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근대인물

애산 이인(愛山 李仁)

야촌(1) 2011. 7. 4. 11:55

■ 이인(李仁)

 

  이인[李仁, 1896년10월 26일(음력 9월 20일) ~ 1979년4월 5일)]은 항일독립운동가. 호는 애산(愛山). 대구 중구 사일동 출생으로,  고려 말의 문인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의 후예로서 그의 가계는 경주에서 세거했으나 애산이 출생하기 약 60년 전에 대구로 옮겨왔다.

 

  대구실업고보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정즉(正則) 중학을 거쳐 1917년 일본대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 다시 명치 대 전문 부 법학과에 편입해서 이듬해 졸업했다. 더불어 오늘날 대학원 과정인 일본대 고등전공과를 마쳐 변호사가 되었다.

 

  1917년 일본 세이소쿠[正則]중학을 나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를 졸업한 후, 대학원 과정인 니혼대학[日本大學] 고등전공과(高等專攻科)에서 수학하였다.

 

  1923년 변호사시험에 합격, 변호사를 개업하고 많은 애국인사들을 법정에서 변호하였으며, 1927년 조선변호사협회장에 선임되었다. 1932년 조선발명학회장에 추대되고 조선과학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학생시절, 일본 아사히신문에 투고한 일본 식민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심문을 당하기도 하고, 조선중앙일보에 실은 송년사는 조선독립사상과 민중궐기를 촉구한 내용이라는 구실로 총독부의 오랜 심문을 받기도 했다.

 

  의열단(義烈團)사건을 비롯하여 약 1천 5백여 건이나 되는 크고 작은 민족운동사건을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사상변호사 또는 혁명변호사라는 별칭이 붙었으며 끊임없는 일제의 감시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최현배, 김윤경, 장지영, 이희승, 김양수, 김도연 등과 조선어학회를 결성하여 조선어사전 편찬 등 한글보급운동에 진력하다가 구속되어 함흥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4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건강 때문에 보석으로 나와 해방을 맞았다.

 

  1942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사건으로 4년간 복역 후 1945년 8. 15광복과 더불어 대법관이 되어,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역임하고 1946년 검찰총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많은 일을 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과 불목(不睦), 퇴임하고 그 해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에 당선되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고 1960년 참의원(參議員)에 당선되었다.

1962년 유엔인권옹호한국연맹 이사에 선임되어 활동하고, 1972년 민족통일촉진회장 ·통일원 고문 등을 역임하였으며, 5. 16군사정변 후에는 야당 원로로서 야당통합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애산은 항일구국투쟁 뿐만 아니라 많은 교육기관 설립과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또한 과학입국, 발명입국으로 독립조국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과학보급회와 조선발명학회, 그리고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이들 3단체의 활동과 이념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조선과학보급회에서는「조선과학」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했고, 조선물산장려회에서는「신흥조선」이란 일간지를, 조선발명학회에서는「조선발명」이라는 월간 기관지를 각각 발행하는 등 출판사업에 앞장서기도 했다.

 

  애산은 부모님의 회갑을 기념하여「조선 문자어학사(朝鮮文字語學史)」를 펴냈는데 오늘날 기념논문집의 효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애산은 그의 평소 근검절약하는 생활철학을 육연삼불(六然三不)이라 했다.

 

□ 6연(六然)이란?

  ◇자처초연(自處超然),즉 스스로 초연하게 행동하라.

  ◇대인애연(對人靄然), 즉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할것.
  ◇무사징연(無事澄然 ), 즉 무사할때는 깨끗하게 지낼것.

  ◇유사감연(有事敢然), 즉 일을 당해서는 겁내지 말며,

  ◇득의담연(得意淡然), 즉, 뜻을 이루었을 때는 담담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즉, 실의에 빠졌을 때도 태연 한다는 뜻이다.

 

□ 3불(三不)이란?

  ◇불노불소(不怒不笑),  즉 함부로 화내지도 웃지도 않으며,

  ◇불급불완(不急不緩), 즉 바쁘지도 느리지도 말고,

  ◇불허불영(不虛不盈), 즉 속이 비어있지도 가득 채우지도 않는 다는 뜻이다.

 

  평생을 독립운동과 민권운동에 앞장섰으며 한글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기증하는 등 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그는 유언을 통하여 집을 포함한 전재산을 한글학회에 기증, 오늘의 한글회관을 건립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1969년 무궁화 국민훈장이 수여되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저서에 「법률과 경제」 「애산여적(愛山餘滴)」「반세기의 증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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