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공(靈芝公 ) 휘(諱) 용좌(龍佐)행장(行狀)
영지공(靈芝公)의 11대조 상서공(尙書公)은 상서공파(尙書公派)의 파조(派祖)이시다.
公의 12代祖 諱 세기(世基), 號는 송암(松巖), 시호(諡號)는 문희(文僖),고려 충렬왕(高麗忠烈王)때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부사(密直副使), 대제학(大提學) 검교 정승(檢校政丞)을 지내셨다.
公의 6代祖 諱 성무(成茂), 成宗때 중직대부(中直大夫) 안동대도호부판관(安東大都護府 判官)을 지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로 贈職 되셨다. 영지공(靈芝公)의 고조(高祖) 휘(諱)는 항복(恒福)이시고 호(號)는 백사(白沙)이시며 시호(諡號)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백사(白沙) 오성대감(鰲城大監)은 선조임금(先祖林檎)으로부터 임진왜란(壬辰倭亂)시 임금을 잘 모시고 국난(國難) 수습한 공로(功勞)로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의 표창과 오성 부원군(鰲城 府院君)의 존호를 제수(除授) 받으셨다.
주요관직은 도승지(都承旨), 도원수(都元帥), 병조판서(兵曺判書),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셨고, 또한 청렵결백(淸廉潔白)한 관리(官吏)에게 주는 청백리(淸白吏)를 받으셨다.
백사 오성대감(白沙 鰲城大監)의 네명의 아들중 둘째로는 예빈시정(禮賓侍正)을 역임하신 문숙공(文叔公)의 휘는 정남(井男)이시고, 그의 둘째 아드님은 선조때 사과직(司果職)을 지내신 학관공(學官公) 시득(時得)이시다.
학관공(學官公)의 맏아들은 숙종때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역임하신 덕천공(德泉公) 세담(世聃)이시며,덕천공(德泉公)의 長子께서 安東으로 落南하신 입향조(入鄕祖) 영지공(靈之公) 용좌(龍佐) 이시다.
영지공(靈之公)은 숙종조 경기감영(京畿監營)에 봉직하시던 시가는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최 절정기다. 老論 小論이 권력장악(權力掌握)을 위하여 서로 대립하면서 왕위계승(王位繼承) 문제를 에워싸고 小論은 숙종임금의 長子 균(呁)을 추대하고, 老論은 넷째 아들 무수리 소생 금(昑) : 후에 영조를 世子로 책봉코져 하였다.
그러나 균(呁)이 신병관계로 국사에 청정치 못하자 이를 이유로 老論은 영인군을 세자로 대리청정(代理聽政) 시키도록 주창(主唱)하였다. 이에 小論은 老論이 世子를 바꿀려는 음모로 단정하고, 老論 4大臣을 비롯한 추종자를 실각(失脚), 참살(斬殺),극형(極刑), 유배(流配) 시켰다.
이 신임사화(辛壬士禍)를 개탄하시고 英祖1년에 公의 선조(先祖)께서 李朝 成宗때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 판관(判官)을 봉직한 연고로 낙남(落南)하여 은거(隱居)하셨다. 영지공(靈之公)의 정자(亭子)는 安東市 水上洞에 있으며 영지정기(靈之亭記)는 初代 副統領의 長子 규창(圭昶)이 글을 지었고, 묘지(墓地)는 安東市 北後面 道進里 금상곡(錦尙谷)에 안장(安葬) 되셨다.
묘지명(墓誌銘)은 高宗때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를 역임하신 백사공(白沙公)의 11대손 宗孫 규환(圭桓)께서 글을 지었다. 참고로 영지공(靈之公)의 長子 後孫은 安東市 水上洞과, 북후면(北後面) 도진리(道進里)에 살고 있으며, 둘째 셋째 넷째 後孫은 서후(西後) 광평리(廣坪理),김천(金泉) 지례(知禮), 경남 하동(慶南 河東),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散在)하며, 地域社會와 國家發展에 이바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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