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행사 및 제례

순종의 장례식(純宗 葬禮式)

야촌(1) 2011. 2. 21. 12:01

▲순종황제 국장 발인 모습(1926년 6월 10일) / ⓒ2006 이혜원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 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 까지 이르렀으니…."

 

 

▲유릉으로 향하는 순종의 국장행렬./ ⓒ2006 이혜원

 

1926년 4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純宗)은 피맺힌 한을 토하는 유언을 남기며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로 숨을 거뒀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 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때였다.

 


1907년(광무11년) 7월19일(음6월10일)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의 압박에 의해 물러난다.

순종은 고종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다가 8월27일(음7월19일) 경운궁(慶運宮=덕수궁)에서 조선 27대 마지막 황제로 즉위한다.

 

 

▲순종의 대여 /ⓒ2006 이혜원

 

그해 일제는 한미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 통감을 설치해 국정을 간섭하게 됐으니 이미 조선은 망국의 길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이른 시점이었다. 통감 설치 이후 일본인이 정부 각처의 차관으로 임명되고 행정력을 모두 장악하는 차관정치를 실시한다. 이어 일제는 1908년 경제 수탈을 위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09년 법부와 군부를 각각 폐지해 사법권과 군수통수권까지 일본에 넘어갔다.



일제가 조선에 빼앗을 것은 국권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거센 폭풍우 몰아치는 들판에서 깜박거리는 등불이었던 조선은, 1910년 8월29일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 친일매국노가 앞장선 한일합방 조약이 맺어지며 불이 꺼지고 만다.



대한제국 멸망 후 순종(1874~1926)은 강제로 황제 자리에서 퇴위 당하고 일본 천황가의 하부단위 '창덕궁 이왕(李王)'으로 격하돼 창덕궁에 갇혀 한 많은 세월을 보낸다.



순종의 인산일 일어난 6·10만세 운동

 

고종과 순종은 여러 차례 독살설에 휘말린다.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 태어난 순종은 1875년 왕세자로 책봉된다. 고종이 숨을 거둔 1919년, 일제에 의해 독살 당했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흉해지고 3·1운동을 촉발시킨 원인이 됐다.

 


그 이전인 1898년 커피를 즐기던 고종과 황태자 순종의 커피에 독을 넣었다는 일제 독살설도 있다.

커피 맛을 잘 아는 고종은 한 모금 마시다가 뱉어버렸지만 순종은 다 마셔버려 두뇌에 이상이 왔다는 독살 미수사건의 일설도 전해진다.

 

 

▲순종의 빈전에서 향을 올리는 의친왕

 

1926년 4월 25일 승하한 순종은 27일 소렴을 하고 29일 대렴을 마친 뒤, 빈전(殯殿·발인 전까지 관을 두는 곳)을 창덕궁 선정전에 설치한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고종의 홍릉 경역 왼쪽 줄기에 능을 정하고 5월 7일부터 산역을 시작했다.

순종의 능호 역시 고종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승인할 리 없었고 황실은 고종과 마찬가지로 편법을 동원한다. 순명효황후 민씨(1872~1904)는 순종이 즉위하기 전 광무8년(1904) 33세로 황태자비로 승하해 경기 용마산 내동에 안장됐었다. 순종은 즉위하자 순명효황후로 추상하고 민씨의 유강원(裕康園)을 유릉(裕陵)으로 추봉했다.

일제로서도 이미 능호를 받은 유릉을 격하시킬 수도 없앨 수도 없는 일. 더욱이 황실에서 무덤을 천장하고 부부를 합장시키겠다는 데야 제 아무리 일제라도 간섭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일제가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조선의 황제가 죽은 분노를 터트릴 민중들의 움직임이었다.

순명효황후가 죽은 지 21년 후인 1926년 6월4일 오전 6시, 황후의 유해는 구릉(舊陵)에서 발인해 금곡으로 향한다. 6월5일 오전 6시 황후는 오른쪽 황제의 자리를 비워두고 왼쪽에 자리 잡는다.

 

 

▲순종의 빈전이 있는 창경궁 앞에서 곡을 하는 학생들. /ⓒ2006 이혜원

 



▲순종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러 상복 차림으로 나온 시민들....

▲외국 조문사절/
   ⓒ2006 한성희

 

 

▲황제의 잠들 곳을 준비하느라 유릉 능침 자리를 공사중이다./ⓒ2006 이혜원

 

일제가 창덕궁 이왕으로 격하시켰지만 순종은 조선 민중에게 여전히 황제였고 정신적인 지주였다. 조선 총독부는 미리 경찰과 군인 7천명을 동원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지만 독립의 염원을 외치는 조선의 함성을 막을 수 없었다.


뒤이어 을지로, 종로3가, 동대문, 청량리에서 학생들은 토지제도의 개혁, 일본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쳤고 시민 수만 명이 이에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목 터지게 불렀다. 순종의 인산일 하루 동안 체포된 학생이 1천명에 달했다.


"지금 한 병이 침중하니 일언을 하지 않고 죽으면 짐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이 조칙을 중외에 선포하여 내가 최애최경하는 백성으로 하여금 병합이 내가 한 것이 아닌 것을 효연히 알게 하면 이전의 소위 병합 인준과 양국의 조칙은 스스로 과거에 돌아가고 말 것이리라. 여러분들이여 노력하여 광복하라. 짐의 혼백이 명명한 가운데 여러분을 도우리라"

 

 

▲산역중인 유릉(하관하기 전)의 모습 /ⓒ2006 이혜원

 

죽는 순간까지 순종의 가슴에 한 맺혔던 마지막 유언을 백성들이 알 리 없었지만 순종의 혼백은 6·10 만세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길로 떠났다. 떠나는 순간, 아직 순종의 염원이 이뤄지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으리라.

황제는 가고 무덤가는 적막하다.

6월 11일 해시(亥時·21~23시)에 순종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릉에 순명효황후와 합장됐다. 조선의 황제 순종은 국권을 빼앗긴 울분에 눈을 감지 못했으리라.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1894~1966) 윤씨는 1906년 황태자비로 책봉되고 1907년 순종의 즉위로 조선 최후의 황후가 된다. 순정효황후는 최후까지 황실의 기품을 잃지 않고 황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한국전쟁을 겪고 낙선재에서 1966년 2월 3일 73세로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왕릉에 잠든 순정효황후는 유릉에 순종과 순명효황후와 합장돼 유일하게 한 무덤에 황후 둘과 황제가 한 무덤에 있는 능이 됐다. 순정효황후는 국권이 피탈될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황후의 치마 속을 누가 조사할 수 있으랴. 친일파였던 숙부 윤덕영이 들어와 강제로 이를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순정효황후다.

 

 

▲유릉의 능침 /ⓒ2006 한성희 /유릉은 조선의 제27대 순종(1874~1926)의 능을 말한다.

 

고종의 홍릉과 같은 구조로 조성된 유릉에 오른다. 유릉의 석물은 홍릉의 황당한 우주괴물 수준보다는 훨씬 뛰어난 솜씨지만 왕릉만도 못한 크기의 황제릉은 망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 옛날 순종의 삶과 황실의 몰락, 일제의 압박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러나 숲으로 둘러싸인 적막 속에 유릉은 아무 말도 들려주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이렇게 역사는 흘러가는 것인가. 꽃잎이 분분하게 떨어지는 어느 날, 홀로 이곳을 다시 찾아 조선 마지막 황제의 고독을 함께 나눠야겠다.

 

◈덧붙이는 글

위 자료사진은 전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자문위원 이혜원씨가 제공해 준 사진입니다.

이혜원님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