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방목(司馬榜目)해제
崔珍玉(한국학중앙연구원)
1. 생원 진사시의 제도와 절차.
2. 사마방목 현황
3. 사마방목의 수록내용.
4. 사마방목의 사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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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원진사시의 제도와 절차
조선시대에 설행되었던 과거에는 문과, 무과, 잡과, 생원 진사시가 있는데 그중에서 문과와 무과, 잡과 합격자에게는 등위에 따라 관직 또는 품계가 주어졌다. 그러나 생원 진사시 합격자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하여 수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관직 제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시험인데도 과거제가 폐지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고자 노력하였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에서의 공식 명칭은 생원 진사시였으나 소과(小科), 감시(監試), 사마시(司馬試)라고도 불렸다.
소과는 문과를 대과라 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대소과(大小科)라 하여 주로 문과와 같이 칭할 때 쓰였다. 감시는 고려시대 진사시를 국자감시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감시라고 한 용례는 사마방목이나 문과방목, 『양전편고(兩銓便考)』등의 법전, 실록 등 연대기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마시라고 칭한 것에 대해서는 연원이 분명치 않으나 조좌호(曺佐鎬)는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의거하여 생원 진사는 주(周)의 조사(造士)에 해당하고 문과 출신은 진사에 해당하는데 소과를 사마시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곤란하며 과거의 격식을 높이기 위해 대과에 붙여야 할 사마시의 칭호를 소과에 붙인 것이 아닌가 보고 있다.1)
사마시라 칭한 데 대한 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태종 5년 의정부 찬성사(贊成事) 곽추(郭樞)의 졸기(卒記)에 곽추가 일찍이 사마시를 관장하였다는 기록으로2) 보아 조선 초부터 사마시라 썼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 진사시는 태조 2년 처음 시작되어 고종 31년 폐지되기 까지 502년간 모두 230회가 설행되었다.
조선 초부터 생원시와 진사시가 함께 시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태조는 1392년 7월에 내린 즉위교서에서 진사시를 혁파하였다. 고려 말 사장(詞章)을 중요시하는 데서 오는 폐단을 없애고 경학(經學)을 장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시행되었던 진사시를 일시에 없애기 어렵다는 반대의 의견이 많아 태조 2년(1393)에 진사시를 실시하였다가 태조 4년에 다시 폐지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후 사장의 중요성을 들어 진사시 복구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쉽게 시행되지 않다가 세종 20년(1438)에 가서야 복구되었으나 세종 26년(1444)에 다시 혁파되었다. 세종 20년(1438)과 23년에 잠시 진사시가 실시되었는데 이때 장원 합격자가 신숙주(申叔舟)와 이석형(李石亨)이다.
진사시가 완전 복구된 것은 단종 원년(1453) 2월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 약 60년간은 생원시만 실시되었다가 단종 이후에 생원시와 진사시는 항상 함께 실시되었다. 생원진사시는 식년시(式年試)와 증광시(增廣試)로 구분된다. 식년시는 3년에 한번씩 즉 자(子) · 오(午) · 묘(卯) · 유(酉)년에 정기적으로 실시되는 시험이고 증광시는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실시하는 비정기적인 시험이다.
조선왕조 502년 동안 생원 진사시는 식년시 163회, 증광시 67회 설행되었다. 3년에 한번씩 치렀던 식년시가 결행된 것은 모두 5회이다. 세종 26년 심한 가뭄으로 인해 정지되었고, 선조 27년(1594)과 30년(1597)에 임진왜란으로, 광해군 13년(1621) 신유년에 과거 부정으로 인해,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인해 결행되었다.
