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한국의전통문화

묘비문 쓰는법

야촌(1) 2009. 5. 20. 14:58

1. 비(碑)의 정의(인터넷 검색글)


돌에 새겨서 세운 돌, 이것을 비석(碑石)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석에 새긴 글자는 금석문의 하나로, 또는 역사적인 자료로 대단히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한나라 이전에는 자연형의 돌에 새긴 각석(刻石)이 있었으나 정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새긴 정식의 비는 한나라 시대 묘비에서 발달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비는 글자를 돌에 그대로 새긴 갈(碣)이 있고, 일정한 형태로 돌을 다듬어 글자를 새긴 비(碑)가 있다.

 

비의 모양은 몸체인 사각기둥 모양의 비신(碑身)이 있고, 머리 갓 부분인 뿔 없는 용을 조각한 이수(螭首)가 있고, 비석을 기반으로 받치는 거북모양의 귀부(龜趺)가 있다. 비신의 앞, 겉면을 비양(碑陽),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하고, 새겨진 글을 명(銘), 비음부분에 새겨진 글을 음기(陰記) 또는 비음이라고 한다.

 

비의 종류에는 능에 세우는 능비, 묘에 세우는 묘비, 공덕을 기리는 송덕비, 그 외로 순수비, 기념비 등이 있고, 최근에는 시비, 노래비 등이 있다. 이러한 비에 쓰인 문장들은 대체로 한자를 많이 썼으나 최근에는 한글을 많이 쓰게 되었다.

2. 비문의 격식과 내용


비문의 문체는 산문으로 된 서(書)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대별된다.

서와 명으로 된 비문을 대개 비명병서(碑銘幷序) 또는 비명이라 부른다.

서가 없이 명으로만 된 비문이나, 명이 없이 서로만 된 비문도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은 비송(碑頌) 또는 비기(碑記)라 하여 따로 구별하기도 한다.

서(序)는 비문을 쓰는 경위를 설명하는 부분으로 본문에 의의를 부여하는 곳이다.

비명은 4언·5언·7언 등의 운문으로 이루어진다. 명(銘)에서는 짧고 화려한 수식을 동원하여 공덕을 찬양하고자 <시경 詩經>의 송(頌)이나 아(雅)와 같은 전아한 시가에 그 근원을 둔다.

명이 없는 비기는 원래 한문 문체의 기(記)에서 온 것으로 기사(記事)를 뜻하는데, 사적비 따위의 사실을 기록하는 비문의 많은 부분이 이런 비기의 형식을 취한다. 비문을 서술하는 형식과 그 순서는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일반적으로는 내용에 따라 순수비문·기공비문·능묘비문·신도비문· 탑비문·사적비문·사묘비문·정려비문·송덕비문 등으로 나누어진다. 순수비문의 예로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는 신라시대 영토 확장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기공비문은 군장(軍將)의 전공을 기리고, 그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관구검기공비·유인원기공비 등이 있다.

능묘비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실물이 현전하는데 대개 주인공의 생몰 연대 및 그의 행적을 적는다.

신도비문은 조선시대에 당상관 이상의 고관을 지낸 사람에게만 세워주던 비인데, 뒤에 문중의 건비가 성행하면서 이런 제약이 흐려졌다. 신도비문은 비명, 주인공의 가계(家系)·행적 외에 글을 지은이와 글씨를 쓴 이, 그리고 건립 연월일 등을 기록한다.

탑비문은 통일신라시대부터 그 예가 보이고 있으나, 특히 고려시대에 크게 유행하였으며, 조선 시대에는 탑비가 줄고 신도비가 성행하였다. 사적비는 삼국시대에 경주 남산의 신성비에서 비롯되어 전시기에 걸쳐 건립되었다.

 

사적비문의 내용은 공사의 동기·진행과정·동원인력 등 일반적 사항과 때로는 관직명이 적히기도 하여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사묘비는 사당·묘정·서원 등에 건립되는 비인데, 그 비문에는 사묘의 설치된 유래와 관련된 인물의 공훈이나 사적을 적는다.

 

정려비는 효자비·효부비·열녀비로 나누어 대개 문중에서 건립하는데 조선 시대에서는 유교사상 아래서 크게 유행하였다.

정려비문은 사적과 찬송이 그 주요 내용이 된다.

