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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윤 묘지명(李陽允 墓誌銘)/고려시대

야촌(1) 2011. 5. 17. 13:55

[연대]1157(고려 의종 11)   
[유형/재질]유형/재질  : 금구명·종명    
[문화재지정]국보    
[소재지] 한국(개인소장)  
[서체]해서체(楷書體

[찬자/서자/각자 ]오세공(吳世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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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양윤(李陽允, 선종 11~의종 11, 1094~115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 공눌(恭訥)은 검교소부소감을 역임했는데, 어머니가 경주 호장(慶州 戶長) 최상선(崔常善)의 딸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그의 집안은 경주의 향사(鄕吏) 가문으로부터 서울로 진출해간 것으로 보인다.

 

이양윤(李陽允)은 처음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뒤 대학(大學)의 경덕재생(敬德齋生)으로 들어갔고, 이후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리가 된 뒤 그는 인종 때 묘청(妙淸)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의종 때에는 왕이 베푼 연회에서 시()를 잘 지어 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이양윤 묘지명은 향리 가문출신의 인물이 국자감시-대학-과거라는 정통 경로를 밟아 관리가 되는 모습과, 묘청의 난이나 고려의 군신연회(群臣宴會)의 장면 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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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우사간 지제고 이공묘지명

  (故 右司諫 知制誥 李公墓誌銘)

공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옛 이름은 부()이다.

그 선조는 경주(慶州)인으로, 아버지 공눌(恭訥)은 지위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에 이르렀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같은 고향의 호장(戶長)인 상선(常善)의 딸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리하였고, 생김새가 웅대하였는데 예닐곱 시절부터 책을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지었다. 24세에 진사제(進士第)에 응시하고 3년 뒤에 대학(大學)에 들어가 경덕재생(經德齋生)이 되었는데, 문장과 논의(論議)가 다른 선비보다 뛰어나서 매번 고시를 치를 때마다 여러 번 좋은 성적으로 뽑혔다.

 

재학한지 4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상복을 벗자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과거(春官-예부시)에 급제하였다. 공의 나이 34세인 인종(仁宗) 재위 6년에 처음 공주통판(公州 通判)이 되었는데, 부임한지 1년 만에 서경(西京) 사람들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왕명을 받고 부임하였다.

반란에 임하여 대동강(大同江)에 흙을 쌓고 성을 공격하면서 활과 돌을 무릅쓰며 거의 서너 차례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였다.

 

반란이 평정되자 그 임지로 돌아갔다가 임기가 끝나자 서울로 돌아와 집에 머물면서 다만 책으로 스스로 즐길 뿐 일로서 권세가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에 임명되지 못하고 거의 8년간 산관(散官)으로 지냈다.

 

처음 서대비원녹사(西大悲院錄事)에 제수되고 1년 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으로 바뀌었으며, 1년 뒤에는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한림(翰林)2년간 있은 뒤 천우위녹사(千牛衛錄事)로 옮기고, 지금의 임금(의종)이 즉위한 4년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자 즉시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어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 장야령(掌冶令)으로 발탁되었다.

 
천덕(天德) 36월에 임금이 강안전(康安殿)에 거동하여 석류꽃을 감상하면서 금내(禁內)의 유신(儒臣)들을 불러 운()을 정하여 부()를 짓게 하였는데, 촛불에 금을 긋고 시간을 정하였다.

 

공은 이에 붓을 들어 글을 지으니 뜻이 기념할 만하였으므로, 천자(天子)가 그것을 보고 무연하게 칭찬하며 이에 방()을 붙여 독보(獨步)라고 하고 상을 크게 내렸다.

 

이듬해 봄에 마침 오교(五敎)의 대선(大選)이 있자 특별히 공을 불려 감독하게 하고, 이윽고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로 삼았다. 그해 겨울에 시지후(試祗侯)로 옮기고, 전주목통판(全州牧通判)으로 나갔다가 재임한 지 3년 만에 대영령(大盈令)으로 옮겼다가 이전과 같이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가 되었다.

 

복명(復命)한 지 몇 달 뒤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그해 가을에 서경(西京)에서 분대(分臺)가 되었으며, 그 해 겨울에는 특별히 우사간지제고(右司諫 知制誥)가 되었다.

 

올해 여름에는 임금이 대금(大金)의 사신에게 잔치를 궁궐에서 베풀자 공이 그 연화에 참석하였는데, 밤에 독한 열병(熱病)에 걸려 몇 달 동안 앓다가 가을 85일에 집에서 사망하였다.

 

그 달 16일에 경성(京城) 동쪽 대덕산(大德山) 서북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공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따뜻하여 기쁨이나 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두 차례 외관지방관을 역임하면서도 한 결 같이 관대함과 어짐으로 다스리니 향리와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고, 고과(考課)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받았다.