식년시는 정기적인 시험이라 대체로 시험시기가 일정하였다. 초시를 식년 전해 가을에 실시하고 복시를 식년 봄에 실시하였다. 초시 합격자가 복시에 응시하는데 시일이 촉박하거나 농번기에 빈번한 왕래로 인해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 식년에 초시와 복시를 함께 치르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 초시를 봄에, 복시를 가을에 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사정상 식년에 실시하지 못하고 이듬해 물려서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퇴행하여 이듬해 설행된 경우는 선조 34년(1601) 경자식, 광해군 2년(1610) 기유식, 인조 24년(1646) 을유식, 현종 14년(1673) 임자식, 숙종 5년(1679) 정사식, 숙종 5년 (1679) 무오식, 숙종 41년(1715) 갑오식, 경종 1년(1721) 경자식, 영조 9년(1733) 임자식, 순조 14년(1814) 계유식, 고종 2년(1865) 갑자식이 퇴행한 경우이다.
증광시는 선조 이전까지는 왕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서만 실시되었지만 선조 22년(1589) 종계(宗系)를 바로 잡고 나서 증광시를 설행한 이후부터 즉위 기념 이외의 경사로도 증광시를 설행하였다. 이후에는 크고 작은 국가의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특히 왕가에 축하할만한 경사가 있을 때 설행되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명분이 늘어나고 자주 설행되었다.
세자의 탄생 · 입학 · 가례 · 세자 책봉, 원자정호(元子定號), 원손(元孫)의 탄생, 중전 책봉, 친경(親耕), 친잠(親蠶), 상존호(上尊號) · 존숭(尊崇) · 부묘(?廟) · 세실(世室), 왕 · 대비 · 대왕대비의 보령(寶齡) 기념 등 왕실의 보존과 관련된 왕실 예(禮)가 주를 이루고 있다.
증광시는 시험 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한여름과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든지 시행되었다. 식년시의 초시와 복시의 간격이 대체로 5-6개월 되는 데 비해 증광시는 대부분 1-2개월 안에 시행되었고 늦어도 3-4개월을 넘지 않았다.
시험의 절차는 식년시와 증광시 모두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을 결정하였는데 각 군현에 학교가 세워지고 문풍이 진작됨에 따라 지원자 수가 늘어나 수험생 관리에 어려움이 많아지자 태종 14년부터 초시와 복시 두 단계를 두었다.
초시는 각 지방에서 실시되어 향시(鄕試)라고도 하며 서울에서 실시되는 초시는 한성시(漢城試)라고 한다. 초시의 정원은 도마다 달랐다. 군현의 수와 인구의 과다에 따라 차이를 두었는데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각각 700명씩 뽑고 최종시험인 복시에서 100명씩 뽑았다. 이와 같은 정원은 후기까지 변동이 없었다. 각 도별 초시의 정원은 다음과 같다.
한성 | 경기도 | 경상도 | 충청도 | 전라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 | 합계 | |
생원시 | 200 | 60 | 100 | 90 | 90 | 45 | 35 | 45 | 35 | 700 |
진사시 | 200 | 60 | 100 | 90 | 90 | 45 | 35 | 45 | 35 | 700 |
경기 향시는 임진왜란 이후에 폐지하고 한성시에 응시케 하였다. 대신 경기 향시이 액수를 한성시에 가산해 주었다. 생원 진사시의 법적 정원은 조선 초부터 잘 지켜졌으나 철종 대부터 잘 지켜지지 않게 되었으며 고종말년에 가면 크게 늘어났다. 일반적으로 진사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인해 진사를 더 많이 뽑았다. 두드러진 경우가 생원 238명, 진사 559명을 뽑은 고종 28년(1891) 증광시의 경우이다.
초시는 각 도별로 실시되었는데 강원도와 황해도를 제외하고는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다. 시험장소는 도내의 소속 읍에서 돌아가면서 정했고 시험관은 감사가 임명하였다가 명종 이후에는 서울에서 경시관이 내려왔다. 향시 이외에 초시에 해당하는 승보시(陞補試), 합제(合製), 공도회(公都會)가 있어 여기에 합격하면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복시 시험은 예조(禮曹)에서 주관하였으며 단종 이후에는 성균관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복시 수험생들은 먼저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임문고강(臨文考講:책을 앞에 펴놓고 읽는 일)하는 조흘강(照訖講)에 합격하여야 녹명소(錄名所)에서 녹명할 수 있었다.