송덕비문은 대개 선정비문과 시혜비문으로 갈라지는데, 운문으로 그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글 지은이는 밝히지 않고 세운 사람이나 동기를 밝힌다.비문의 서체에는 예서·해서·행서 등이 있는데, 전서는 조선 숙종 때 허목(許穆)이 쓴 척주동해비 (涉州東海碑)가 유명하다.

 

서체도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어, 점제현신사비는 고예(古隸), 관구검기공비·광개토왕릉비는 한예(漢隸)의 분서(分書)에 속하며, 해서가 가장 많고 다음이 행서이다. 비의 제액은 대부분 전서로 썼으므로 전액이라고도 한다.

 

문체는 운문·고문이 있으나, 당대 (唐代)부터 별도로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가 유행하여 우리나라에서도 신라 이후의 금석문은 대부분 이 문체를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3. 가례집람 1권(페이지 19 번역문)


당 아래에서 문에 이르기까지를 정(庭)이라한다. 정을 셋으로 나누어 그 북쪽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곳에 碑를 세운다.


[의례] 빙례편의 주석에 말하기를 “宮에는 반드시 비가 있다.

이는 해 그림자를 표시하여 陰陽을 알아보려고 설치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비를 설치할 때는 堂의 길이와 같게 한다.” 하였다.

堂의 길이란 당의 廉으로부터 북쪽으로 방실(房室)의 벽에 이르는 길이이다.

정을 셋으로 나누어 북쪽으로 삼분의 일에 해당하는 곳에 비를 설치하되 비는 당의 길이와 같이한다.

 

그러므로 정은 대개 당의 길이의 세 배가 된다.

또 살펴보니 <향사례>에서 후(侯 : 과녁)는 당에서 삼십장이 떨어진 거리이며, <대사례>의 侯는 당에서 오십사장이 떨어진 거리이다. 그러므로 정의 길이를 이로써 알 수 있는데 그 늘이고 줄이고 하는 제도도 이로써 미루어 알 수 있다.


[보충]

손하씨는 말하기를 "옛적의 이른바 碑라는 것은 곧 장례를 지내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손님 접대를 할 때 세운 나무였을 뿐이었는데 그러나 그 글자를 돌석(石)변에 쓴 것은 그 굳고 오래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4. 가례집람(번역본 p 82)


<주> 봉분과 비석은 각각 품수가 있다[註 墳碑各有品數]
[사림광기]에 ‘분봉을 함에 있어서 왕의 경우는 이수의 높이가 3자 2치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 9자 에 넓이는 3자 6치이며, 귀부는 높이 3자 8치를 쓴다.


1품의 경우는 이수의 높이가 3자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가 8자 5치이며, 넓이는 3자 4치이고 귀부는 높이 3자 6치이다. 2품은 대개 기린과 봉황을 쓰는데 높이는 2자 8치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 8자이며, 넓이가 3자 2치이고 귀부는 높이 3자 4치이다.

3품은 대개 천록과 벽사를 쓰는데 높이가 2자 6치이고 비의 몸통은 높이 7자 5치이며, 넓이는 3자이고 귀부는 높이가 3자 2치이다. 4품은 원수(圓首 : 비의 머리를 둥글게 하는 것)를 쓰는데 높이는 2자 4치이고 몸통은 높이가 7자이며, 넓이는 2자 8치이고 방부를 쓰는데 높이는 3자이다.

5품은 원수의 높이가 2자 2치이고 몸통은 높이가 6자 5치이며, 넓이는 2자 6치이고 방부는 높이가 2자 8치이다.

6품은 원수의 높이가 2자이고, 몸통의 높이는 6자이며, 넓이는 2자 4치이고 방부의 높이는 2자 6치이다.

7품은 원수의 높이가 1자 8치이고, 몸통의 높이는 5자 5치이며, 넓이는 2자 2치이고 방부는 높이 2자 4치다.

