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충신 이경선선생 묘

야촌(1) 2012. 5. 7. 01:01

↑제33대 이재정 통일부장관의 12대 조이기도 하다.

 

 

 

↑충신 예조참의 이경선선생 묘(산소뒤는 중부고속도로이다)

 

↑이경선선생 묘비/소재지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22-18

 

↑이경선선생 묘역(촬영 : 2012. 04. 22(일요일)

  좌측에 보이는  묘소는 참의공 이경선의 7대손 규오(圭五)와 배위 진주유씨 쌍분이다.

 

↑1730년(영조 6) 9월에 왕명으로 내려진 충신정려(忠臣旌閭) 원판(原版)

 

 

이경선 선생 충신 정려문 편액

 

 

1636년(인조 14) 1월 1일 남포 현감에 부임 재직 중, 그해 12월 9일 청나라 태종(2대) 홍타이지가 이끄는 14만의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포 현감 이경선은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도 근왕병의 참모관으로 참전, 경기도 광주 검천 전투(廣州 儉川 戰鬪)에서 적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 5월 26일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고, 1730년(영조 6년) 11월에 왕명으로 후손들이 살던 오늘날의 용인시 기흥읍 공세리 마을 입구에 충신 정려문이 세워졌었다.

 

그 후 왜정시대 일본의 조선인의 정신문화 말살정책에 의거 현판만 수습하고 소실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11월 진천군(김경회 군수)에서 공의 묘소 아래, 새로이 건립하고 현판은 12대손인 필자가 원판을 탁본해서 과거 진천중학교 교정에 서있던 천연기념 목인 후박나무로 주문 제작했다.

 

 

↑이경선 선생 충신 정려문 전경

 

↑충신정려문 후면 모습(건너편 보이는 묘소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보재 이상설선생 묘이다)

 

 

 

 

 

충신 이경선 선생 묘(忠臣李慶善先生墓)

 

[생졸년] 1600년(선조 33) 5월 2일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병자호란의 검천(儉川) 전투에서 전사(戰死)

[문과] 인조(仁祖) 11년(1633)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7위(10/33)/

[진사시]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증광시(增廣試) [진사] 3등(三等) 36위(3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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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33년(1600)~인조 14년(1636년), 조선 중기의 문신 , 본관은 경주. 아명은 경민(慶敏), 초명은 경징(慶徵), 자는 군선(君善), 호(號)는 남포(藍浦), 충익공 벽오 이시발(忠翼公 碧梧 李時發)의 아들이다,

 

인조 2년(16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진사(進士)가 되고,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에 오른 후, 인조 11년(1633) 계유 식년시(癸酉式年謗) 을과에 문과급제(文科及弟)하여, 교서(敎書), 교리(校理-正.從五品), 예조좌랑(禮曹佐郞-正六品),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正六品)을 역임한 후, 인조 14년(1636) 1월에 남포 현감(藍浦縣監) 겸 홍주 진관 병마 절제 도위(洪州鎭管兵馬節制都尉)에 제수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충청감사 정세규(鄭世規)가 이끄는 근왕병(勤王兵)의 참모관으로 출전, 경기도 광주(廣州) 험천현(險川峴/우리말은"머흔 천고 개"오늘날 경부고속도로 용인 죽전휴게소) 전투에서 청나라 태종의 매부인 양 굴리 장수의 12만 대군과 최후의 일각까지 격렬하게 싸우다 향년 36세로 장렬히 전사했다.

 

이듬해인 인조 15년(1637) 5월에 통정대부 예조참의(通政大夫 禮曺參議)에 증직 되고, 영조 6년(1730) 9월에 왕명으로 충신정려(忠臣旌閭) 가 내려졌다. 묘소에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찬(撰)한 묘표(墓表)가 효종 9년(1658) 7월에 세워졌고. 죽산 후인(竹山后人) 안형열(安亨烈)이 찬(撰)한 묘갈(墓碣)이 있다.

 

집필 : 이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