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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서 이집두(李集斗) 선생 간찰

야촌(1) 2013. 4. 5. 18:22

한성판윤과 공조. 예조판서를 지낸  이집두(李集斗), 1744(영조 20)1820(순조 20) 선생이 1818(순조 18)에 쓰신 서간문(書簡文)입니다.



크기 : 가로 42.3cm×세로 35cm 상태


파서 이집두(琶西 李集斗),

    [생졸년] : 1744(영조 20) 323일생1820(순조 20) 1230일 졸

 

조선후기의 문관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는 중휘(仲輝), ()는 파서(琶西) 또는 구학(臞鶴). 좌의정(左議政) 경억(慶億)의 현손으로, 서사 감역(筮仕監役) 진원(進源)의 아들이다.

 

1774(영조 50)에 진사가 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에 들어갔다.
그 뒤 이조좌랑(吏曹佐郞-正六品장령(掌令이조참의(吏曹參議-正三品대사성(大司成 : 正三品승지(承旨-正三品)를 거쳐, 강릉현감(江陵縣監-從六品)이 되었을 때는 상소하여 해폐(海弊군폐(軍弊세폐(稅弊삼폐(蔘弊) 등 네 가지 읍폐(邑弊)를 들고 그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어 대사간(大司諫 : 正三品) · 대사헌(大司憲 : 從二品) 과 외직으로 안동부사, 1798(정조 22)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從二品)가 되어 변방의 야인을 잘 다스렸고, 1800(정조 24, 순조 즉위주청부사(奏請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순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漢城判尹-正二品), 공조판서(工曹判書 : 正二品예조판서(禮曹判書 : 正二品)가 되고, 1810년 동지사(冬至使)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 從一品)로 치사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다. 당대 글씨로 유명했다. 경주이씨 시조 탄강 유허비(始祖 誕降 遺墟碑) 및 구강서원 강당기(龜岡書院 講堂記)도 선생의 글씨이다.

 

[참고문헌]

正祖實錄  純祖實錄  國朝榜目  慶州李氏金石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