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유원(李裕元) - 백사공파

야촌(1) 2010. 8. 21. 05:03

■ 이유원(李裕元)

 

   [생몰년] 1814년(순조 14) ∼ 1888년(고종 25).

   [문  과] 헌종(憲宗) 7년(1841) 신축(辛丑) 정시(庭試) 병과(丙科) 14위
   [생원진사시] 헌종(憲宗) 3년(1837)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49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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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경춘(京春), 호(號)는 귤산(橘山)·묵농(默農). 이조판서(吏曹判書) 계조(啓朝)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禮文館 檢閱)·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를 거쳐 1845년 동지사(同知事)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의주부윤· 함경도관찰사를 지냈다.

 

고종초에 좌의정(左議政)에까지 올랐으나 흥선대원군과 반목하여 1865년(고종 2)에 수원유수(水原留守), 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해말 다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로 전임되어 《대전회통(大典會通)》 편찬의 총재관이 되었다.

1873년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자 곧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로 서임되었다.

흥선대원군과 반목, 대립하였고, 세자책봉문제의 이면에서 일본과 결탁, 청나라 정부에 작용하였으며, 1875년 주청사(奏請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李鴻章)을 방문, 회견하고 세자책봉을 공작하였다.

1879년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청나라북양대신이홍장으로부터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과 통상수호하여 일본을 견제, 러시아를 방지하라는 요지의 서한을 받았다.  

1880년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으나 1881년 그의 개화를 반대하는 유생 신섭(申.木+燮)의 강력한 상소로 거제도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1882년 전권대신으로서 일본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제물포조약에 조인하였다.

학문에도 능하여 《임하필기 林下筆記》·《가오고략 嘉梧藁略》·《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 능하였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日省錄  ◇陰晴史  ◇梅泉野錄  ◇大韓季年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