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족보(族譜)

마곡공파 족보 편집후기

야촌(1) 2011. 11. 25. 18:26

마곡공파 족보 편집후기

 

족보는 한 씨족의 혈맥을 이어주는 중요한 혈통의 정수요, 역사적인 것이다      

따라서 족보편찬은 일반서적 편찬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보학에 관한 상식뿐만 아니라 종파별 가풍을 숙지하고 있어야 함은 기본이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신구와 선후 상하간의 조화 과학문명의 발전등에 따른 세대간 위선개념의 갈등을 여하히 조화롭게 접목 시킬것인가 하는 것이 선별 과제인듯 하다. 따라서 족보는 서가에 장식용으로 진열하는 장서로서의 가치 이상으로 일상생활 도구로서의 족보가 되어야 하고 후손들의 도의심 앙양과 역사 바로 알기에 힘써야 함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그러므로 족보는 항시 가장 가까운 머리 맡에 있어야 하므로 경주이씨 마곡공 후손계보를 별책으로 발행하여 전종인 세대별 주소록 겸용으로 구상한 실용적인 족보를 축적편찬하게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장차 족보편찬사업의 효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손록계보인 파별 편집은 어린 학생들까지도 컴퓨터 조작이 용이하도록 횡서조판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일가 주소록으로 활용함으로써 조상을 숭배하고 당내지친은 물론 일가사이 계촌이 가능하도록 시도 하였다.

 

따라서 계대를 알기 쉽도록 항렬자를 이름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족보를 면밀히 읽어 보면 그 펼요성을 스스로 느낄수 잇을 것이다. 앞으로는 항렬자를 넣어 작명해 주기를 갈망하는 바이다. 그리고 족보에 대한 선인의 말씀을 살펴보면 족보는 존조돈종지의지 이니 조종지초 즉 일인지라 하였듯이 이번 파보에 등재된 후손 모두는 비조 소판공을 1세로 할때 21세 마곡공 한(같은) 할아버지 후손들이다.

 

파조이신 마곡공은 참으로 훌륭하신 조선조의 충신이시다.

조선조의 뚜렷한 절의 열사들은 단종과 세조때에 가장 많이 배출 되었으니, 충절의 표본으로 알려진 사육신과 생육신들일 것이다. 당시의 크고 작은 사람은 비단 사육신과 생육신만 이었으라.

 

이제라도 후손들은 파조 마곡공의 업적도 면밀히 살펴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탈위하자 당시 석성현감 마곡공은 부귀공명을 뒤로하고 오로지 한 임금만을 섬길뿐 이라는 선비의 절의를 지키신 만고의 충신중 한분이다.

 

마침내 단종이 참혹하게 피살되었으되 당시 상황은 신하로써 국복을 입을 수가 없어 삼마자가 있는 마전곡에서 여막살이로 심상을 입으신 절의충신임을 재차 명심해야 함은 자손된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따라서 이렇듯 깊은 뜻을 알고 보면 마곡공파보 편찬은 단순한 족보편집과는 차원이 다르리라,

 

이러한 위대하신 선조님들의 업적편찬사업을 충분히 수행할수 있는 편찬 위원장으로 만장일치 추대된 동우회장이 업무수행중 돌연 타계하자 그 빈자리가 너무나 크고 넓으니 오직 아쉬어할 뿐이다.

 

이에 천학비재한 자가 편찬위원회부책인 탓으로 규정에 따라 회장직무를 인수하고 보니, 중대한 족보편찬사업의 지속성 여부 또한 회의적 이었으나 오종의 위상을 고려할때 업무중단은 부적절한 방법이 있었기에 시공을 초월하고 모든 공사업무에 우선하여 동참봉사키로 다짐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중차대한 족보편찬 사업상 많은 갈등들이 연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난날의 선조업적을 살펴보건데 마곡공 후손들은 숭조정신이 월등하여, 이미 서기 1700년대 후반에 용암의 길지에 삼사당을 정성으로 세우고 현재 국보 제 110호로 지정된 익재선생의 영정을 충북 보은에서 모사하여 이미 봉안하고 향사 하기 시작하였었다.

 

이처럼 당시 통정공 휘 침 7대손인 종섭. 창섭.항섭. 태섭. 윤섭 5형제는 범인들로서는 엄두도 못내는 방대한 위선사업을 수행했던 것이다. 당시의 경제적 여건은 매우 열악했었음에도 투철한 숭조정신만은 필연코 후손들에게 고취 시키고자 희생. 봉사했을 것이다.

 

그럼으로오늘날의 후손들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이 선조 선양정신을 앙양해야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후 가덕 덕희 박사의 투철한 희생봉사정신과 지극한 위선지심으로 용암영당을 이전 신축하여 현재의 삼사당이 완공되었다.

 

이에따라 경주 표암제 다음으로 근엄하고 고상한 사당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으니 마곡공 소손인 종친들은 열헌공 중시조 후손중 작은 소파 일지라도 조손삼세의 위패를 봉안한 유종인 삼사당 수호의 주인이란 긍지를 가지고, 후손들에게 그 역사성을 계승해야함은 당연한 권리이면서 의무인 것이다.

 

한국의 영산인 양각산하 삼사당의 부속건물 예학관에는 종족의 계통을 수록한 보첩을 비롯 보학자료를 비치공람토록 하여 전종인의 학당이면서 보학의 보고가 되어 조상의 위업을 현양해야할 것이다.

 

주자가 가로되 선조의 선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지 않음에도 불효라 하였다.

우리 조상의 훌륭한 업적을 알리기 위한 이번 파보 편찬은 종친 개별 수단금없이 단지 각 소파별 분담금 만으로 이십여회의 편찬위원회를 개최협의 하면서 보규에 따라 편찬종사자는 환전 무 보수로 4년만에 출간되었다.

 

수단 원고정서를 비롯하여 업무추진에 조력해준 재성. 종창. 신우. 양우. 상원 상민외 임원 모두와 그리고 인쇄업무에 물심양면으로 적극 협조해 주신 조양인쇄사 김세환 사장님이하 기술사원들에게 지면을 통하여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완성된 보첩이 완전 무결할 수는 없으나 어느 족보보다도 더욱 뚜렷하고 명확하게 편찬하려고 1인 3역 하였고, 기사는 불편부당, 유가무감 원칙이었으며, 수단불응손록은 전보에 의거 생졸년과 이름만 수록하여 여백을 최소화 하였다.

 

편집을 마치고 나니 아쉬움이 허다하다. 이는 차기 편집진에 의뢰하기로 하지만, 특히 유형무형의 종유자산을 명확히 기록 보전할 필요성이 절실하며 명예만을 위한 책임자는 불여불재이며 끝으로 더욱 실용적인 병술보가 되고 활용도가 제고 되기를 기대한다. 말미에 소파별 부담금 내역을 부기하여 수단유사 임원제현에게 사의를 표한다. 

 

(2006년)

경주이씨 마곡공파

족보편집위원장 이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