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근대인물

애산 이인

야촌(1) 2011. 7. 4. 16:59

애산 이인선생 초상/▲ photo 4남 이정 제공

 

주간조선

[2146호] 2011.03.07

연재물

한국의 名家 <현대편>

 

⑧ 이인

독립운동가 변론 1500여건 투사들을 위한 투사 변호사

 

○ 다섯 살 때 사서삼경 배운 신동
○ 27세 때 한국인 유일 변호사 합격
○ ‘사상 사건’이면 무조건 무료 변론

○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모진 고문
○ 광복 후 검찰총장·법무부 장관까지
○ 전 재산 기증 한글회관 건립

 

  대대로 경주 산내면에서 살아오다가 애산이 태어나기 60여년 전 조부대(代)에 달성군 효목동으로 이주하였다. 애산이 태어나기 바로 전 해에 대구로 나와 살게 되었다.
   
   “애산의 조부 만당 이관준은 성리학자요 서예가였고, 부친 학포 이종영은 시문과 서예로 일가를 이루었다. 학포는 이조 말기 국운이 기울어감을 좌시할 수가 없어서 일찍이 ‘자강회’와 ‘대한협회’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했고 한때는 보성소학과 보성사, 보성관의 교주 대리로서 이들 단체의 경영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보성전문의 경영까지 맡기도 했다.”(‘얼음장 밑에서도 물은 흘러’ 정범석)


  애산의 부친은 일제 헌병대의 수사를 자주 받는다. 숙부 우재 이시영도 독립운동가로 계속 일경의 호된 추궁을 받곤 했다. 이분은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과 이름이 같고 또한 족친이므로, 독립운동가들은 서울의 ‘성재’를 ‘북시영’, 대구의 ‘우재’를 ‘남시영’이라고 구별하였다고 한다.

 

  애산의 부친은 이준 열사와도 친교가 있었다. 부친은 이준 열사가 헤이그평화회의로 출발한 후 그 집안을 계속 돌봐 주었다. 애산은 다섯 살 때부터 조부에게 사략통감, 사서삼경과 한시 작법을 배운다. 3년 후에는 신석우(조선일보 사장 역임)의 선친 신태휴가 설립한 달동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한다. 그는 성적이 뛰어나 선생들이 ‘신동’이란 별호까지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익힌 것은 책읽는 자세였다. 모두가 서당에서 책 읽던 대로 어른은 좌우로, 어린이는 상하로 몸을 흔드는 버릇이 남아 있어 선생은 학생들의 자세를 바로잡느라 애를 쓴 것이다. …

 

  이 시절 어린 나이로 지금 생각해도 당돌했던 것은 치렁치렁 꼬아내렸던 내 뒷머리를 부모와는 상의도 없이 잘라버린 것이었다. 내 생각에 머리를 깎고 다니는 사람들이 시원해 보이고 편해 보여서 나도 그리 했을 뿐인데….”(‘애산 이인’ 최영희 김호일)

 

 

 

  애산은 1913년 도쿄로 유학하여 세이소쿠(正則)중학에 입학한다. 부모 몰래 나와서 출판사의 교정 일로 학비를 마련한다. 이때까지도 집을 나올 때의 검은 두루마기 한복과 맥고모자 차림 그대로였다.

 

  이듬해 일본대학 법과 야간부에 입학하고 이어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과 2학년에 편입하여 낮과 밤으로 한꺼번에 두 대학을 다니게 된다. 애산이 법률을 전공하게 된 것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고 독립투사의 변호를 전담하는 등 합법적인 항일투쟁의 수단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즈음 애산은 일본의 인기잡지였던 ‘제3제국’에 ‘조선인의 고정(苦情)을 세계에 호소한다’는 기고문을 통해 일제 총독정치가 착취와 기만으로 우리 민족을 노예화하려는 포악성을 폭로하였다. 때문에 잡지가 발매금지됐음은 물론이고 애산도 일본 경시청에 매일 호출되어 가혹한 문초를 받았다.

 

  당시 김성수·안재홍·장덕수·유억겸·신석우·최남선·서춘·홍성하·신익희·변희용·이광수 등 많은 사람들과 교유했다. 애산이라는 아호는 부친이 지어준 것이다. 애산이 방학 중 일시 귀국하였을 때 부친이 “옛글에 ‘인자는 애산이요, 지자는 요수(樂水)라’ 했으니 호를 애산(愛山)이라 하라”고 하였다.


