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1157년(고려 의종 11년) [찬자/서자/각자 ]오세공(吳世功) ------------------------------ 이양윤(李陽允, 선종 11~의종 11, 1094~115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 공눌(恭訥)은 검교소부소감을 역임했는데, 어머니가 경주 호장(慶州 戶長) 최상선(崔常善)의 딸이라고 되어있는 것을 볼 때, 아마도 그의 집안은 경주의 향사(鄕吏) 가문으로부터 서울로 진출해간 것으로 보인다. 이양윤(李陽允)은 처음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한 뒤 대학(大學)의 경덕재생(敬德齋生)으로 들어갔고, 이후 과거에 급제하였다. 관리가 된 뒤 그는 인종 때 묘청(妙淸)의 난을 토벌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고, 의종 때에는 왕이 베푼 연회에서 시(詩)를 잘 지어 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이양윤 묘지명」은 향리 가문출신의 인물이 국자감시-대학-과거라는 정통 경로를 밟아 관리가 되는 모습과, 묘청의 난이나 고려의 군신연회(群臣宴會)의 장면 등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 ■ 고 우사간 지제고 이공묘지명 (故 右司諫 知制誥 李公墓誌銘) 그 선조는 경주(慶州)인으로, 아버지 공눌(恭訥)은 지위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에 이르렀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같은 고향의 호장(戶長)인 상선(常善)의 딸이다. 재학한지 4년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상복을 벗자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과거(春官-예부시)에 급제하였다. 공의 나이 34세인 인종(仁宗) 재위 6년에 처음 공주통판(公州 通判)이 되었는데, 부임한지 1년 만에 서경(西京) 사람들이 난을 일으키자 공은 왕명을 받고 부임하였다. 반란에 임하여 대동강(大同江)에 흙을 쌓고 성을 공격하면서 활과 돌을 무릅쓰며 거의 서너 차례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하였다. 반란이 평정되자 그 임지로 돌아갔다가 임기가 끝나자 서울로 돌아와 집에 머물면서 다만 책으로 스스로 즐길 뿐 일로서 권세가에게 아첨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에 임명되지 못하고 거의 8년간 산관(散官)으로 지냈다. 처음 서대비원녹사(西大悲院錄事)에 제수되고 1년 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으로 바뀌었으며, 또 1년 뒤에는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었으나 파직되었다. 한림(翰林)에 2년간 있은 뒤 천우위녹사(千牛衛錄事)로 옮기고, 지금의 임금(의종)이 즉위한 4년에 그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자 즉시 내시성(內侍省)으로 불러들어 거리낌 없이 지내다가 장야령(掌冶令)으로 발탁되었다. 공은 이에 붓을 들어 글을 지으니 뜻이 ☐ 기념할 만하였으므로, 천자(天子)가 그것을 보고 무연하게 칭찬하며 이에 방(榜)을 붙여 독보(獨步)라고 하고 상을 크게 내렸다. 이듬해 봄에 마침 오교(五敎)의 대선(大選)이 있자 특별히 공을 불려 감독하게 하고, 이윽고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로 삼았다. 그해 겨울에 시지후(試祗侯)로 옮기고, 전주목통판(全州牧通判)으로 나갔다가 재임한 지 3년 만에 대영령(大盈令)으로 옮겼다가 이전과 같이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侯)가 되었다. 복명(復命)한 지 몇 달 뒤에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고 그해 가을에 서경(西京)에서 분대(分臺)가 되었으며, 그 해 겨울에는 특별히 우사간지제고(右司諫 知制誥)가 되었다. 올해 여름에는 임금이 대금(大金)의 사신에게 잔치를 궁궐에서 베풀자 공이 그 연화에 참석하였는데, 밤에 독한 열병(熱病)에 걸려 몇 달 동안 앓다가 가을 8월 5일에 집에서 사망하였다. 그 달 16일에 경성(京城) 동쪽 대덕산(大德山) 서북쪽 기슭에 장례 지냈다. 두 차례 외관지방관을 역임하면서도 한 결 같이 관대함과 어짐으로 다스리니 향리와 백성들이 편하게 여기고, 고과(考課)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받았다. 큰 사위 박전(朴佺)은 예빈주부동정(禮賓注簿同正)이고, 작은 사위 양문형(梁文炯)은 내시 동대비원녹사(內侍 東大悲院錄事)이다. 아들 혁(赫)은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 공이 가장 사랑하였는데 6, 7세에 날마다 수백 마디의 시를 암송하더니, 21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이때 나이가 23세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슬픔이 매우 지나쳐 곁에 있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 장례를 치르면서 나에게 지(誌)를 부탁하므로 나 또한 공의 생질(甥姪)의 아들[離孫]로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명(銘)을 짓는다. 당당 하도다 이공(李公)이여, 뛰어 나도다 높은 덕이여 장사랑 군기주부동정(將仕郞 軍器注簿同正) 오세공(吳世功)이 삼가 짓는다. ------------------------------------------------------ [탁본 글자] (10) 置散八☐始補西大悲院錄事一年改爲奉先庫判官又一年授 -------------------------------------------------------------------- [찬자소개] ●오세공(吳世功) 생몰년은 미상이다. 본관은 고창(高敞)으로, 조부는 오첨(吳瞻)이고, 부는 오질(吳質)이다. 고려 17대 의종(毅宗) 때 청주목장서기(淸州牧掌書記)와 19대 명종 조(明宗朝)에 경상도안찰사(按察使)를 역임(歷任) 하였다. 동생인 오세문(吳世文), 오세재[吳世才,1133년(인종 11)~미상]와 함께 삼형제가 모두 문장의 대가였다. [참고문헌] 大東韻府群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