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일(李守一)
생졸년 : 1554(명종 9) - 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효종 때 북벌계획으로 유명했던 이완대장의 아버지이다. 자(字)는 계순(季純)이며 호(號)는 은암(隱庵) 이고 시호(諡號)는 忠武(충무),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다. 1554년(명종 9)에 충주 서촌의 시곡에서 태어났는데 지금의 음성군 감곡면 영산리이다.
1583년(선조 16)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에 예속되었다가 1590년에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591년에 장기현감(長鬐縣監)이 되었다가 이듬해 임진왜란을 당했다. 이에 이수일은 동지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 분전하여 무수한 적병을 쳐 부셨다.
1593년에 밀양부사(密陽 府使)가 되고 이어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승진하여 더욱 분발하여 적을 맞아 싸워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으니 스스로 시석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앞에나가 싸웠다. 이에 선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올렸으며 글을 내려 포상하기를 "처음으로 보는 순국의 선비여 두터운 녹을 받은 지난날의 신하에 못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회령부사·나주목사(羅州 牧使)를 거쳐 1596년 정유재란(丁酉再亂)때에는 성주목사로서 명령을 어겨 결장종군(決杖 從軍)되기도 하였으나 1605년(선조 38)에 선무공신에 책록되었다. 광해군 때에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세 번이나 역임하면서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野人)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도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때에는 평안도병마절 도사겸 부원수가 되어 안현(鞍峴)에 진을 치고 이괄의 무리를 크게 깨트려 공을 세웠다. 반란 초기에는 너무나 황급했기 때문에 우선 훈련되지 않은 부곡의병사 200 여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가 서흥에서 반란군을 막으려 했으나 적은 사잇길로 하여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수일은 원수 장만을 만나서 병졸 천여명을 얻어가지고 장단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작전계획을 세운 뒤에 부하를 격려하며 앞서 나아가고 원수와 생봉 정춘신·남이흥 등은 뒤에 떠나 이수일과 함께 우선 안현을 사이에 고 좌·우에 진을 쳤던 것이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2등에 녹훈되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 졌다가 부원군(府院郡)에 추증(追贈)되고 형조판서(刑曺判書)에 이르게 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79세로 별세하니 좌의정에 증직되고 뒤에 충무라 시호했다. 이수일은 어질고 화순하여 병졸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등 행도을 같이 하였으므로 모두 그를 잘 따랐다. 적을 잘살피고 기회를 보아 승산이 있음을 확인한 뒤에 싸우니 패하는 일이 없었다. 믿음 과 절개를 지키기 40여년 청렴으로 쓰라림을 참고 검약을 지키고 겸양과 공손함을 실천하여 한천한 사라들과 다름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모두 따랐다 한다.
묘소는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있으며 지방기념물 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묘소로부터 서남쪽 전방에 사당인 충훈사가 있으며 그 앞으로 이경흥이 찬하고 김좌명이 글을 쓴 신도비가 있는데 1667년에 세워진 것이다. 충주시 가금면 민속자료전시관에 있는 이수일진무공신록권 및 영정은 지방유형문화재 17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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