 잡혀가 모의 사실이 드러났음을 알고 떳떳하게 시인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그의 재주를 사랑해 자신에게 귀부해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 : 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해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했는데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 : 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그는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쟁·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버지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 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 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이와 함께 그의 어머니·처·제수(弟嫂) 등도 대역부도(大逆不道 : 도에 어긋나는 큰 역적)의 가족이라 해 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갔다.
단종 복위 운동이 있을 당시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은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겼다.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 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 줌)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그 뒤 1758년(영조 34) 다시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올랐다. 그러나 삼대가 화를 입은 멸문(滅門 : 가문이 없어짐)이어서 그에 대한 자세한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오늘날 전하지 않고 있다. 다만 ≪추강집≫의 사육신전이나 다른 글에 간헐적인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는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과 문종의 깊은 총애를 받았을 뿐 아니라,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명문(名文)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문집이 전하지 않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단종이 왕위를 잃게 되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대의를 위해 눈앞에 기약된 영화와 세조의 회유책을 감연히 거절하고 죽음과 멸문의 길을 서슴없이 걸어왔으니, 이와 같은 높은 절의는 오늘날까지 온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다. 그의 묘에는 그저 박씨지묘(朴氏之墓)라는 글만 표석(表石)에 새겨져 있다. 그 이유에 대해 허적(許積)은 “성삼문 등 육신이 죽은 뒤에 한 의사(義士)가 그들의 시신을 거둬 이곳 강남(노량진) 기슭에 묻었으며, 무덤 앞에 돌을 세우되 감히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저 ‘아무개 성의 묘’라고만 새겨놓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묘역은 1978년 사육신공원으로 단장되었으며, 장릉(莊陵) 충신단(忠臣壇)에 배향되었다. 또한 영월 창절서원(彰節書院) 등 여러 곳에 제향되었다. 그의 절의를 기려 소이열(宋時烈)이 지은 <회덕박선생유허비 懷德朴先生遺墟碑>가 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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