시험 장소는 분소법(分所法)에 의해 일소(一所), 이소(二所)로 나누어서 치렀다. 이는 상피제(相避制)를 두어 시험관의 자제나 친척 또는 부자가 함께 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세종대부터 시작되어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법제화 되었다. 대체로 일소는 예조, 성균관, 한성부가, 이소는 장악원, 성균관, 서학, 동학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같은 날 동시에 실시되지 않고 진사시를 먼저 치르고 생원시를 나중에 치렀다. 격일로 치러졌기 때문에 양 시험에 모두 응시할 수 있었다.
시험과목은 생원시는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이었다. 사서의는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중 한 문제를 내어 논문을 짓게 하는 것이다. 五經義 『시경(詩經)』『서경(書經)』『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훈의(訓義)에 관한 것을 각 1편씩 출제하였다. 진사시는 시(詩) 1편, 부(賦) 1편이었다. 후기에 가면 생원시는 의(疑)와 의(義) 중에서 1편, 진사시는 시(試)와 부(賦) 중에서 택일하도록 하였다.
복시에서 선발된 100명은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재(等第)하였다. 등제는 양소(兩所)에서 한 사람씩 차례를 바꾸어 가며 하였다. 합격 인원이 증가하는 경우에 1등, 2등은 변화가 없었고 증액된 인원은 모두 3등에 등제시켰다. 정원을 초과하는 경우 노인, 종친, 은사의 명목으로 뽑기도 하는데 이 경우 방목 상단에 ‘노(老)’ ‘은(恩)’으로 표시하였다.
시험이 끝나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것을 출방(出榜)이라고 하는데 생원 진사시의 출방은 같은 날에 하였다. 출방 후에는 국왕이 합격자에게 백패를 수여하는 방방의(放榜儀)라는 의식이 행해진다. 백패에는 합격자의 관등과 성명, 등위를 기재하고 보인(寶印)과 날짜를 기입한다. 방방은 주로 인정전(仁政殿)이나 근정전(勤政殿)에서 행해졌다.
방방의(放榜儀) 의식이 끝나면 다음 날 합격자들은 생원 장원의 인솔 하에 임금에게 사은(謝恩)하고, 그 다음 날에는 진사 장원의 인솔 하에 성균관에 가서 알성(謁聖)의 예를 올렸다. 방방이 끝나면 악공, 광대, 재인을 동반하고 3일 동안 시내를 돌아다니는데 이를 유가(遊街)라고 한다.
생원 진사시는 문과의 예비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합격한다 해도 실제 관리에 임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원점(圓點) 300점을 따야만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다. 성균관 식당에서 아침 저녁 두끼를 먹으면 1점을 계산해 준다. 원점 300점이란 곧 300일의 성균관 출석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원점 300점을 채우는 유생이 없어 원점을 감해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후기로 갈수록 생원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 유학으로 문과에 응시하는 경우가 많아져 18, 19세기에는 문과 급제자의 70%가 유학이었다. 그런가 하면 생원 진사시 합격 후 문과 급제와 상관없이 관직에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1)曺佐鎬, 「李朝司馬試考」(上), 『성균관대학교논문집 인문사회계』제 14집, 1969, 135-136쪽
2)『태종실록』권 10, 태종 5년 7월 6일(기해)
사마방목은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이다. 사마방목에는 합격자의 이름 이외에 신상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시험에 관한 정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마방목은 생원 진사시를 사마시라고도 한데서 연유한 것이며 연방(蓮榜)이라고도 하나 흔히 쓰이지는 않았다. 초시 합격자 명단인 초시방목도 만들어졌으나 거의 전하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사마방목이라 하면 복시방목을 말한다.