  그는 1917년 귀국 후 조선상업은행에서 근무하다가 곧 그만두고 3·1독립만세운동 때는 숙부인 우재의 항일운동을 돕기도 한다. 이때 애산은 지도를 가지고 다니며 삼남의 유림들과 연락을 취하다가 수배를 받자 다시 도쿄로 건너갔다.

 

  그곳 사법성에서 실시하는 일본 변호사시험에 27세 때 합격했다. 당시 일본 전국에서 4000명이 응시했으나 합격자는 70명이었고 그중 한국인은 애산 혼자였다. 애산이 한국인 최연소자로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것은 1923년 5월이었다.

 

  이후 민족운동가, 독립지사들이 투옥된 이른바 ‘사상 사건’이면 발벗고 무료 변호에 나섰다. 1942년 일본의 소위 진주만폭격 때까지 24~25년 동안 13도를 다니며 수많은 법정에서 일제 판·검사와 대항하며 싸웠다. 그 수는 무려 매년 80~90건으로 모두 1500여건에 달하며 사건 관련자만도 1만여명이 되었다.


  애산이 변론한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의열단 제1·2사건, 신의주 민족투쟁사건, 광주학생사건, 고려혁명당사건, 안창호사건, 수양동우회사건, 송진우·안재홍·여운형·신일용 등 필화사건, 서울민중대회사건, 칠산혁명당사건, 원산노동쟁의사건, 형평사(衡平社)사건, 6·10만세사건, 수원고농(高農)학생사건, 대전신간회사건, 이동수의 이완용 암살계획사건, 사이토 총독 암살미수사건 등....


  이런 일로 해서 애산은 세칭 ‘사상 변호사’ 혹은 ‘혁명 변호사’로 명망을 쌓아 1931년에는 일인 변호사들과는 별도로 조직된 조선변호사협회의 회장이 되었다. 같은 해 유명한 원산부두노동쟁의 사건이 일어났다. 1000명의 부두노동자 대 일제 자본가의 노동쟁의가 달아올랐다.

 

  그는 조선변협에서 이 사건의 조사위원으로 파견되었다. 노동자 수천 명이 원산역 구내에서 농성하면서 정당한 노임을 요구했다. 애산은 이들 앞에 나서 ‘일제 자본가 타도’를 절규하는 격려연설을 하여 박수 갈채를 받았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엄숙하고도 존귀한 것이다. 누구도 우리의 생존권 보호를 침해할 수는 없다. … 우리 노동자들의 요구는 가장 당연할 뿐 아니라 누구라도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일이요, 만일 이를 막기 위해 인권 유린이 있을 경우 전체 변호사들은 이를 묵과 않겠다.”(‘애산여적’ 1집)


  이 노동쟁의는 세계 각국 노조에서 격려의 전문이 답지하는 등 굉장한 반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그는 변호사의 입장에서 많은 노동자들의 투지를 북돋워 주었으며, 일제의 인권유린을 통박하였다. 그때부터 왜경은 그를 더욱 가열한 요시찰인으로 낙인 찍었다.


  이보다 앞서 애산은 1926년 6월에 광주지법에서 열린 형평사 사건 공판에 김병로·이창휘 변호사 등과 함께 가서 변론했다. 이는 특정직업(백정)을 천시하는 계급사상 타파를 부르짖으며 민족해방운동을 벌이던 이 단체의 회원 600여명이 검거되고, 이 중 40여명이 구속 기소된 사건이었다.

 

  법정에서 기록을 뒤적이던 그는 피고인들의 조서가 모두 같은 날짜로 작성되어 있고 한 경찰관이 하루에 작성할 수 있는 분량이 50장 정도인데도 850장까지 작성한 사실을 발견했다. 사건을 급히 날조하느라 기록을 고치도록 지시한 부정지까지 조서 사이에 그대로 남겨 놓기도 하였다. 변호인단은 날조된 사건의 확증을 들이대 결국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여름 대구 은행파괴 모의사건 공판 때는 일제의 고문 사실을 들어 궁지로 몰아넣기도 했다. 이는 상하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구 조선은행의 금고를 깨뜨리려 했다는 사건으로 관련 피고인이 30여명이나 되었다. 애산은 자리가 비좁아 피고인석 옆에 바짝 붙어 앉아있다가 피고인들의 몸에서 이상한 상처 자국을 발견하게 되었다.