공은 처음 좌사낭중(左司郎中) 이환(李還)의 딸과 결혼하여 21남을 낳았다.

큰 사위 박전(朴佺)은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이고, 작은 사위 양문형(梁文炯)은 내시 동대비원녹사(內侍 東大悲院錄事)이다.

 

아들 혁()은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공이 가장 사랑하였는데 6, 7세에 날마다 수백 마디의 시를 암송하더니, 21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이때 나이가 23세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슬픔이 매우 지나쳐 곁에 있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치르면서 나에게 지()를 부탁하므로 나 또한 공의 생질(甥姪)의 아들[離孫]로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명()을 짓는다.

 

당당 하도다 이공(李公)이여, 뛰어 나도다 높은 덕이여
몸을 다스리고 행동을 삼가 절약하고 검소하고 정직하여
충성으로 임금을 보위하고 문장으로 나라를 빛내었도다.
재주는 뛰어났으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았으나
후손들이 많으니 어찌 좋은 일이 없지 않겠는가.
애오라지 이 명()을 지어서 그 무덤을 기리노라.


정풍(正豊) 2(1157 고려 의종 11) 정축[强圉赤奮若] 8(壯月)

장사랑 군기주부동정(將仕郞 軍器注簿同正) 오세공(吳世功)이 삼가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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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본 글자]


(1) 故右司諫知制誥李公墓誌銘
(2) 公姓李氏諱陽允古諱敷其先慶州人也父恭訥位終檢校少府
(3) 少監母崔氏同鄕戶長常善之女公生而敏悟體貌魁岸自丱角
(4) 之時好讀書著文二十四歲擧進士至三年入大學補經德齋生
(5) 文章論議卓冠諸儒每於考試屢中高第在學四年丁父憂免服
(6) 除乃從外學擢第於春官時公年三十有四乃 仁宗御宇之六
(7) 年始除公州通判蒞任一年而西土人不靖公承 命赴難及於
(8) 大同江積土攻城冒獨矢石幾至於死者再三事平乃還其任及
(9) 秩滿還京退居里第唯以文書自娛不以干謁爲事故久不得調

(10) 置散八始補西大悲院錄事一年改爲奉先庫判官又一年授
(11) 直翰林院罷☐☐也在翰林二年稍遷千牛衛錄事時今 上卽
(12) 位之四年也聞其悲行卽召入內侍省居無何擢授掌冶令天德
(13) 三年夏六月 上御康安殿賞石榴花仍召禁內儒臣占韻賦之
(14) 刻燭爲限公乃援筆立成詞義紀(?)命天子覽之憮然可歎乃牓
(15) 爲獨步賞賚尤厚之明年春適有五敎大選特詔公監之尋拜權
(16) 知閤門祗候其年冬以試祗候外補全州牧通判在任三年改授
(17) 大盈令依前權知閤門祗侯復 命數月擢拜監察御史其年秋
(18) 詔分臺於西京至其冬特拜右司諫知制誥至今年夏 上讌大
(19) 金使於大內公侍讌終夜因中毒熱寢疾累月至秋八月五日卒
(20) 于私第以是月十有六日葬于京城東大德山之西北麓公爲人
(21) 純厚溫良喜怒不形於色兩任外官而皆以寬仁爲理吏民便之
(22) 課爲理最公初娶左司郎中李還之女生二女一男長婿朴佺時
(23) 爲禮賓注簿同正次婿梁文炯內侍東大悲院錄事男名赫聰警
(24) 絶倫尤爲公所愛年六七歲日頌數百言二十一歲擧進士一科
(25) 時年二十有三而公亡哀毁過甚傍人爲之殞涕及至葬乃請予
(26) 誌之予亦公之離孫不敢牢讓乃爲銘曰
(27) 堂堂李公 顯顯令德 修身慎行 節儉正直 忠以衛 上
(28) 文以華國 才高命薄 位不至極 藏孫有後 善慶何哉
(29) 聊記此銘 表其塋域
(30) 時正豊二年歲在强圉赤奮若壯月將仕郞軍器注簿同正吳 世功 謹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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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자소개]

 

오세공(吳世功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고창(高敞)으로, 조부는 오첨(吳瞻)이고, 부는 오질(吳質)이다. 고려 17의종(毅宗) 때 청주목장서기(淸州牧掌書記)19대 명종 조(明宗朝)경상도안찰사(按察使)를 역임(歷任) 하였다. 동생인 오세문(吳世文), 오세재[吳世才,1133(인종 11)~미상]와 함께 삼형제가 모두 문장의 대가였다.

 

[참고문헌]

大東韻府群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