방목은 과거 합격자 발표가 난 후에 만들어지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 회분의 합격자에 관한 내용이 정리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나 문과방목의 경우 후대에 집성되어 『국조방목(國朝榜目)』『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문과방목(文科榜目)』 등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잡과방목도 『역과방목(譯科榜目)』『의과방목(醫科榜目)』또는 『잡과방목(雜科榜目)』으로 집성된 방목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마방목의 경우는 「가정삼십칠년무오추생원진사방목(嘉靖三十七年戊午秋生員進士榜目)」과 같이 단회방목의 형태로 각 도서관에 산재해 있다. 도서관마다 소장하고 있는 방목의 종류와 판본이 다르기 때문에 연구자나 일반인들이 자료를 접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으며 자료에 접근했다 해도 원하는 정보를 찾아보기가 매우 어려웠다. 우선 목록 파악부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사마방목의 목록을 처음으로 파악한 것은 일본인 미끼 사카에(三木榮)이다. 그는 1939년에 총 76부의 사마방목을 소개하였고, 1975년에는 124회 분의 방목을 소개하고 그 소재를 밝혔다.3) 우리 학계에서는 1968년 계훈모(桂勳模)가 미끼 사카에의 자료를 토대로 사마시 설행의 회수를 231회로 파악하고 총 147회에 대한 소재를 확인하였다.4)
1980년에 이를 수정 증보하면서 사마시 설행 회수를 230회로 파악하였고 그 중 177회분의 소장처를 확인하였다.5) 이로써 사마방목에 대한 목록 파악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목록과 소재가 파악되었다 해도 사마방목이 각 도서관에 산재해 있어 자료의 열람과 이용에 어려움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한 어려움이 해소되려면 먼저 사마방목의 집성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문제는 1991년 국학자료원이 영인본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출판함으로 해서 다소 해소되었다. 그러나 1684년부터 1894년 사이의 96회분의 사마방목을 수록하여 시기적으로 제한되어 있는데다 중간에 누락된 방목도 다소 있어 당시까지 알려진 사마방목을 망라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색인이 없어 이용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사마방목이 종합적으로 정리되어 학계에 제공된 것은 1997년에 간행된 『CD-ROM 사마방목』에 의해서 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역사연구실에서 1986년부터 사마방목의 전산화 작업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데이터베이스화하여 CD-ROM으로 간행한 것이다.6) 계훈모에 의해 밝혀진 것 177회분보다 9회분이 더 추가되어 총 186회분을 수록하였다. 추가로 조사된 사마방목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①태종 14년(1414) 갑오식년
②세종 29년(1447) 정묘식년
③연산군 1년(1495) 을묘증광
④연산군 2년(1496) 병진사마방목
⑤연산군 10년(1504) 갑오식년
⑥중종 17년(1522) 임오식년
⑦중종 38년(1543) 계묘식년
⑧인조 13년(1635) 을해증광
⑨숙종 31년(1705) 을유식년 부록 부분은 전산화에 포함되지 않아 방목의 원형을 그대로 접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당시 조사된 사마방목을 망라하고 검색 기능이 갖추어져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점과 40,600여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사마방목을 CD-ROM 한 장에 담아냈다는 점에서 사마방목의 활용도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본 인물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사마방목은 이 『CD-ROM 사마방목』을 근간으로 한 것이다. 『CD-ROM 사마방목』이 간행된 후 중종 14년(1519)의 『정덕십사년기묘식사마방목(正德十四年己卯式司馬榜目)』이 새로 발굴되었고7) 『신묘년사마방목(辛卯年司馬榜目』(1591년)이 조사되었다.8) 이로써 태조 2년부터 고종 31년까지 설행된 230회의 생원 진사시의 82%에 해당되는 188회분의 방목이 현재 파악되어 자료로 활용 가능하게 되었다.
현재 파악된 사마방목의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 <표 2>과 같다.