[용어설명]
◇이수(螭首) : 碑石의 머리로서 뿔 없는 용이 서린 모양을 새긴 형상.
◇귀부(龜趺) : 석각(石刻)한 거북 모양의 빗돌 받침.
◇천록(天祿) : 天鹿(천록)이락도 하며, 상상속의 동물을 말함.
◇벽사(辟邪) : 전설상의 신령한 짐승으로 두개의 뿔이 있으며, 사악함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함. 한나라 시대에 널리 쓰여짐.
◇원수(圓首) : 비석의 머리를 둥글게 한 모습
◇방부(方趺) : 네모난 모양의 빗돌 받침.
◇석수(石獸) : 석양(石羊), 석마(石馬), 석호(石虎) 등을 일컬음

5. 봉분의 크기


분영(墳塋)은 왕의 무덤 자리를 쌓을 때에는 주위가 110보(百步)이고 매 면(面)은 25보(二十五步)이며 봉분은 높이가 2장(二丈)이고 봉분 사방의 담의 높이는 1장이다. 석인(石人)은 넷을 두고 -문관 모형 둘, 무관모형 둘- 돌사자(石虎)는 둘이고 돌 말(石馬)도 둘이며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일품(一品)의 무덤 자리는 주위가 90보(九十步)이고 매 면은 22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8자이고 봉분 사방의 담의 높이는 9자 이다. 석인(石人)은 둘이고 -망자가 문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을 쓰고, 무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 하나와 무관 모형 하나를 쓴다. - 석호(石虎)도 둘이고, 석양(石羊)도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이품(二品)은 무덤 자리 주위가 80보이고 매 면은 20보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6자이고, 봉분 사방의 담의 높이는 8자이며 석인(石人)은 둘이고 - 망자가 문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을 쓰고, 무관일 경우에는 문관 모형 하나와 무관 모형 하나를 쓴다.- 석호(石虎)도 둘이고 석양(石羊)도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삼품(三品)은 무덤자리 주위가 70보이고 매 면은 70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4자이고 봉분 사방 담장의 높이는 7장이며 석호(石虎)는 둘이고 석양(石羊)도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사품(四品)은 무덤자리 주위가 60보이고 매 면은 15보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 2자이고 봉분 사방의 담장은 높이가 6자이며 석호(石虎)는 둘이고 석마(石馬)도 둘이며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오품(五品)은 무덤 자리 주위가 50보이고 매 면은 12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1장이고 봉분 사방 담장은 높이가 4장이고 석양(石羊)이 둘이며 석마(石馬)도 둘이고 망주석(望柱石)도 둘이다.

육품(六品)의 무덤 자리는 주위가 40보이고 매 면은 10보이며, 봉분의 높이는 8자 이다.
칠품(七品)의 무덤 자리는 주위가 40보이고 매 면은 7보 반이며, 봉분의 높이는 6자이다.

서인(庶人)의 무덤 자리는 9보이니 중심을 뚫으면 계가 18보이다.

『구씨의절』에 살펴보니 “『국조계고(國朝稽古)』에는 무덤 자리를 일정하게 제정 하였는데 일품(一品)은 90보인데 매 품계마다 10보씩을 줄였고 칠품(七品) 이하는 30보를 넘지 않았으며 서민(庶民)은 9보에 그쳤다.

봉분은 일품(一品)의 경우에는 높이가1장 8자(一丈八尺)이고 매 품계마다 2장(二丈)씩을 줄여가고 칠품(七品) 이하는 6장을 넘지 않는다. 그 석비(石碑)는 일품(一品)의 경우에는 이수(螭首)를 사용하고, 이품(二品)의 경우에는 기린(麒麟)을 사용하고, 삼품(三品)은 천록(天祿) ․ 벽사(辟邪)를 사용하며, 모두 귀부(龜趺)를 쓴다.

사품(四品)에서 칠품(七品)까지는 모두 원수(圓首)에 방부(方趺)를 사용한다.

그 석인(石人), 석수(石獸)의 길이와 넓이는 품계의 차례대로 줄여 내려가니 그 석인(石人)과 석수(石獸)와 망주석(望柱石)은 모두 순서가 있어서 영갑(令甲)에 나타나 있으니 살펴볼 만하다.

 

신분이 귀한 자는 천한 자와 같이 할 수 있으나 천한 자는 비록 부유하더라도 귀한 자와 같이 할 수 없다.

그러나 멀리 보는 자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에 남김없이 다 해버리지 않으니 약간 더하고 줄여 나가더라도 괜찮다.” 하였다.

