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환(李寅煥) 30世
[문과] 현종(顯宗) 6년(1665) 을사(乙巳) 정시(庭試) 병과(丙科) 5위/합격연령-33歲
[생원진사시] 현종(顯宗) 1년(1660) 경자(庚子) 증광시(增廣試) 3등(三等) 8위/합격연령-28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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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환『李寅煥, 1633(인조 11)∼1699(숙종 2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문백(文伯), 호(號)는 생곡(生谷). 형조판서(刑曹判書) 이시발(李時發)의 손자로, 아버지 이조판서(吏曹判書) 경휘(慶徽)와 어머니 심대복(沈大復)의 딸 청송심씨의 장자(長子)로 지금의 진천군 초평면 용정리 생곡마을에서 태어나 백부(伯父) 경연(慶衍)에게 출계(出系)했다.
그는 28세 때인 1660년(현종 1)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33세인 1665년(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후 정미(丁未) 1667년(현종 8)에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 대교(待敎-正八品),봉교(奉敎-正七品)로 전직되었다.
다음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正六品)에 승진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郎-正六品)을 역임하고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正六品)으로 옮겼다.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正六品) 등을 거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正五品)을 역임하였으며 1675년(숙종 1) 홍문관 부교리로 있으면서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
당시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을 덕원(德源=함경남도 문천군에 있는 면)으로 유배하려하자 그를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힐책을 받고 호서 염문사(湖西 廉問使), 천안군수(天安郡守-從四品), 표양부사(표양府使-從三品) 등의 외직으로 밀려났다.
1679년(숙종 5)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자호를 ‘생곡(生谷)’이라하고 아우 이인혁(李寅爀)과 한가로이 지냈다. 이듬해인 1680년(숙종 6) 남인(南人)에 대한 경신출척(庚申黜陟=庚申換局)이 단행된 이후 다시 기용되어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從三品), 대사헌 집의(大司憲 執義-從三品)를 지냈다.
이듬해 응교(應敎-正四品), 승지(承-正三品), 1682년 (숙종 8) 형조참의(刑曹參議-正三品),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正三品), 승정원 좌부승지(承政院 左副承旨-正三品)를 거쳐 1684년(숙종 10)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正三品)에 특진되었다.
1685년에는 육곡 이이(栗谷 李珥)의 신원을 극력 주장하여 관작이 복구되도록 하였다.
1689년(숙종 15) 송시열이 사사된 이후 다시 청송부사로 밀려나자 얼마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재기용되어 형조참의에 올랐다. 뒤이어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正三品),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從二品),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正二品)를 지냈으며 1697년(숙종 23)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正三品)를 역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에 올랐다.
천성이 어질고 미더웠으며 효우(孝友)에 돈독하고 몸가짐이 간결하고 옳았다. 또한 시비에 공정하고 당쟁에 조심하여 격심한 당파싸움 속에서도 천수(天壽)를 누려 1699년(숙종 25)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국 가의대부 행 이조참판 생곡 이공 인환 지묘/ 증 정부인 완산이씨/ 증 정부인 청주한씨 부좌
(朝鮮國 嘉義大夫 行 吏曹參判 生谷 李公 寅煥 之墓/ 贈 貞夫人 完山李氏/ 贈 貞夫人 淸州韓氏 祔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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