세기 | 설행 횟수 | 현전방목수(%) |
14세기 | 3 | 0(0%) |
15세기 | 38 | 8(21%) |
16세기 | 36 | 31(86%) |
17세기 | 53 | 50(94%) |
18세기 | 51 | 50(98%) |
19세기 | 49 | 49(100%) |
계 | 230 | 188(82%) |
위의 <표 2>에 의하면 아직까지 14세기 방목은 하나도 파악되지 않고 있으며, 15세기 방목도 21%에 지나지 않는다. 16세기 방목이 86%, 17세기 방목이 94%가 전해지며 18세기 분은 1회분만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세기의 것은 모두 전해지고 있다.
현전하는 사마방목의 인간(印刊)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국가에서 인간한 것으로 대부분 현전 방목이 이에 속한다. 인간처(印刊處)는 주로 교서관(校書館)이고 간혹 지방 관아에서 간행한 것도 전해지고 있다. 둘째는 문집(文集)에 수록된 것으로 주로 15세기 방목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개인 문집에 수록됨으로써 국가에서 인간한 방목보다 보존이 잘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목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경우와 교우록(交友錄), 사우록(師友錄)의 형태로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 후자는 방목의 기재 내용을 갖추지 못한 경우가 많다. 셋째는 중간(重刊)된 경우로 후손에 의해 필사 또는 간행된 경우이다. 이런 형태는 주로 16세기 전반기의 방목에 많이 보인다.
대체로 이른 시기의 방목은 문집이나 중간본(重刊本) 형태를 띠는 것이 많고 17세기 말 이후의 방목은 운각(芸閣, 교서관) 간행의 원본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아직 미확인된 14 · 15 · 16세기의 방목이 문집에 또는 개인 소장으로 전해져 오는 경우가 있을 것으로 보며, 그러기에 앞으로 새로 발견될 가능성은 있다고 보며 또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3) 三木榮, 「司馬榜目に 就いで -見在 <司馬榜目>一覽表」, 『朝鮮學報』 제11집, 1975.
4) 桂勳模, 「司馬榜目總錄 附司馬試設科年次」, 『歷史學報』제38집, 1968.
5) 桂勳模, 「司馬榜目總錄 附司馬試設科年次」, 『歷史學報』제88집, 1980.
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서울시스템, 『CD-ROM 司馬榜目』, 1997.
7)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고문서 수집 사업의 일환으로 발굴된 것으로 韓山李氏 문중 소장의 文籍 중 하나이다.
8) 수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경상대학교의 이상필교수에게 감사드린다.
3. 사마방목의 수록내용.
방목의 구성은 권수(卷首), 원방(原榜), 권말(卷末) 부록으로 되어 있으며, 수록 내용은 시험에 관련된 사항, 합격자 본인에 관한 사항, 가족에 관한 사항으로 구분된다.
권수에는 주로 시험과 관련된 사항이 수록되어 있다. 시험 장소와 은문(恩門)이라고 해서 시험관의 관직과 성명이 일소, 이소로 나뉘어 기재되어 있으며 증광시의 경우 증광시가 설행된 이유가 밝혀져 있다.
원방은 생원방이 진사방 앞에 놓이는데 합격자 본인에 관한 사항과 가족에 관한 사항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합격자는 일등 5인, 이등 25인, 삼등 70인으로 성적순으로 등제(等第)된다. 시험 볼 당시의 신분인 전력(前歷), 이름, 자(字), 생년간지, 본관, 거주지, 시험장소와 시험과목 등이 기재되어 있다.
가족에 관한 사항으로는 아버지의 성명과 관직, 부모 · 조부모의 구존(俱存) 여부, 안항(雁行)이라 하여 형제 이름, 적서(嫡庶) 형제의 이름, 양자로 간 경우 생부의 이름과 관직 등이 기재된다. 구존은 구경하(具慶下 부모 모두 생존) · 자시하(慈侍下 어머니만 생존) · 엄시하(嚴侍下 아버지만 생존) · 영감하(永感下 부모 모두 사망) · 중시하(重侍下) · 중경하(重慶下 부모와 조부모 모두 생존)로 구분된다.