『한묵대전(翰墨大全)』에 “서인(庶人)의 묘 자리의 네 방향은 중심으로부터의 거리가 각각 9보이니 이는 사방이 서로 18보 떨어진 것이다.”하였다. 식(式)을 살펴보니 땅 넓이 5장을 보(步)라 하니 이것은 관척(官尺)으로 매 한 방향이 합쳐 4장 5자(四丈五尺)이고 지금 시속(時俗)의 영조척(營造尺)으로 말한다면 5장 4자(五丈四尺)이다.

비석 머리를 각지게 한다(圭首)

『서경(書經)』주에 “규수(圭首)는 비껴 날카로움(斜銳)이다.” 하였다.


[부주] 풍비(附註豐碑)
『예기』「단궁」편에 “공실(公室)은 풍비(豐碑)에 준하는 것을 사용한다.”하였다.

그 주에 “풍비는 천자(天子)의 제도이다.” 하였고 그 소에 “대체로 시(視)라 말한 것은 견준다는 말이고 풍(豐)은 크다는 것이니 큰 나무를 사용하여 비(碑)를 만들되 비목(碑木) 가운데를 뚫어 공간이 비도록 하고 녹로(鹿盧)의 양 끝을 비목(碑木)에 넣는다. 그렇게 하여 밧줄을 써서 한 쪽 끝은 관에 묶고 다른 끝은 녹로에 묶는다.


이 작업이 끝나면 사람들은 각각 비(碑)를 등지고 밧줄 끝을 메고서 북소리에 맞추어 점점 뒤로 가면서 관을 내린다.“하였다. 『운회』를 살펴보니 ”놀로(鹿盧)를 보통 녹로(轆轤)라 하며 우물 위에 물을 길어 올리는 회전하는 둥근 나무이다.“ 하였다.

 

『구씨의절』에 “풍비(豐碑)는 나무로 만들어 외고나 앞뒤에 세우고 풍비의 구덩이 속에 녹로(鹿盧)를 만들고 줄로 매달아 관을 내리는 데에 Tm는 것일 뿐이니 그 위에 글자를 새기지는 않는다. 진(秦) ․ 한(漢) 이래로 점차 돌을 써서 풍비를 만들고 그 위에 글자를 세기며 그것을 비(碑)라 하였다.

 

진(晉) ․ 송(宋) 사이에 죽은 자는 모두 신도비(神道碑)가 있었으니 지리가(地理家)들이 동남(東南) 방향을 신도(神道)라 여겨 그 곳에 비(碑)를 세웠기 때문에 묘갈(墓碣)이라 이름 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오품(五品) 이하는 사용하는 문(文)과 비(碑)가 같고, 묘표(墓表)는 관직이 있건 없건 모두 표(表)를 써서 묘의 왼쪽에 세우고 지명(誌銘)은 땅 속에 묻는다.

 

사마온공이 말하기를 ‘옛 사람은 공훈(功勳)과 덕(德)이 있으면 이름을 종(鍾 )과 정(鼎)에 새겨 다만 스스로 그 어짊과 어리석음을 알 따름이다.’ 하였으니 예경(禮經)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남송(南宋) 원가(元嘉:424-453) 연간에 안연지(顔延之)가 왕주(王珠)를 위하여 묘지(墓誌)를 지었는데 그가 평민이라 명뢰(銘誄)가 없었다. 그리하여 행적을 적었으니 이로부터 마침내 이것이 습속이 되었다.

 

대저 비표(碑表)는 학생(學生)과 이력(履歷), 훈업(勳業)을 서술하고, 지명(誌銘은 가계와 관작(官爵) 그리고 주소지 생졸(生卒)연대를 기술한다. 비록 그 뜻이 좋은 것은 칭송하여 드러내고 나쁜 것은 드러내지 않았으나 옛 사람이 ‘좋은 점이 없는데 칭송하는 것을 속이는 것이라 하였고, 좋은 점이 있는데 칭하지 않는 것은 가리는 것이다.’ 하였는데 속이는 것과 가리는 것을 군자가 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6. 분묘도 및 비석도(가례집람 1권 300쪽)


비석 받침대의 높이는 1자 가량으로 한다.
석비는 오른쪽 앞에 세우기도한다.
세계(世系)와 이름자를 비석의 왼쪽에 새기되 돌아가면서 새겨서 비석 뒷면과 오른쪽에 이르기까지 두루 새긴다.

비석의 높이는 4자이다. 비석받침의 높이는 1자 가량이다.

 

출처 : 성균관 예절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