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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발 선생 묘터 이야기

야촌(1) 2009. 9. 8. 00:50

■ 충익공 벽오 이시발의 묘터는 명(明)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이 자리 잡은터.

 

벽오공이 운명 하였을 당시에는 충북 청원군 오창면 그의 고향 황고(아버지)산소 아래로 장례를 치렀으나 몇 년 후 아들들에 의하여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곳으로 산소를 정한 까닭은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이 아국(我國)의 방방곡곡에 전승하며 한양으로 밀려오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파천 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청병 하였을 때다.

 

이때 이여송(李如松) 장수가 6만 대군을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원병 왔는데, 당시 명나라에서는 전쟁(戰爭)을 할 때, 반드시 지사(地師)를 데리고 와서 지리(산천의 형국을 오행에 부치어 길흉을 살피는것)를 살피게 한 연후에 진지를 구축 하였다. 이때 따라온 지사가 두사충(杜師忠)이었다.

 

이여송이 평양성을 탈환 후 여세를 몰아 벽제관(碧蹄館=礪石嶺여석령 : 일명 숫돌고개로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 이러러 여기다 진(陳)을 치면 어떠냐고 두지사(杜地師)에게 물었다. 두지사는 무방하겠다 하여 그곳에 진을 쳤다.

 

그러나 벽제관전투(碧蹄館戰鬪)에서 명군이 왜군에게 대패하자 제장들이 지관 두사충(杜思忠)이 진을 잘못 쳐서 패하였다고 하자 그 책임을 물어 두사충을 참수형(斬首形)에 집행 하려고 할 때다. 이 소식을 들은 벽오 이시발(1569~1626)이 곧 이장군에게 달려가서 여러모로 설득시킨 나므지 두지사의 사형 집행을 중지하기로 합의 하였다.

 

두지사는 죽을 줄 알고 있다가 살게된 연유를 알고, 벽오 이시발의 은혜(恩惠)를 보답하기 위하여 결초보은(結草報恩)하기로 결심 하였다. 어느날 두사충은 벽오공을 찾아가서 " 공은 나를 살려주신 은인 입니다. 소생이 배운 것은 지리밖에 없으니 좋은 기지(基址)나 결정해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벽오공은 감사 하다고 인사 하면서 조정에 일이 있기에 동행하지 못하고 동생인 풍천공을 동행 하도록 하였다. 풍천공은 두지사를 따라서 서울서 진천 초평까지 210리길 산천을 살피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초평의 이곳에 이르렀을 때, 두타산에서 내려온 줄기며, 펼쳐진 지형의 여러 동네를 살피드니 그곳에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서울서 내려오는 동안에 본 안목(眼目)으로는 여기가 가장 좋다고 생각 합니다. 이 지역이 와우형(臥牛形)입니다. 여기에 터를 잡으시면 불농불상 300년 기지(不農不商 三百年 基地)가, 될 것이니 이곳으로 결 정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 그리하여 여기를 벽오공의 후손들이 영주(永住)할 기지로 삼았으며 따라서 이름난 정승, 판서들이 줄줄이 배출 되었다.

 

와우형(臥牛形)이란?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니 소는 풀이 있으야 한다. 그러기에 풀의, 벌판인 즉, 초평(草平)이 오늘날 까지 초평면으로 불리워 지고 있고 공의 묘지는 소의 배 부위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으며 그의 후손들은 와우형의, 소 머리인 우두(牛頭)에 쌍오정(雙梧亭 :오늘날엔 터만 남아있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봉황대(鳳凰臺)가 있고, 봉황대 옆에 조선에서 가장 큰 사설 도서관으로 유명한 만권당(萬券堂 : 6.25때 화재로 소실되어 현제 1000 여권만 후손들이 보존하고 있음)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현제 지방자치단체에서 복원할 계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