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34대 마지막 임금 공양왕릉(하단)
▲아무리 멸망한 고려의 마지막 왕의 무덤이라 해도 조선 왕조에서 제사까지 지낸 왕릉위에 조선 사대부들의 묘를
썼다는 것은 겸양이 없다. 공양왕릉의 주변에 묘를 쓴 사람들은 조선 초기 병조판서를 지낸 정연의 세 아들과 신숙
주의 후손들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무덤은 두 곳에 있다. 강원도 삼척에도 있고, 경기도 고양시에도 있다. 어느 무덤이 진짜일까? 한때 주장이 팽팽히 나뉘었었고 지금도 그 지방 사람들은 자기네 땅의 무덤이 진짜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만, 문화재 관리국에서는 경기도 고양시의 무덤 쪽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전거가 확실하다는 면에서 이 판단은 옳다. 왜냐하면 <세종실록>에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진영을 고양군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고 명령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 고양시 공양 왕릉은 1970년 사적 191호로 지정 됐다. 그럼, 강원도 삼척의 있는 공양 왕릉은 어찌된 영문인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 골에 있는 공양왕릉. 위의 위풍당당한 무덤들과 석물들은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왕조에서 벼슬아치를 했던 사대부들의 무덤들이다. 왕릉 위쪽으로 서슴없이 터를 잡고 기세를 떨치고 있다. 공양 왕릉이 조선 사대부들의 묘보다 초라해 보이는 이유이다.
고려 34대왕이며 마지막 왕인 공양왕(1389-1392재위)은 고려 21대 희종(1204-1211)의 6대손으로 정원부원군 균(鈞)의 아들이다. 창왕을 폐위시킨 이성계일파의 강압으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으나 애시 당초 왕위는 허상(虛像) 이였다.
'공민왕-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적손의 혈통이 있었음에도 신종의 7대손이며 희종의 6대손인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한 것부터가 비극의 시작이었다. 이성계의 추대로 별안간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 무거운 짐을 어찌하면 좋으냐'며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공양왕의 예견은 틀리지 않았다. 쿠데타세력이었던 이성계일파의 기세와 협박은 왕이 즉위한 뒤 임명했던 대신들을 탄핵하는 것으로 시작됐고, 공양왕은 쿠데타세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대신들을 파직하고 유배시켰으며, 유배지에 있던 우왕과 그 아들 창왕을 살해하는 데 동의하고 만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이미 새 왕조의 집권 시나리오가 준비되어 있었고, 후환을 없애려는 계략으로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며 고려왕조의 인물들을 제거했던 것이다.
조선건국 후 공양왕은 정사에 어둡고 덕이 없다는 이유로 추방당한다. 허수아비 왕 노릇 3년만이었다. 1392년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고, 다음엔 강원도 간성 땅으로, 다시 삼척으로 더욱더 멀리 유배되었다가 1394년 이성계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한스런 일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그는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가 후일 다시 공양왕으로 추봉되고 무덤을 능(陵)으로 승격한 것은 22년 뒤인 1416년 태종 8년이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면 공양왕이 살해된 곳은 삼척이라는 얘기가 된다. 그럼, 공양왕의 무덤은 삼척에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특히 삼척에는 왕이 머물렀다는 '궁말(궁촌리)'이라는 지명이 있고 공양 왕릉이 있는 고개는 왕이 살해된 곳이라 하여 '살해재'라 불린다고 하니 이곳도 분명 공양왕의 죽음과 무관한 곳은 아니다.
우선 이런 추정을 해보자. 공양왕은 삼척에서 죽었다. 명을 받은 자객들은 공양왕을 확실히 죽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만을 잘라 이성계에게 가지고 갔다. 그래서 머리가 묻힌 곳과 몸뚱이가 묻힌 곳이 다르다.
따라서 경기도 고양시의 무덤은 머리를 묻은 곳이고, 강원도 삼척에 있는 무덤은 인근 사람들이 남은사체를 수습하여 묻은 자리이다. 이렇게 본다면 두 곳의 무덤 모두 진짜라는 얘기가 된다.
이런 추정도 가능하다. 처음 공양왕의 무덤은 당연히 삼척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태종 때 고려의 왕으로 추봉되면서 옛 고려의 수도 가까운 곳으로 이장했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시신은 옮겨갔지만 삼척 사람들은 비운의 왕을 추념하는 마음으로 옛 무덤자리를 계속 공양왕의 영혼이 계신 곳이라 믿으며 넋을 위로하고 슬픔을 달랬을 수도 있다.
그러한 민중의 정서가 지금까지 이어온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 고양시 원당의 공양 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여기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설화의 현장이 남아있다.
위 사진의 앞쪽 잡초가 무성한 곳은 작은 웅덩이인데, 지금은 이렇지만 옛날엔 여기에 꽤 큼직한 호수가 있었다고 하며, 이 호수에 왕과 왕비가 몸을 던져 자결했다는 것이다. 맨 위의 사진 왼쪽 안내판에 설화 내용이 적혀 있으며 안내판 뒤쪽에 고양시에서 능역 정화사업을 하면서 새로 조성한 물웅덩이가 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부부는 이성계에게 쫓겨 도읍지인 개경을 빠져나와 이곳까지 도망 왔다. 마침 날은 저물고 길은 막히고 난감하던 차에 어둠속 멀리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불빛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다.
공양왕 부부는 쫓기는 신세임을 말하고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했다. 이때 이 암자의 스님은 이제 새 왕조인 조선이 들어서 불교를 탄압하니 이곳은 안전하지 못하다고 하면서 절집에서 한참 떨어진 누각에 숨어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날마다 남의 눈을 피하여 이 누각에 밥을 날라다 임금님이 잡수시도록 하였다.
