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선비<죽유 오운> 망우당 수병장으로 임란전투에 참가 임란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망우당 곽재우가 당시 경상감사 김수와 병사 조대곤에게 토적으로 몰려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때가 있었다. 이때 망우당은 의령 가례(嘉禮)마을을 지나다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죽유(竹牖) 오운(吳澐)을 만나게 된다.
망우당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을 안 죽유는 의병을 일으킨 일을 칭찬하면서 같이 일할 것을 약속하면서 자기의 말과 날센 노비 7~8명을 내주었다. 또한 마을 선비들에게 권유하여 장정들을 내게 하여 망우당을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자신은 병사를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조부 언의(彦毅)는 문과에 급제하여 전의현감을 지냈으며 퇴계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의 사위로 함안의 이름난 선비였다. 6세때 조부에게서 수학한 죽유는 자질이 뛰어나 주위의 기대가 자못 컸다. 18세때 퇴계의 맏처남 허사렴(許士廉)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장인이 아들이 없어 죽유는 맏사위로서 많은 토지와 집을 상속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죽유는 의령 가례에 있으면서 망우당을 만난 것이다.
19세때 김해 산해정으로 남명선생을 찾아 뵙고 제자가 되었다. 이때 남명은 삼가 토동에 거처하면서 젊었을 때 강학하던 곳인 산해정에도 가끔 머물곤 하였다. 이후로 죽유는 김해(金海)또는 삼가로 남명을 찾아가 수학을 하였다. 22세때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25세때는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퇴계를 찾아가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이때 퇴계와 죽유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기 보다는 친척으로 맺어져 있었다.
즉 조부가 퇴계 숙부의 사위이며, 죽유(송재 외증손자) 자신은 퇴계 맏처남의 사위이니까 처질서(妻姪壻)가 된다. 아무래도 퇴계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죽유를 대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35세때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자마자 곧 성균관 박사를 제수 받아 조정에 나아갔다. 이어 이듬해 다시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죽유는 급제후 성균관 학유 벼슬을 시작으로 사성까지 주로 성균관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38세때는 호조좌랑겸 춘추관 기사관을 지내고, 이해 겨울 외직인 명천현감으로 나갔다. 이듬해 관직을 그만두고 의령 가례촌으로 내려와 백암대(白巖臺)를 짓고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보내고자 하였다. 가례촌은 퇴계선생의 처가가 있는 곳으로 퇴계 선생이 왕래하면서 많은 흔적들을 남긴 곳이다. 죽유는 백암대에서 스승인 퇴계 선생의 숨결을 몸소 느끼고자 했으리라. 41세때 다시 전적, 직강(直講)등의 벼슬을 제수 받고 이듬해에는 정선군수로 나갔다. 44세때는 충주목사로 나가 팔봉서원을 완성시켰다. 이때 죽유는 춘추관 편수관을 겸직하고 있었다. 45세때 관직을 그만두고 의령으로 내려왔다. 충주목사로 있을 떄 여러 선임자들이 해결하지 못한 송사를 해결하였으나 이 송사가 감사 일가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해 감사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이 되자 고을 사람들은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 여기서 목민관으로 나가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결한 죽유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다. 47세때 의령에서 함안으로 돌아왔다. 이해 겨울 한강 정구가 함안군수로 내려오자 사직단을 중수하는 일을 의논하였으며, 이듬해에는 한강이 주도한 읍지 '함주지' 편찬에 참여하였다. 49세때는 성균관 사성을 제수받았다. 50세때는 광주목사로 나아갔으며 이듬해 벼슬을 그만두고 의령으로 돌아왔다. 53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여러 고을이 적의 침략으로 어지러운데도 고을 원들은 자기 살길을 찾아 도망을 가니 그야말로 온 강토가 왜적의 손아귀에 유린되고 있었다. 이 어려운 때를 당한 죽유는 의령에서 당시 곤란을 겪던 망우당을 만나 다시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무찔러야 된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망우당 휘하의 수병장을 맡는다.
이때 죽유는 광주목사까지 지낸 몸으로 당시 백면서생인 망우당을 도운 것이다. 나라를 위한 충정이 없었더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또한 죽유의 겸양지덕(謙讓之德)도 아울러 엿볼 수 있겠다. 당시 경상도 초유사로 학봉 김성일이 내려왔는데 죽유는 중도에서 학봉을 영접하였다. 학봉은 죽유의 충정과 인물됨을 알아보고 소모관으로 임명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으도록 하였다. 또한 망우당과 함께 낙동강이나 남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무찌르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게 된다.
이듬해 상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영주 천곡으로 갔다. 당시 영주에는 죽유 장인 허사렴의 전장(田莊)이 있었던 곳으로 죽유가 이 재산을 물려받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죽유는 영주에서 임란 때의 참혹한 상황을 정리하여 용이난이록(龍蛇亂離錄)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56세때 합천군수로 부임하여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을을 복구하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온힘을 쏟았다. 61세때는 스승 퇴계문집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연보 교정의 일을 담당하였다.
67세때 우리나라 역사서인 동사찬요(東史纂要)를 편찬하였다. 이 책에서는 단군왕검부터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역사를 기전체 양식으로 서술하였다. 동사찬요의 편찬으로 외직에 있으면서도 춘추관 편수관직을 겸임한 죽유의 역사에 대한 뛰어난 식견을 알수 있다. 서애 유성룡이 이 책을 보고 선조에게 추천하자, 선조는 "유림에 표준이 되는 책"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평소 충익사에 가면 망우당 외에 별 관심을 갖지 않았던 기자는 이번 취재를 통해 오늘의 망우당이 있게 된 데는 17장령과 수많은 의병들의 공이 있었던 점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죽유 역시 17장령중 한 사람으로서 충익사에 배향되어 있는 것이다. (1997.5.23. 경남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