권말 부록에는 양시(兩試), 연벽(聯璧), 경외입격자수(京外入格者數) 등 통계적인 내용과 1, 2소의 시험문제, 시험일자, 출방일, 방방일, 초시의 시험관과 시험문제 등 시험의 운영에 관한 정보들이 담겨 있다. 양시는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쌍중(雙中), 구중(俱中)이라고도 한다. 생원시와 진사시는 하루걸러 치러지기 때문에 양시 합격이 가능하다. 진사시가 먼저 실시된다. 연벽은 형제가 한 해에 합격한 경우를 말한다.
연중(聯中), 쌍연(雙聯)이라고도 한다. 16세기 후반에 가면 방중색장(榜中色掌) · 은문색장(恩門色掌) · 수권색장(收卷色掌) · 공포색장(貢布色掌) · 제마수(齊馬首) 등 방회(榜會)와 관련된 사항도 기재된다.
이와 같이 풍부한 방목의 내용은 초기 방목에서부터 모두 갖추어 기재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 시기의 방목 중에는 필사본이나 문집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것들이 있는데 이 경우 가장 기본이 되는 은문, 전력, 본관, 거주지 등이 빠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기재 사항이 많아지며 특히 권말 부록이 풍부해지는 경향이 있다.
은문은 15세기 말에 보이기 시작해 16세기 초 이후 거의 빠짐없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초기 방목에서부터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 원방 부분에서는 방목의 기본사항인 전력, 본관, 거주지, 아버지의 관직과 이름은 초기 방목에서부터 빠짐없이 나타나나 구존여부와 안항은 16세기 중엽부터, 적서 형제의 이름은 17세기 초부터, 개인별 시험장소와 시험과목은 18세기 후반부터 일시(一詩), 이부(二賦)의 형식으로 기재되기 시작한다.
부록에서 양시와 연벽은 15세기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빠짐없이 기재되고, 방회 관련 기사는 16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는 경외입격자수, 초시의 시험관과 시험장소 · 試題 · 道別 장원이 기재된다.
조선시대에 설행된 총 230회의 생원진사시를 통해서 배출된 인원이 얼마나 되는지 현재 사마방목이 전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기란 어렵다.법정 액수가 지켜졌을 것으로 가정하고 단순한 산술계산으로 해도 46,000명이 배출된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19세기 중반 이후 정원을 초과해 뽑는 경우가 많이 있어 이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한다.
송준호교수는 생원 24,096명, 진사 23,652명으로 총 47,748명으로 추정하였다9) 이 인원에는 1891년(고종 28) 신묘년의 식년시가 시행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생원 125명, 진사 124명을 뽑은 신묘식년 방목이 전하고 있어 이를 더하면 47,997명으로 추정된다.
이중 현재 방목에 의해 파악이 가능한 인원은 총 41,049명이다. 이는 조선시대 전 시기에 배출된 인원의 86%에 해당된다. 이를 왕대별 시험회수와 비교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설행회수 | 현전방목수 | 본 DB 수록 인원 | |||||||
식년시 | 증광시 | 식년시 | 증광시 | 식년시 | 증광시 | 생원시 | 진사시 | 계 | |
태조 | 2 | ||||||||
정종 | 1 | ||||||||
태종 | 6 | 1 | 1 | 99 | 99 | 99 | |||
세종 | 9 | 1 | 1 | 198 | 198 | 198 | |||
문종 | 1 | 1 | |||||||
단종 | 1 | 1 | |||||||
세조 | 5 | ||||||||
예종 | 1 | 1 | 200 | 100 | 100 | 200 | |||
성종 | 8 | 3 | 470 | 235 | 235 | 470 | |||
연산 | 4 | 1 | 3 | 1 | 580 | 200 | 380 | 400 | 780 |
중종 | 13 | 1 | 11 | 2,200 | 1,100 | 1,100 | 2,200 | ||
인종 | |||||||||
명종 | 7 | 1 | 7 | 1,396 | 700 | 696 | 1,396 | ||
선조 | 12 | 5 | 11 | 4 | 2,199 | 800 | 1,499 | 1,500 | 2,999 |
광해 | 4 | 5 | 4 | 3 | 790 | 600 | 700 | 690 | 1,390 |
인조 | 8 | 3 | 8 | 3 | 1,600 | 589 | 1,100 | 1,089 | 2,189 |
효종 | 3 | 2 | 3 | 2 | 600 | 400 | 500 | 500 | 1,000 |