 

  손가락 사이가 마치 종기를 앓고 나서 딱지가 떨어진 자리처럼 보였다. 목덜미에 멍든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 한 피고인에게 꼬치꼬치 캐물으니 검사와 경찰관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실토했다. 애산은 공판 도중 일어나 “고문 당한 사실이 분명하니 피고인들의 옷을 벗겨 검진해 보자”고 재판부에 요구했다.

 

  재판장은 공판을 계속하려 했으나 한 피고인이 용기를 내 웃옷을 훌렁 벗어버리자 다른 피고인들도 다투어 옷을 다 벗는 바람에 공판정은 순식간에 ‘나체쇼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검사는 휴정(休廷) 후 애산에게 “눈감아 주면 알아서 잘 처리해 주겠다”고 사정했으나, 애산은 끝까지 고문 사실을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의 중재로 가까스로 대폭 낮춰 2~7년을 구형했다. 

 

 

▲이인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손자 관, 손자 준, 4남 정, 며느리 정춘자, 손자 황, 손자며느리 전성아씨. photo 이수완 전 홍익대 교수

 

  애산은 후진들을 제대로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여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1924년 동덕여학교 학감이던 이상수가 애산을 찾아와 여학교를 창설하려하나 마땅한 장소가 없다고 하였다. 마침 이 무렵 보성고교가 이전하고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애산은 이 집을 50원에 빌려 이상수와 함께 경성실천여학교를 공동설립하였다. 1926년에는 인력거꾼들을 위해 계동 산비탈에 조그마한 집을 빌려 글방을 차린 일도 있었다. 이에 감동한 고창환이 재산을 털어 오늘의 대동상업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구한말 참정대신을 지낸 한규설 선생께서 별세하기 1년 전(1930년)쯤 선친에게 유언장 작성을 의뢰해 오셨대요. 그분의 재산은 1000석쯤 됐는데, 부친께서는 그중 3분의 1은 부채정리에, 3분의 1은 가족생활비로 남기고, 나머지는 교육사업에 쓰도록 권유하셨대요.

 

  그 재산을 경성여상에 희사하여 오늘의 서울여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우리 아파트에 인접한 무악재에 자리잡았었지요.”(넷째 아들 정씨의 말)


  이즈음 애산은 고당 조만식의 맥을 이어 조선물산장려회장직을 맡았고 ‘신흥조선’이란 일간지도 발행하면서 국산품 애용운동을 활발하게 벌인다. 1932년에는 김용관의 제의로 조선발명가협회를 창설하여 ‘과학입국’의 초석을 다진다. 이밖에도 조선양서관 등을 설립하여 우리 문화의 연구와 조사 저술 출판진흥에 힘썼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져 애산도 12월 23일 새벽 경기도 경찰부로 끌려갔다. 그는 한글학자는 아니지만 그 회원으로 학회 비용을 지원해 오다 연행되어 함흥경찰서로 이송됐다. 일제가 날조한 그의 죄상은 그동안의 교육·문화·학술 지원 등 모든 사회활동을 엮은 것이었다. 브뤼셀에서 열린 전세계약소민족대회에 김법린을 파견한 것까지 포함시켰다. 일제의 고문은 처절했다.


   “형사들은 조금만 말이 엇갈리면 무조건 달려들어 마구 때리는데, 한번 맞고 나면 한 보름씩 말을 못하였다. 이때 앞니 두 개가 빠지고 나머지 어금니는 온통 욱신거리고 흔들렸다. 몽둥이건, 죽도건, 손에 잡히는 대로 후려갈기니 양쪽 귓가가 찢어졌다.

 

  한번은 엄지손가락을 뒤로 젖히는 바람에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가 쭉 찢어져, 이후로 귀는 쪽박귀가 되고 손가락은 완전히 펼 수 없게 되었다. … 그중에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아사가제’라는 것과 ‘비행기 태우기’였다. 두 다리를 뻗은 채 앉혀 놓고 목총을 두 다리 사이에 넣어 비틀어대는 것이 ‘아사가제’이다.

