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사성선생 묘(경기도 기념물 21호) |
|
신립장군 묘를 돌아 나오면, 제일 가까이에 있는 묘가 맹사성선생 묘라서 소재지로 찾아 갔습니다. 좁은 마을길로 가다가 산 자락있는 곳에서 길은 있으나 막아 놓아서 걸어서 들어 갔습니다. 산자락을 조금 돌아서 올라가면 맹사성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
|
|
▲ 맹사성선생 묘소 | ▲ 맹사성선생 묘소 후경 |
맹사성선생 묘는 조선 초기의 묘라서 봉분은 한 단의 둘레석으로 사각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봉분 바로 앞에는 당시의 묘비가 있으며,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은 최근에 새로 조성하고 전에 사용하던 상석은 우측 한 쪽에 놓여 있습니다. 묘역 좌우에 서 있는 문인석은 비교적 작은 편이나, 당시에 조성된 석물입니다. 그러나 동자석과 봉분 우측에 있는 머릿돌이 있는 묘비는 100여년 남짓 보입니다. 맹사성 선생이 최영 장군의 손주 사위더군요. 그리고 맹사성 선생에 대한 일화가 많지만 묘지 여행에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
|
||
▲ 묘역 좌측 전경 | ▲ 동자석 | ▲ 우측 석물들 |
|
|
▲ 맹사성 선생의 묘역 마을 어귀에 있는 의령 남씨 사당과 비각 |
맹사성 선생의 묘역을 돌아 나오며, 마을 어귀에 있는 사당과 비각이 있어서 사진만 찍고 돌아와서 이 사당과 비각이 맹사성 선생의 사당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광주시 광남동사무소에 전화하여 어렵사리 직동 새마을 지도자님과 연결이 되어 확인해 보니 의령남씨의 사당과 비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전화 통화를 하시는 분도 맹씨라서 맹사성 선생의 사당이 이 근처 어디에 있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래서 소개드리는 아산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맹사성 선생의 묘를 이 곳에 쓴 이유가 있는냐고 물으니, 선생의 장례 행렬이 아산으로 내려 가는 중에 이 곳에서 만장이 바람에 날려 떨어져서 이 곳에 묘를 썼다고 하시더군요. 기록에 있는 내용이냐고 다시 물으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
맹사성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유적은... |
|
||
▲ 전세맹고불유물 5점 | ▲ 아산맹씨행단 | ▲ 아산맹씨행단내 사당 |
☞ 중요민속자료 225호 전세맹고불유물(傳世孟古佛遺物)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유품 5점이다. 유품은 옥적과 백옥방인, 채석포도문일월연, 수정죽절비녀, 목칠도형배 등이다. 옥적은 피리의 일종으로 백옥으로 만든 것이며, 백옥방인은 손잡이에 당사자를 큼직하게 새긴 옥도장이다. 채석포도문일월연은 우리나라에 많이 있는 자색 벼루의 일종이며, 수정죽절비녀는 수정을 대나무 밑둥처럼 다듬어 머리를 만들고 몸통에 구리판을 말아 끼운 비녀이다. 목칠도형배는 해당화의 밑둥치로 만든 표주박으로, 휴대하여 쓰는 음료수 잔이다. ☞ 사적 109호 아산맹씨행단(牙山孟氏杏壇)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 맹사성(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으로,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전세맹고불유물 사진과 아산맹씨행단 사진은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습니다. |
맹사성선생 묘 위치도 |
|
소재지 : 경기 광주시 직동 산27 빨간 압정이 있는 부군에 맹사성 선생의 묘소가 있습니다. 역시, 위치 설명은 못합니다. 이 곳은 사전에 이정표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여튼 직동까지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