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세자료

전 판서 이시발의 졸기 - 조선왕조실록

야촌(1) 2010. 12. 4. 20:00

인조 4년 병인(1626,천계 6)/조선왕조실록 인조 11권

1월1일 (을사)

 

■ 전 판서 이시발의 졸기

 

전 판서 이시발(李時發)이 졸하였다. 시발의 자(字)는 양구(養久)이고 경주인(慶州人)이다.

인품이 영민하고 경사(經史)에 조예가 깊어서 약관(弱冠)의 나이로 기축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서 왕사(王事)를 위해 열심히 직무를 수행하여 많은 노고가 있었다. 접반관(接伴官)으로서 중국 장수 낙상지(駱尙志)와 병서(兵書)를 논했었는데, 상지가 크게 경탄하여 ‘그대와 같은 재주는 천하에서도 얻기가 쉽지 않다.’고 말하였다.

 

그 뒤 경상도로 나아가 안찰(按察=관찰사)하여 훌륭한 치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이 겨우 30세였다.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론을 제기하였고 또 정청(庭請)에도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기되어 강상(江上)에 거처하고 있었다. 기미년에 오랑캐의 경보(警報)가 있자 찬획사(贊畵使)로 관서(關西)에 나아가 수년간 진무(鎭撫)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졸한 것이다.

 

[原文]

○前判書李時發卒。 時發養久, 慶州人。 爲人英敏, 博洽經史。 年甫弱冠, 登己丑文科。 逮遭壬辰之變, 奔走王事, 多有勤勞。 嘗以接伴官, 與天將駱尙志, 論兵書, 則尙志大驚服曰: "似君之才, 天下亦未易得也。" 其後出按慶尙道, 治效茂著, 時年纔三十矣。 光海時, 廢母之論起, 獻議立異, 又不參庭請, 廢處江上。 己未有虜警, 以贊畫使, 出鎭關西累年, 至是卒。

 

[원전] 34 집 54 면

[분류] 인물(人物)

 

[주01]기축년 : 1589 선조 22년.

[주02]기미년 : 1589 광해군 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