 

  사지를 묶은 사이로 목총을 가로질러 꿰넣은 다음, 목총 양끝을 천장에 매달아 놓고 비틀거나 저며 돌게 하는 것이 비행기 타기이다. 두 가지 중에 더욱 괴로운 것이 ‘아사가제’로, 나는 이로 인해 평생 보행이 부자유스러울 만큼 다리를 상했던 것이다.”(‘애산여적’)
   
  애산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법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선고 전에 이미 폐에 이상이 생겨 함흥도립병원에 나와 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나 경기도 양주에서 정양하다가 광복을 맞는다.
   
  8·15 광복 이후 애산은 대법관이 되어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역임하고 이듬해 검찰총장이 된다. 1948년 정부 수립 때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내각회의 의장에 추대된다. 하지만 많은 일을 하던 중 이승만 대통령과의 불화로 퇴임한다. 이듬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반민특위위원장으로 활동한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돼 반독재 투쟁을 벌인다. 1960년 4·19가 터지자 애산은 각계인사 68명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체포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경고문을 발표한 뒤 서상일과 함께 이를 내각에 전달하기도 한다. 그는 이어 참의원으로 당선된다.

 

  5·16 군사정변 후에는 야당 원로로서 야당통합을 위해 힘쓰기도 한다. 또 유언을 통하여 집을 포함한 전 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하여 한글회관을 건립하게 한다.
   
  애산은 1979년 4월 5일 서울 논현동 자택에서 별세, 사회장으로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북양리 선영에 안장된다. 애산은 제주 고씨 고경희와 사이에 6남2녀를 낳았다. 맏아들 옥(玉·작고)씨는 파리대학 교수로 글로벌한 시각으로 고구려사를 조명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옥씨는 3남매를 남겼다. 맏아들 홍(53·파리대 졸업)씨는 인하대 교수이며, 차남 준(46·파리대 졸업)씨는 김&장 로펌의 국제변호사로 조부의 맥을 잇고 있다. 딸 귀령(43)씨는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애산의 차남 춘(작고)씨는 아들 만(41·사업)씨와 맏딸 미령(50·미국 거주), 차녀 미현(38·주부)씨를 두었다. 애산의 3남 영(작고·포항제철 전무 역임)씨는 3형제를 두었다. 맏아들 관(43)씨는 제일기획 팀장이고, 차남 담(41)씨는 클라디 사장이고, 3남 찬(40)씨는 선덴스컴 사장이다.
   
  애산의 4남 정(76·연세대 불문과 명예교수)씨는 3남매를 두었다. 아들 황(43)씨는 삼성SDI 과장이며, 맏딸 애령(45)씨는 민속박물관 학예관, 차녀 선령(39)씨는 선주어리공예 대표이다. 애산의 5남 강(74·사업)씨는 아들 원(41·세종대 음대 교수)씨, 애산의 6남 균(72·사업)씨는 순령(41·현대미술관 학예사)씨, 단(39·경인냉장 이사)씨 남매를 두었다. 애산의 맏딸 혜경(작고)씨의 남편은 신한민주당 부총재를 지낸 이태구씨다.
   
  “가정교육이 엄해서 15살 때까지 잘못을 저지르면 시말서를 쓰게 하셨고, 시말서가 여러 장 쌓이면 종아리도 맞았지요.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크리스마스 카드도 속을 뜯어내고는 종이를 붙여서 다시 사용하게 하셨고, 봉투도 뒤집어서 다시 쓰셨지요.”(아들 정씨와 손자 준·관씨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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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애산 이인

 최종고 서울대 법대 교수
   
   애산 선생은 투옥된 독립지사나 민족운동가가 관련된 사건에 무료변론을 자청하여 일제 판·검사와 맞서 싸웠던 분이다. 또 광복이 되어서는 대법관, 검찰총장이 되어 치안유지와 좌익분자 소탕에 전념하였고, 법전편찬위원장을 맡아 법전 편찬에 주력하였다,
   
   그분은 제헌국회의원, 3대 민의원, 초대 참의원을 두루 역임하면서 민주주의 수호와 민권 회복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경제·사회·문화 면에도 조예가 깊어 약관 때부터 수많은 논문·평론·수필 등 각종 글을 발표해 왔다.
   
   40여년간 법률가 생활을 해오면서 일제 때는 항일 법정투쟁에 앞장섰고, 일제 말에는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돼 모진 고문을 받아, 그후 평생 보행이 어려울 정도로 다리를 상하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권 때는 반독재투쟁을 하며 정직·청렴·결백으로 시종일관한 정치가이자 지도자의 한 분이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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