이런 연고로 지금도 누각이 있던 고개를 '대궐고개'라 하며, 누각의 다락에 숨어 지냈다 하여 '다락골'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임금님께 식사를 해 올렸던 암자가 있던 곳을 '밥 식(食)'자 '절 사(寺)'자를 써서 식사리(食寺里)라 했다는데 현재 식사동(食寺洞)이라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고, 왕릉이 있는 골짜기라 하여 지금도 왕릉골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렇게 스님이 지어 올리는 밥으로 연명하던 공양왕 부부는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밥을 가지고 누각으로 간 스님은 왕과 왕비가 사라진 것을 보고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헤매고 찾아보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고려의 왕씨 인척들과 힘을 합쳐 여기저기 찾고 다니는데, 어느 날 평소 공양왕이 늘 곁에 두고 귀여워했던 청삽살개가 호수를 들여다보면서 계속 짖어대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자 삽살개는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상히 여긴 스님과 인척들은 연못의 물을 퍼내고 아래를 살펴보았더니 연못 속에 옥새를 품은 왕과 왕비가 나란히 죽어있고 그 곁에 뒤따라 죽은 삽살개도 죽어있었다. 왕과 왕비는 망국의 설움을 견디지 못하고 연못에 몸을 던져 자결했던 것이고 삽살개는 왕과 왕비의 죽음 현장을 알리고 자기도 주인을 뒤따랐던 것이다.
그 뒤 왕의 무덤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삽살개의 의리와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삽살개 형상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놓았다고 한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순비 노씨의 능이다. 당국에서 철책을 두르고 능 양쪽에 소나무를 심고 나무의자를 놓아 쉼터를 만드는 등 신경을 많이 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공양왕릉은 정자각은 물론 참도도 없고 호석도 두르지 않은 봉분에 변변한 비석조차 없어 초라하기 그지없는 데다가, 찾는 사람도 거의 없는 듯 무덤자리, 쉼터 할것 없이 잡초가 무성하여 한없이 쓸쓸하고 고즈넉하기만 했다.
비운의 왕은 죽어서도 이렇게 처량한 신세가 됐구나 생각하니 망국의 슬픔을 안고 몸부림 쳤을 그의 인생이 더욱더 가슴에 쓰리다. 잔뜩 흐린 날씨에 빗방울까지 몇 가닥 이마를 스치며 애잔함을 더한다. 봉분 뒤에서 찍은 사진이다.
풍수상으로 보면 묘자리는 그런대로 작은 명당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겠다. 약 5리 정도를 산속으로 파고 들어와 살짝 돌아들어 우렁 속처럼 옴팍한 자리에 체백을 묻었으니 지세로 보면 참 편안한 자리임에 틀림없다.
비록 산줄기는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좌청룡 우백호도 갖추었고 앞벌판이 알맞은 넓이로 오곡을 키우고 눈앞의 길과 물이 살짝 에둘러 내려가 허전함을 가리고 아늑한 공간을 형성했다. 용틀임도 맥이 살아 내려왔고 힘이 뭉친 혈자리에 봉분을 앉힌것도 균형에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이 세력도 힘이 당당하거나 기운이 훤칠하지 못하고 차분이 주저앉은 형상이라고 해야할까. 따라서 탁 트인 조망이나 활달한 기상을 느낄 수는 없지만 은둔자나 아웃사이더의 공간으로는 더없이 포근한 터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오는 길에 보니까 무덤에서 나와 길이 꺾이는 어귀에 鷺仙이라는 호를 쓰는 어떤 사람이 움막 같은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지 미술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걸 보고 이런곳에 저런사람 그것도 꽤 괜찮은 어울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공양왕의 무덤은 쌍릉이다. 왼쪽이 왕이고 오른쪽이 왕비이다. 위의 사진은 공양왕의 봉분 앞에 세운 비석인데 아마 조선 초기 왕릉을 만들때 세운 것으로 보인다. 크기도 왜소하지만 솜씨 또한 간결하고 투박하다.
오랜 세월 글씨가 마모되어 윤곽을 찾기도 힘들다. 왕비의 무덤 앞에도 이와 비슷한 비석이 서있고, 왕과 왕비의 무덤 사이에 장방형으로 길쭉하게 세운 비석이 또 있는데 이것은 조선 후기 고종때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무덤 앞의 장명등도 참 옹색하고 못생겨 패망한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왕비쪽 봉분 앞의 석상이다. 이러한 석인(石人)은 양쪽으로 2쌍이 서있는데 참 궁색하고 어눌한 모습이다. 이 공양왕릉 바로 위쪽에 자리잡은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의 무덤들과 비교해 보면 권력이 현실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실감할 수 있다.
신씨, 정씨 그리고 또 다른 성씨들의 무덤으로 보이는 위쪽의 문관석 무관석 망주석 들이 우람하고 정교하고 위압적인 기운을 자랑하고 있는 모습에 비해 이 공양 왕릉의 석인들은 더없이 꾀죄죄하고 어리숙한 서민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찌보면 동네 어귀에 못나게 웅숭그린 토속 미륵상처럼 소박하기도 하여 애처로운 가운데 오히려 정감이 가기도 한다.
슬픔은 서로의 마음을 이렇게 껴안게 하는 것인가. 억울하고 처량하게 죽어간 마지막 고려 임금과 그의 부인 노씨를 생각하면 위풍당당한 장식보다 오히려 이처럼 수수하고 못난 무덤 장식들이 격에 어울린다 하겠다.
공양왕의 부인 순비(順妃) 노씨(盧氏)는 여기에서 가까운 교하 사람이라고 하는데, 비극의 왕 남편과 생사를 함께 하였으니 그녀도 참 가련하고 슬픈 운명이다.
출 처 : 이화에 월백하고 ㅣ 글쓴이 청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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