현종 | 5 | 2 | 5 | 2 | 993 | 399 | 699 | 693 | 1,392 |
숙종 | 15 | 12 | 15 | 12 | 2,999 | 2,400 | 2,700 | 2,699 | 5,399 |
경종 | 2 | 2 | 2 | 2 | 389 | 399 | 388 | 400 | 788 |
영조 | 17 | 8 | 16 | 8 | 3,197 | 1,600 | 2,397 | 2,400 | 4,797 |
정조 | 8 | 3 | 8 | 3 | 1,616 | 646 | 1,123 | 1,139 | 2,262 |
순조 | 12 | 6 | 12 | 6 | 2,400 | 1,200 | 1,800 | 1,800 | 3,600 |
헌종 | 5 | 3 | 5 | 3 | 1,000 | 600 | 799 | 801 | 1,600 |
철종 | 4 | 2 | 4 | 2 | 834 | 428 | 607 | 655 | 1,262 |
고종 | 11 | 6 | 11 | 6 | 4,638 | 2,390 | 2,753 | 4275 | 7,028 |
계 | 163 | 67 | 130 | 58 | 28,198 | 12,851 | 19,877 | 21,172 | 41,049 |
9) 송준호,『이조 생원진사시의 연구』,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1970, 별표1 참조
4. 사마방목의 사료적 가치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방목은 생원 진사시의 합격자 명부이지만 수록 내용이 상당히 다양하다. 다양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의 생원 진사시의 설행과 생원 진사들과 관련된 많은 사실들을 알 수 있다.
특히 전산처리된 자료에서 얻어지는 통계 자료들을 통해 유용하고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실록이나 법전 등 국가에서 남긴 자료 또는 문집이나 족보 등 개인과 관련된 각종 자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들도 많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사마방목을 통해서 파악된 생원 진사는 41,000여명에 이른다. 생원 진사 뿐 아니라 아버지, 형제 등도 수록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방대한 인물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 계층의 신상 정보를 이처럼 방대하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회 한회분의 사마방목은 단편적인 사실들만을 전하고 있지만 집성되어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되었을 때 자료로서의 위력과 활용도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조선시대 인물 사전으로서의 기능을 들 수 있다. 생원 진사 본인 뿐 아니라 아버지, 형제가 망라되어 생존시기, 과거합격 여부, 본관지, 거주지, 관직 내용 등이 밝혀져 있다는 점에서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지역 · 혈연 단위로 생원 진사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선조들의 과거 합격 여부를 알고 싶어 하는 일반인들의 요구나 자기 고장에서 배출된 합격자들의 신상을 알고 싶어 하는 각 지방자치 단체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용하다고 하겠다.
연구자들에게는 생원 진사시의 시행과 관련된 내용, 나가서 정치지배세력의 성격, 신분제의 변화, 향촌사회에서의 사족들의 동향 등 조선사회 전반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사마방목은 국가에서 실시한 과거시험의 합격자 명부이다. 시험의 전 과정을 국가에서 주관하고 방목의 간행 또한 국가에서 맡아 하였기 때문에 방목에 수록된 내용은 그만큼 공신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방목에 따라서는 방목을 소지한 개인이 동방(同榜)들의 사망이나 관직 등의 사실을 후에 추기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위조나 변조가 있을 수 없는 자료이다.
사마방목이 갖고 있는 자료로서의 성격이 십분 발휘될 수 있도록 인물사전 내지 검색 기능으로서의 이용에 머물지 않고 사마방목이 담고 있는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표3>왕대별 시험회수 및 생원 진사 수
<표2>생원진사시 설행 회수와 현전 방목수<표1>도별 초시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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